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에서 본 한국현대사

전국 놀라게 한 경상대생 고속도 가스차 탈취 시위

기록하는 사람 2017. 6. 15. 2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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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도 달라지기 시작한 경남신문


3만여 명이 참여한 마산 6·10대회를 사회면에 2단 짜리 기사로 보도하면서 '시민 반응 냉담'이라는 제목을 달아 시민의 분노를 샀던 <경남신문>도 15일 시위를 기점으로 보도태도가 달라지기 시작했다.


16일자 사회면에 가로 제목으로 뽑은 '전국 59개 대 격렬시위-경남·경상·창원대생 시가지 진출'이라는 기사를 통해 전국은 물론 마산과 창원·진주의 시위 소식을 비교적 자세히 전했다.


또 17일자 사회면은 처음으로 시위소식을 7단 사이드 톱으로 보도하고 있다. 이날 보도의 중심은 단연 16일의 진주 시위였다.


'경상대생 2천여 명 진주시가지 격렬시위-파출소 등 6곳 기습 불태워-남해고속도 점거 한때 교통마비-시민 2명 최루탄 맞아 부상'이라는 자세한 제목과 함께 고속도로를 점거한 사진도 실었다. 


이 보도에 따르면 16일 진주 시위대는 시위대가 진양군청(현 진주시청) 앞 동부파출소에 화염병과 돌을 던져 유리창과 기물을 부수고 오토바이 2대와 소파 등을 불태웠으며, 상평공단으로 진입, 공단파출소와 경찰 기동대 중대를 습격하기도 한 것으로 나와 있다. 시위대는 파출소를 부수고 기동대 입구 유리창을 깨뜨렸으며, 하대동 진주전문대학 캠퍼스에까지 들어가 시험준비를 하고 있던 전문대생들에게 동참을 요구하며 시위를 벌였다.


또 주목할 것은 이날 <경남신문>의 보도로 그동안 확인되지 않고 있던 16일 시위의 부상자와 KBS 기자의 피해 상황을 구체적으로 알 수 있다는 것이다. 


당시 <경상대신문> 학생기자가 메모해둔 기록에는 "시위대를 비디오로 찍고 있던 KBS기자 한 놈과 1억 5000여만 원 상당의 카메라를 획득"했다는 내용이 있는데, <경남신문>은 "500여 명은 남강다리(진주교)를 건너려다 경찰의 저지를 받고 하오 4시까지 대치를 하던 중 토심장여관 옥상에서 취재를 하던 KBS 진주방송국 정○○ 기자를 발견, 정 기자에게 폭행을 하고 ENG카메라 1대를 부숴버렸다"고 전하고 있다.


<경남신문>은 또 "경상대 철학과 4학년 최○○양이 중앙로터리에서 떨어져 중상을 입고, 망경북동129의 13 민○○씨(26)가 이날 하오 2시께 최루탄 파편에 맞아 부상을 입어 한일병원과 반도병원에 입원했다"고 전하고 있으며, "망경남동 479의 38 이○○씨(23)가 최루탄 파편에 맞아 손가락을 크게 다쳐 진주고려병원에 입원 중"이라고 보도했다.


이날 보도로 16일 시위에서 연행된 학생과 시민이 100여 명이며, 이 중 25명이 즉심에 회부되고 50명이 학교선도위원회에 인계됐으며, 21명은 훈방됐다는 것도 알 수 있다.


경상대생들은 이들 연행자 석방을 요구하며 오후 5시부터 7시 20분까지 남해고속도로를 점거했으나 이뤄지지 않자 17일 또다시 남해고속도로를 점거하게 된 것이다.


◇경상대생의 가스차 탈취   


당시 <경상대신문>에 보도된 남해고속도 LPG 운반차량 탈취시위 모습.

87년 6월 18일자 <중앙일보> 사회면. 여기에 실린 사진이 가장 선명했다. <연합통신>(현 연합뉴스) 바이라인이 붙어 있다.


당시 <경상대신문> 학생기자의 17일자 메모는 "전날 경찰 측의 기만 술책에 속은 학생들은 분노했다. 그러나 1차 집결지로 예정된 칠암캠퍼스는 경찰의 원천봉쇄로 여의치가 않아서 2차 집결지인 가좌캠퍼스에서 오후 2시에 재집결했다"고 전하고 있다.


하지만 6월항쟁 직후인 87년 8월 1일 발행된 월간 <말> 특집기사는 "17일 경찰은 새벽 3시 연행자 중 60명을 석방했다. 그러면서 이날은 시내에서 시위를 하지 말 것을 석방조건으로 내세웠다. 그러나 학생들은 전원 석방을 요구했고, 이날도 치열한 싸움은 계속됐다"고 전하고 있다.


18일자 <경남신문>도 "진주경찰서는 지난 16·17일 양일간 경상대생 시위사태와 관련, 연행된 118명 중에서 17일 81명은 훈방하고 19명은 즉결에 회부했다"고 전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상당수 학생이 석방된 것은 사실로 보인다.


다음날 전국 주요신문은 진주 시위를 1면 톱과 사회면 톱으로 보도했고, <경남신문>도 처음으로 시위소식을 사회면톱으로 편집했다. 다음은 <경남신문> 기사 전문.


"지난 15일부터 연 3일간 격렬한 시위를 벌이고 있는 경상대생들은 17일 고속도로를 운행하던 LPG운반트럭 2대를 잡아두고 경전선 운행 열차를 정거시켜 남해고속도로의 차량 통행이 한 때 중단되는 사태를 빚었다.


경상대학생 1200여 명은 이날 하오 가좌캠퍼스 학생회관 앞 광장에 집결, 이 가운데 300여 명이 캠퍼스 남쪽 삼미단조 진주공장 옆 길을 통해 남해고속도로에 진입, 고속도로 사천 진입로 앞까지 진출해 하오 4시 20분께 이곳을 지나던 부산 광신가스(주) 소속 8t급 LPG운반트럭 2대를 탈취, 진양군 정촌면 화개리 앞 고속도로를 점거하고 연행학생 석방을 요구하며 하오 7시 40분까지 3시간 이상 농성을 벌였다.


이들은 이날 하오 5시께 고속도로와 진삼 국도가 1시간 이상 완전 차단돼 교통이 두절되자 잠시 차량소통을 시킨 후 다시 완전 봉쇄, LPG 트럭을 타거나 앞뒤를 가로막고 연행학생 석방을 요구하다 경찰 당국과 합의 끝에 6시 20분께 고속도로 제2건설사무소 앞까지 2㎞를 진입한 뒤 7시 10분부터 30분간 다시 농성을 벌였다.


이들은 이곳에서 다시 연행학생 석방을 요구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자 진주시가지 진입을 결의하고 가좌캠퍼스 앞을 지나면서 횃불을 켜들고 LPG운반트럭 폭파를 위협하면서 정촌지서 앞까지 진출했다. 이들은 이곳에 도착, 시위를 하다 정촌파출소에 불을 지르고 시가지 진입을 꾀했으나 경찰의 저지로 더 이상 진출을 하지 못한 채 횃불시위를 하다 하오 8시 25분께 전경들이 일제히 최루탄을 쏘는 순간 300여 명의 경찰특공대의 기습을 받고 탈취한 LPG트럭을 버리고 도망쳤으며, 6명이 경찰에 연행됐다.


또 이날 하오 8시 36분께 가좌캠퍼스 옆 경전선 철로에 300여 명이 올라가 마산을 떠나 8시 40분에 진주에 도착하기 위해 운행 중이던 마산기관차사무소 소속 963통근열차(기관사 정찬일·27) 4량을 점거, 하오 9시 20분까지 농성을 벌이는 바람에 승객 30여 명이 공포에 떨었다.


한편 경상대학교 가좌캠퍼스 정문에서 경찰과 대치하고 있던 500여 명은 하오 9시까지 경찰과 투석전을 벌이다 LPG트럭 및 열차 탈취소동 후 빠져나온 학생들과 합류, 캠퍼스 안으로 들어가 학교 건물을 부수며 캠퍼스 안에 머무르고 있다.


그런데 이들 1200여 명의 학생들은 이날 하오 2시께부터 가좌캠퍼스 잔디밭에 모여 정문 진출조를 비롯, 경전선 철로변 진출조, 삼미단조 진주공장 옆을 통과해 남해고속도로 진출 점거조로 나눠 하오 2시 40분께 행동개시에 들어갔었다."


◇마산·창원도 산발 시위 계속 


<경남신문>의 이 기사 아래에는 같은 날 마산 상황도 2단 제목으로 실려 있다.


"경남대생 500여 명과 창원대생 200여 명은 17일 대학과 마산시내 일원에서 산발적인 시위를 계속했다. 경남대는 상오 9시 30분께 200여 명의 학생이 운동장에 모여 '반독재 시민궐기대회'를 마산 육호광장에서 하오 6시에 갖기로 하고 농성을 시작했다.


이날 상오 11시께는 공대생 100여 명이 비상총회를 갖고 서편 후문에서 경찰과 대치하는 바람에 이 일대 교통이 한 때 마비되기도 했다. 하오 4시께는 500여 명의 학생이 출정식을 갖고 시내로 진출, 이후 밤 10시까지 시내 곳곳에서 산발시위를 벌였다.


이날 시위로 마산 산호1파출소를 비롯, 신마산·자산파출소와 의창군청, 노동부마산사무소가 돌에 맞았고, 경남대 앞 방범초소가 불탔다. 또 하오 8시 50분께 합성동 시외버스터미널 앞에서 시위를 벌여 3000여 명의 시민과 여행객이 모여들기도 했다. 이날 창원대생 200여 명도 교내에서 출정식을 갖고 마산시내로 빠져나가 시위를 벌였다."


◇전국 놀라게 한 가스차 탈취 충격 

 

고속도로에서 LPG운반차를 탈취, 경찰과 대치한 경상대생들의 투쟁을 보도한 당시 <조선일보> 1면.

진주를 비롯한 지방의 격렬한 시위를 보도한 <조선일보> 사회면.


17일 경상대생들의 두 번째 고속도로 점거와 LPG 운반트럭 탈취사건은 다음날 대부분의 전국언론에 머리기사로 보도되면서 세상을 놀라게 했다. 특히 이 사건은 전두환 정권의 상황 판단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음을 짐작해볼 수 있다.


당시 진압작전에 참여했던 한 경찰 간부는 "15일 진주시위 이후 16·17일에는 진주에 가장 많은 경찰이 배치됐다. 울산에 있던 경찰력도 왔는데, 모두 8개 중대쯤 되었던 것 같다"고 기억했다. 이 경찰관은 "그런 상황에서 17일 LPG 차량 탈취사건이 일어났으니 난리가 났다. 청와대에서도 전화가 걸려와 상황을 물었던 것으로 기억한다"고 말했다.


석간인 <경남신문>에 앞서 서울지역신문들은 조간에서부터 이 사건을 대대적으로 보도하기 시작했다.


<조선일보>는 1면 톱으로 '남해고속도 3시간 장악-경상대생들 마~진 열차도 한때 막아'라는 제목을 달아 보도했다. 사회면에도 '지방시위 갈수록 격렬-진주 LP 가스차 2대 폭파 위협' 기사와 사진을 톱으로 올렸다.


<중앙일보>도 사회면 톱으로 '지방도시 시위 과격화-경전선 열차 48분간 불통 / 진주 가스차 탈취 고속도로 막아'라고 사진과 함께 보도했고, <동아일보>는 1면 사이드 톱으로 '대학생 시위 전국서 더욱 결렬-어제 70개 대 도심농성 등 상황 심각'이라는 기사와 함께 경상대생들의 LPG 차량 탈취 사진을 실었다. 이 신문은 사회면에서도 역시 톱으로 부산과 대전, 진주 시위소식을 자세히 전했다.


그렇다면 이날 학생들이 횃불을 든 채 LPG 차량을 폭파하겠다고 위협했는데도, 경찰이 위험을 무릅쓰고 기습 진압작전을 할 수 있었던 배경은 뭘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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