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에서 본 한국현대사

여양리 민간인학살 암매장 동원됐던 박전규 씨

기록하는 사람 2017. 8. 21. 0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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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쪽만 쳐다보면 항상 마음에 걸렸어” 

마산시 진전면 여양리 옥방마을 뒷산에서 한국전쟁 개전 초기 학살된 민간인들의 유골이 세상 밖으로 드러나는 데는 꼭 52년이란 세월이 걸렸다. 그것도 한반도를 휩쓸고 지나간 태풍 ‘루사’의 도움을 받아서였다. 

학살된 유골이 그곳에 암매장돼 있다는 사실은 이미 3년전부터 세상에 알려졌다. 99년 10월26일 <경남도민일보>의 발굴보도 이후, 2000년 7월16일에는 MBC <시사매거진2580>을 통해 전국으로 알려졌다. 

이에 민간인학살문제 해결을 위한 경남지역모임(대표간사 서봉석 산청군의원)과 피학살자 부경유족회(회장 송철순)에서도 각각 이 지역을 답사한 뒤 발굴조사를 계획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그 사이를 참기 힘들었던 것일까· 무거운 돌무더미 속에 눌려 52년간 신음하던 유골들은 마침내 태풍의 도움을 받아 스스로 자신의 모습을 세상에 드러내고야 말았다. 

3년전 이 사건을 보도했던 <경남도민일보>는 당시 마을주민들이 경찰의 지시로 시체를 매장하던 풍경을 이렇게 전하고 있다.

“그때 시체를 묻어주고 온 시숙이 벌벌 떨면서 ‘목숨이 붙어있던 사람들이 살려달라고 애원을 하더라’면서 엉엉 울더라구. 그런데 경찰이 옆에서 지켜보고 있으니 살려줄 수가 있나. 어휴, 지금도 소름이 끼치네.”(김모씨·여·77·진전면 여양리 둔덕마을) 

마을 사람들은 시체끼리 엮어 놓은 광목을 낫으로 자른 후 인근 폐광(금굴)으로 옮겼다. 그러나 시체가 워낙 많아 이내 금굴이 가득 찼다. 굴 입구를 돌멩이로 막은 후 다른 곳에 구덩이를 팠다. 거기에 또 수십구의 시체를 묻고 흙과 돌을 덮었다. 

이번에 발견된 암매장터는 금굴에 시체가 넘쳐 다른 곳에 팠던 구덩이였다. 금굴에는 150여구, 이번에 발견된 구덩이에는 50여구의 유골이 암매장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옥방마을 박전규 씨 @김주완

기자는 당시의 상황을 좀 더 자세히 알아보기 위해 52년전 암매장 작업에 강제동원됐던 박전규(80·여양리 옥방마을)옹을 만났다.

“그때도 장마철이었는데, 시체를 묻은 뒤에도 어찌나 썩은 냄새가 많이 나든지…. 지금도 생각만 하면 끔찍한 생각이 들어.”

전옹은 당시를 회상하며 다시 몸서리를 쳤다.

“점심 때쯤 됐나· 비가 억수로 왔는데 경찰인지 군인인지 모를 사람들이 트럭 4대에 사람들을 실어왔어. 사람들끼리 굴비 엮듯이 엮여 있었는데, 좀 있으니 총소리가 찢어발기는 듯이 들리더군.”

전옹은 그 후 지서장이 마을주민들을 동원, 학살된 시체의 암매장을 지휘했다고 말했다. 

“사람들을 끌고 왔던 군인인가, 경찰인가 하는 사람들이 지서에 숫자를 말해주고 시체를 확인하라고 한 것 같아. 매장할 때 경찰한테 200명이라고 들었어.” 

전옹은 당시 생존자가 있었던 것으로 기억했다. 3명이 현장에서 도망쳤는데, 그중 1명은 다시 지서에 붙잡혀 총살당했다고 증언했다.

“늦었지만 유골이라도 수습해 안장해줘야지. 지금이라도 그렇게만 해준다면 고맙지. 그쪽만 쳐다보면 항상 그게 마음에 걸렸어.” 

그는 이미 노환으로 귀도 어둡고 발음도 정확하진 못했지만, 재판도 못받고 억울하게 숨진 영혼들이 평생동안 자신을 괴롭혀 왔다고 털어놨다.

2002년 09월 09일 (월)

김주완 기자 wan@domin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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