지역에서 본 세상

사후 백 년 지나서야 공신 대접 받은 곽재우

김훤주 2018. 6. 12. 1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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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우당 곽재우는 임진왜랑 당시 가장 먼저 떨쳐 일어난 의병장이다. 여러 전투에서도 백전불패를 기록한 대단한 인물이다. 애초 질 만한 싸움이라면 하지 않았고 이길 만하다 싶은 전투만 나섰다. 뒤집어 말하자면 이길 수 있는 조건을 갖춘 다음에 싸웠지 무모하게 나서지 않았다는 얘기다


인품도 대단했다. 임진왜란 이전에 일찌감치 벼슬로 출세하겠다는 생각을 접었다. 그렇게 의령 초야에 묻혀 살다가도 왜적 침략으로 백성들이 고단해지고 나라가 위태로워지자 친가·처가·외가 모두의 재산을 털어 의병을 일으켰다.(뒤집어 말하면 친가·처가·외가 모두 쫄딱 망했다.)


전란이 끝난 다음에는 언제 나섰느냐는 듯이 다시 원래대로 숨어들었다. 심지어 임금이 벼슬에 불러내었는데도 그것을 거절했다가 괘씸죄에 걸려 귀양살이를 가기도 하였다. 지역사회가 그이를 박대했을 리는 없었겠으나 패랭이를 삼아 팔아 입에 풀칠을 할 만큼 청빈하게 살았다

곽재우가 말년을 보낸 창녕 낙동강변 언덕배기 망우정.

그런 덕분인지 같은 계열인 선배 정인홍은 나중에 인조반정을 맞아 칼날에 목이 잘려 죽음을 당하지만 곽재우는 어쨌거나 자기 의지대로 죽을 수 있었다. 정인홍도 나쁜 인물은 아니었지만 벼슬에 나선 탓으로 참담한 최후를 맞았지만 곽재우는 그렇게 하지 않았기에 자연사를 할 수 있었다.


이처럼 어느 모로 보나 반듯하고 훌륭한 인물인데도 처음부터 조정으로부터 대접을 제대로 받은 것은 아니었다. 어쩌면 처음에는 소홀하였지만 갈수록 진정성이 알려지는 바람에 대접을 많이 크게 받은 경우라 할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대부분 임진왜란 당시 전공이 곧바로 인정되어 무슨 공신으로 책봉되었으리라 짐작하지만 천만의 말씀 만만의 콩떡이다. 임근 선조는 그럴 정도로 품이 넉넉한 인물이 아니었다. 전공이 적지 않았는데도 곽재우는 배척되었다

곽재우 의병을 모집할 때 이 나무에 북을 걸어놓고 두드렸다고 한다. 그래서 이 나무는 이름이 현고수(懸鼓樹)가 되었다. 곽재우 생가가 있는 유곡면 세간리에 있다.

<선조실록> 1604625일자 기사다. “선무공신(宣武功臣) 1등은 이순신·권율·원균 ……2등은 신점·권응수·김시민·이정암·이억기 ……3등은 정기원·권협·유사원·고언백·이광악·조경·권준·이순신(李純信기효근·이운룡……이라 하였다. …… 모두 18인이다.” 


물론 곽재우가 선무공신에 빠져서 아쉽다는 얘기가 없지는 않았다. <선조실록> 같은 해 1029일자에서 실록을 쓴 사관은 이런 논()을 남겼다.(다른 기록까지 좀 더 찾아보면 당시 정황이 좀더 자세하게 드러날지도 모른다.) 

정암진전투가 있었던 솥바위 일대.

정인홍·김면·곽재우는 영남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김천일·고경명·조헌은 충청·호남에서 절개에 죽었다. 그들의 공렬(功烈)은 너무도 찬란하고 열렬하다. …… 그들의 이름을 경종(景鍾)에 새겨 후세에 보인다면 …….” 

경종은 공훈을 새겨넣는 종이라 한다. 그렇다면 이름을 경종에 새기는 것은 공신록에 이름을 올리는 것이다. 


이처럼 지금 관점에서 보면 어지간하면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시호조차 처음에는 곽재우에게 없었다. 이런 까닭에 <조선왕조실록>에서 곽재우 시호 관련 운운 기록은 사후 90년이 지나서야 겨우 찾아볼 수 있다


<조선왕조실록> 1709년 숙종 3549일자 기사에서 곽재우 장군에게 시호(諡號)와 그에 걸맞은 관직을 내리기로 결정한다. 그러나 실제로 시호 충익(忠翼)이 내려지고 판서(判書)가 추증된 때는 이태가 지난 뒤인 1711년 숙종 37616일이었다. 사후 90년 어름이다.

그러고 나서도 이 추증과 시호는 오랜 세월 문서 속에만 있었다<영조실록> 431737년 기사를 보면 이렇게 되어 있다.


경상도 감사 민응수(閔應洙)가 상소하여 아뢰기를,

일찍이 숙종조(肅廟朝) ……곽재우 …… 또한 벼슬과 시호를 추증하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거의 30년이 지나도록 아직도 삼가 은명(恩命)을 받지 못했으니, 특별히 명하여 거행하게 하고 자손들도 녹용(錄用)하여 선조(先朝)의 총전(寵典)을 마무리 지으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이대로라면, 30년이 지나도록 직전 임금임 숙종이 내린 명령(은명恩命)이 곽재우의 후손에게 전달되지 않았던 것이다. 따라서 임금이 내린 특별히 내리는 은혜(총전寵典)가 실행되지 못하여 자손들이 벼슬에 채용(녹용錄用)되지도 못하는 지경에 있었다(조선 조정이 낙동강과 남강 합류 지점 의령 기강나루에 보덕불망비를 세우는 것은 이로부터 다시 50년가량이 지난 1785년이다.) 


결코 자기 한 몸을 위하여 살았던 일생도 아니었고 누구더러 알아달라고 나부댄 일생도 아니었다. 곽재우는 알면 알수록 무어라 할 수 없는 아우라가 느껴지는 인물이다. 이렇게 사는 삶이 제대로 된 삶이라고 본보기를 보여주는 그런 인물이다.(물론 신분제의 한계는 뛰어넘을 수 없었지만 그것은 시대의 탓이지 곽재우의 탓은 아니다.)


그래서인지 조선 조정은 100년 넘게 세월이 흐른 뒤에야 장군의 값어치를 조금이나마 알아보았다. 그런데 언젠가 한 번은 쓰겠지만 지역 주민들은 곽재우를 당대에 바로 제대로 대접했고 고마워할 줄도 알았다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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