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에서 본 세상

안유 보안계장이라는 사람을 어떻게 볼 것인가

기록하는 사람 2018. 1. 12. 15: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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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년 전 1987년의 사람들이 언론에 호출되고 있다. 영화 < 1987 > 덕분이다. 박종철 열사의 아버지 박정기 어른과 형 박종부 씨, 이한열 열사의 어머니 배은심 어른은 물론이고, 영화 속 검사 최환, 중앙일보 기자 신성호, 동아일보 기자 윤상삼, 의사 오연상과 황적준, 재야인사 이부영과 김정남, 교도관 안유, 한재동, 전병용까지 언론에 등장했다.


이들 중 문제가 되는 인물이 있다. 영화 속 영등포교도소에 수감 중이던 재야인사 이부영에게 고문치사 사건이 축소조작되었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안유 보안계장이다. 1987년에 그랬던 그가 이후 다른 교도소에서 보안과장으로 재직하면서 시국사건 수감자들에게 가혹행위 등 온갖 악행을 저질렀다는 증언이 잇따르고 있기 때문이다.


2018년 1월 12일자 경남도민일보 1면. 안유가 1990년 마산교도소 보안과장으로 근무하던 중 그에게 '비녀꽂기' '통닭구이' 등 가혹행위를 당했다는 사람들의 증언을 보도하고 있다.


그런 사실에 대해 < 경남도민일보 >가 1월 12일자 1면에 보도했고, 이에 앞서 < 한겨레 >도 강용주 진실의힘 재단 이사가 1992년 대구교도소에서 보안과장으로 있던 안유에 의해 전향공작과 가혹행위를 당했다는 사실을 보도했다.


가혹행위 피해자들은 특히 이부영 전 의원이 안유에게 "훈장이라도 줬으면 한다"는 페이스북 글에 분개했다. 그래서 이부영 전 의원의 페이스북 글을 찾아봤다.



아마 이 글을 쓴 이부영 전 의원은 1987년 자신이 있는 영등포교도소 이후 안유가 어떤 악행을 저질렀는지 몰랐을 가능성이 크다.


그렇다면 1987년 재야인사 이부영에게 그랬던 안유는 왜 이후에 그런 짓을 저질렀을까? 이에 대한 그의 생각은 무엇일까? 그래서 가장 최근 그가 교도관 한재동과 함께 인터뷰이로 등장했던 < 경향신문 > 기사를 찾아봤다.


경향신문 기사 : [1987 그리고 나]보안계장은 그가 ‘비둘기’인지 몰랐다


이 기사에서 안유는 "영화에서 보안계장의 역할이 미화돼 있다는 비판도 있습니다"라는 기자의 질문에 이렇게 대답한다.

안유 = “전 의인이 아닙니다. 대학생들은 저를 가리켜 ‘전두환의 주구, 사냥개’라고 했어요. 학생 수형자들은 제 얼굴에 짬밥을 뿌리기도 했죠. 그때 학생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듭니다. 당시엔 수형자들이 고성 등 문제를 일으키면 포승과 수갑을 채우고 입을 막는 방성구를 씌웠어요. 그게 규정이었습니다.” 


'미화돼 있다'는 지적을 인정한 것이다. 그러나 '포승과 수갑을 채우고 입을 막는 방성구를 씌웠'다는 사실을 고백할 뿐 '비녀꽂기'와 같은 가혹행위는 털어놓지 않았다. 그리고 '그게 규정이었다'는 말로 슬그머니 자신을 잘못을 합리화한다.


1990년 7월 29일자 한겨레 보도


어떻게 된 일일까? 그가 변한 걸까? 아니면 원래 이중적인 인물이었을까? 그 단서도 위 < 경향신문 > 기사에서 발견해볼 수 있다.


그는 이부영과의 인연을 이렇게 말한다.


“이부영씨가 ‘동아일보 자유언론실천선언’을 했다가 서울구치소에 투옥된 1974~75년쯤 서울구치소에서 처음 만났어요. 이부영씨와 군대생활을 같이한 제 고교 동창이 구치소 관구 주임이었던 제게 그를 부탁했죠. 자주 대화하며 친분을 쌓다 헤어졌는데 1986년 영등포교도소에 이부영씨가 들어오면서 재회했습니다. 당시 그에게 집단구호, 단식 등으로 저항하는 학생들을 설득해달라고 부탁했고, 도움을 많이 받았죠. 이부영씨는 재소자 대표, 전 교도소 대표로 협상을 했고, 학생들은 그를 통해 자신들의 요구조건을 제시했어요. 주로 법무부가 금지한 책을 반입해달라는 내용이었고, 전 당국 몰래 눈감아줬죠.” 

즉 고교 동창의 부탁을 받으면서 알게 됐고, '공안사범' 관리를 전담하는 그의 필요에 따라 서로 협력 또는 이용하면서 가까워졌음을 은연 중 털어놓고 있다.


은폐된 고문경찰 3명의 이름을 이부영에게 알려준 것도, 그게 곧바로 바깥으로 알려질 것을 모르고 한 일이었다. 이부영이 나중에 출소하고 나서야 알려질 것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이에 대해 기사는 이렇게 서술하고 있다.


안씨는 며칠을 고민한 후 이부영을 사무실로 불렀다. 커피를 내주고 “큰일났다. 이러다 나라가 망하겠다. 형이 언젠가 출소할 테니 기록으로 남기라”며 보고 들은 내용을 전했다. 하지만 안씨는 “당시 분노를 느껴 고민 끝에 이부영씨에게 전했지만 그게 곧바로 바깥세상에 알려질 줄은 몰랐다”며 “다음날인가, 이부영씨가 내게 박종철 관련 모든 업무일지와 자신과 면담한 기록까지 다 없애라고 하는 얘기를 듣고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으며 소름이 돋았다”고 회고했다. 

이런 정황으로 보아 교도관 한재동과 달리 보안계장 안유는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이나 신념보다는 자신의 직무(공안사범 관리)를 잘 수행하기 위해 이부영과 '주고받는' 사이로 친분을 쌓았고, 그런 과정에서 자신이 전한 이야기가 얼마나 큰 일로 비화할지도 모르고 말했다가 '가슴이 철렁 내려않으며 소름'까지 돋았던 것이다.


영화 <1987>의 실제 모델인 안유 전 영등포교도소 보안계장(오른쪽)과 한재동 전 교도관이 지난 4일 서울 용산구 박종철기념관 5층에서 얘기를 나누고 있다. 과거 치안본부(현 경찰청) 대공분실이었던 이곳에서 1987년 1월14일 박종철씨가 물고문을 받던 도중 숨졌다. /경향신문 사진


이 외에도 인터뷰 전반적인 내용을 통해 한재동은 확고한 신념을 갖고 위험을 무릅쓴 반면 안유는 그것과 거리가 멀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 안유였지만, 이어진 6월항쟁과 직선제 개헌의 결과로 민주세력이 집권에 성공했더라면 그 또한 민주주의자로 거듭났을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결과는 5공 정권의 연장인 노태우 당선으로 나타났다. 그래서 그는 더더욱 1987년의 '내부정보 유출'이라는 자신의 '과오'를 감추기 위해서 '공안사범 관리'라는 정권의 하수인 역할에 충실하려 했을 것이다.


바로 그게 마산교도소와 대구교도소 보안과장 재직시의 가혹행위로 드러난 것이고, 그런 덕분에 교정계의 최고위직인 서울교정청장까지 지낼 수 있었을 것이다.


이런 사실에도 불구하고 나는 영화 < 1987 >이 안유 보안계장을 미화하고 있다는 비판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영화는 역사적 사실을 모티브로 하고 있지만 다큐멘터리는 아니다. 따라서 영화 속 시기 이후 안유의 행적까지 조사해 담아야 할 이유는 없다.


그러나 영화는 영화고, 역사는 역사다. 역사는 안유라는 사람에 대해 보다 철저한 사실을 기록해야 한다. 그래서 < 경남도민일보 >와 < 한겨레 >의 보도는 중요한 기록이다. 두 신문에 보도된 사례 말고도 훨씬 더 많은 안유의 악행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벌써 페이스북에는 다른 사람들의 피해증언도 올라오고 있다.



포털에서 '안유'를 검색해봤더니 1944년 생이다. 지금은 대한민국재향군인회 에너지사업소 전무이사라고 한다. 그는 2004년 서울교정청장을 끝으로 정년퇴직했는데, 1990~1992년에 있었던 가혹행위라면 아마 밝혀진다고 해도 공소시효가 이미 지나 처벌은 불가능할 것이다.


비록 처벌할 수는 없다고 해도 역사는 엄밀히 기록해야 한다. 그리고 안유의 좀 더 진솔하고 통렬한 고백과 인정, 사과를 기대한다. '미안하다'는 정도로는 부족하다.


더 정확한 역사기록을 위해 많은 분들의 증언과 제보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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