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속의 한 컷

48년 전 여름 마산은 울음바다였다

기록하는 사람 2008. 8. 1. 08:21
반응형

사용자 삽입 이미지

소복을 입은 아낙네들이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울고 있다. 무슨 일일까?

1960년 마산 3.15의거와 4.19혁명에 의해 이승만 독재가 무너지자, 가장 먼저 진상규명을 요구하고 나선 사람들은 한국전쟁 당시 재판도 없이 민간인 신분으로 국군과 경찰에 의해 집단학살당한 사람들의 유족이었다. 이승만 정권에 의해 상시적인 감시대상으로 찍혀 반강제적으로 국민보도연맹에 가입된 사람들, 미군의 무차별 폭격에 의해 학살된 민간인들, 인민군이나 빨치산과 내통했다는 누명을 쓰고 주민 전원이 몰살된 마을...

사용자 삽입 이미지노현섭씨의 일기장.

킬링필드를 능가할 정도로 이렇게 학살된 숫자가 전국적으로 최소 30만, 최대 100만 명에 이르렀다. 경남 마산에서만 해도 1681명이 바다에 수장되거나 산기슭에서 총살당했다.

무고하게 가족을 잃은 유족들은 전쟁이 끝난 후에도 이승만 정권 치하에서는 입도 뻥긋하지 못한 채 통한을 품고 침묵으로 살아왔다.

그러나 4.19혁명으로 이승만 독재가 무너지자 10년동안 맺혀온 한이 복받쳐 터져 나왔다. 아들을 잃은 어머니, 남편을 잃은 아내, 아버지를 잃은 아들들은 1960년 6월 12일 마산상공회의소 대회의실에 모여 마산피학살유족회를 결성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노현섭씨의 일기장은 "장내는 울음바다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사진은 당시 유족회장으로 선출된 노현섭씨의 아들 노치웅씨로부터 2000년 7월 입수한 것이다. 함께 입수한 노현섭씨의 그날치 일기장은 "장내는 울음바다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렇게 유족회가 결성된 지 2개월이 지난 8월 27일 마산역 광장에서 1000여명의 유족들은 10년만에 처음으로 합동위령제를 지낸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1960년 8월 27일 마산역 광장에서 열린 피학살자 합동위령제.

사진에서 보듯 위령제 참석자도 대부분 소복을 입은 아낙네들이다. 하지만 이들은 48년이 지난 지금까지 자신의 남편이 왜, 언제, 어떻게, 어디서 죽었는지 알지 못한다. 이 나라가 그 의문을 전혀 풀어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때 마산역 광장에 모였던 대부분의 아낙네들은 끝내 한을 풀지 못한 채 저세상으로 갔다.

이들의 한을 풀어주기 위한 국가의 작업은 노무현 정권들어 2005년 '진실 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 기본법'이 제정되고, 이듬해 '진실 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가 구성되면서 본격화했다. 그러나 전국적으로 수십만 명에 달하는 한국판 킬링필드의 전모를 파헤치기에 2년의 세월은 너무 짧았다.

2008년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자 진실규명은 또다시 위기상황을 맞았다. 과거사 관련 기구들을 모두 퉁폐합하거나 축소하겠다는 방침이 발표됐다. 이미 진실화해위원회의 인력도 감축되고 있다. 내년에는 사업예산이 대폭 축소되거나 아예 편성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전망도 나오고 있다.

이들 아낙네들의 통한이 영원히 풀리지 않은 채 다시 역사 속의 미궁에 묻혀버릴 지도 모르겠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