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본 곳

십수교는 못 보고 공룡알 화석만 보았다

김훤주 2018. 3. 27. 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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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220일 십수교(十水橋)를 찾아 나섰다. 1530년 완성된 조선시대 지리책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나온다. ‘진주목교량조에 주 남쪽 28리에 있다. 사천(泗川) 경계이다.”라고 적혀 있다. 다른 어떤 책에는 사천을 중심으로 잡아 사천 북쪽 5리에 있다.”고 나오기도 한다


이러나저러나 사천과 진주 사이에 있는 다리라는 얘기다. 인터넷과 옛 문헌을 뒤졌으나 정확한 위치는 나오지 않았다. 원래는 섶(나무의 잔가지)으로 만든 섶다리라는 얘기도 보였고 지금은 없어졌다는 기록도 보였다


그런 기록 대부분이 십수교가 지금은 사천과 진주 경계가 아니라고 되어 있었다. 같은 사천시 안에 있어서 사천읍과 축동면을 잇는다고 했다. 처음에는 어쩌다 이렇게 달라졌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나중에 보니까 행정구역이 바뀌어서 그렇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지금 사천시의 정중앙에 있는 이루는 축동면이 조선시대에는 진주 소속이었다. 축동면 서쪽에는 곤양군이 있었고 사천시는 축동면 동쪽에 있었다. 1861년 김정호가 펴낸 <대동여지도>를 보아도 그렇게 되어 있다.(그 때는 삼천포 일대와 창선섬도 진주 소속이었던 모양이다.) 


그러던 것이 일제강점기인 1914년 행정 통폐합으로 곤양군 동쪽 부분+진주 축동면까지를 합하여 새롭게 사천군이 되었다. 아래 <대동여지도>에서 사천과 곤양 사이에 진주 땅으로 삐죽 틔어나온 부분이 축동면이다. 

마침 경애하는 윤병렬 선생이 사천 출신이시라기에 졸라서 길을 나섰다. 윤 선생은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사천읍에서 축동면 소재지로 넘어가는 어귀에 있으리라 짐작했다. 동네 아는 형님한테 전화를 했는데도 정확히는 모르겠다 했다


그러면서 동치교 어귀로 데려갔다. 지도를 보면 동치교가 나온다. 왼쪽에 하나가 있고 아래에 있는 다리도 이름이 동치교다. 이 동치교 어름이 우리 윤병렬 선생이 보았을 때 옛날 십수교 자리란다

위 사진에서 연두색 네모 부분. 붉은색 둘은 동치교이고 푸른색은 나무 아래다.

위 지도에서 아래쪽 동치교.

같은 위 지도에서 오른쪽에 있는 동치교.


일단 그럴 듯했다. 먼저 사천읍에서 축동면 소재지로 가는 길목이다. 다음으로는 하천(중선포천) 가에 나 있는 자리다. 요즘은 최단거리가 길의 경제학의 전부지만 옛날은 달랐다. 짧으면 좋기는 매한가지였지만 그것만이 전부는 아니었다. 농사를 지을 수 있는 땅은 둘러 갔고 걷기 어려운 산길도 어지간하면 피했다. 이렇게 보면 하천 가장자리가 가장 적격이다


이래저래 생각하니까 더 이상 구체적인 무엇을 바라는 것은 사치라는 생각이 들었다. 속으로 이 정도에서 만족해야지하면서 맞은편을 바라보니 거기 나무가 참 근사했다. 여름이면 잎이 우거지고 그늘이 상당할 것 같았다


저런 정도면 저 아래에 무엇이 있어도 있겠다 싶어서 건너가 보았다. 과연 사람 흔적이 남아 있었다. 먼저 나무를 받치는 밑둥이 인공의 산물이었다. 켜켜이 돌을 쌓아 나무가 기울어지지 않도록 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저 나무도 말하자면 사람의 작용으로 저렇게 있는 셈이다.


한편으로 보니까 옛날 빨래터로 쓰였음직한 콘크리트 자취도 남아 있었다. 그렇다면 빨래터로 드나들었을 길도 있었을 텐데, 하면서 고개를 돌려보니까 언덕배기에서 그리로 이어지는 콘크리트 계단이 나 있었다

윤병렬 선생이 빨래터로 짐작되는 자리에 서 있다.


왼쪽 중간 즈음에서 오른쪽 위로 계단이 이어져 있다.


더욱 더 멋졌던 것은 거기 바위였다. 경남에서 바닷가 아니라도 손쉽게 볼 수 있는 퇴적암이었다. 옛날 펄이었던 것이 쌓이고 굳어지고 압력과 열을 받으면서 굳어져 생겼다. 거기에 자취가 있었다. 내가 보기에는 100% 공룡알 화석이었다공룡알 아니면 어떻게 이런 자취가 남을 수 있을까 싶었다






옆에 있는 다른 바위를 보아도 쉽게 구분이 되었다. 여기 사진에 나오는 이 곰보 같은 바위는 공룡알과는 전혀 무관하다. 한 덩어리 같은 바위이면서도 다른 성분이 섞여 있을 수 있고 당연히 무르고 굳은 정도가 한결 같지 않았다. 말하자면 성질이 무른 부분이 다른 단단한 부분보다 먼저 풍화 또는 침식되어 이렇게 패여 나가게 되었다

침식 또는 풍화로 말미암아 곰보가 된 바위.


그런데 공룡알 화석 같다고 짐작한 부분은 전혀 그렇지 않다. 패여 있기는 했지만 그것이 풍화 또는 침식으로 그렇게 된 것은 아닌 것 같았다. 100% 맞는지 틀렸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냥 짐작하기에 이것은 공룡알 껍데기와 알맹이로 구분되는 것 같았다. 물렁물렁한 알맹이 부분은 사라지고 딱딱한 껍데기만 화석으로 굳어 이렇게 흔적을 남기지 않았을까 싶었다. 물론 물렁물렁한 알맹이가 패여 나가지 않고 때로는 그대로 남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이런 짐작이 맞다면 그 옛날 공룡은 여기 알을 낳았고 인간이 새로 세상을 경영하면서 여기서 빨래도 하고 오르내리기도 했다. (이게 공룡알 화석인지 아닌지 관련 학자가 한 번 확인해 주면 좋겠다.) 그런 자취가 사천과 진주 경계를 이었던 십수교 어름에 있었다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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