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에서 본 한국현대사

4·19 이후 진주 최대 시위…항쟁 '재점화'

기록하는 사람 2017. 6. 15. 2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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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년 6월 15일 시위 거점, 마산에서 진주로


6·10대회의 경남지역 거점은 마산이었지만, 진주·거창·진해에서도 소규모 집회가 있었다는 것은 앞에서도 썼던 바 있다. 이들 소규모 집회마저 원천봉쇄하려던 일선 공무원들의 노력은 가히 필사적이었다.


물론 그 공무원들도 위에서 시키니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 독재정권 아래에서 일하는 공무원의 비애였다. 요즘 같으면 경찰 외에 행정직 공무원이나 농협 직원이 시위 저지에 나서는 일은 생각할 수도 없다. 하지만 그 땐 그랬다. 87년 당시 거창군농민회(회장 표만수)가 발행한 <거창농민신문>(87년 7월 15일자) 창간호를 보면 그들이 거창 6·10대회를 막기 위해 얼마나 안간힘을 썼는지를 적나라하게 알 수 있다.


◇공무원 6명이 농민 1명 감시 = 이 신문의 기록에 의하면 앞서 한 신문기자의 메모에서와 달리 통일민주당원 30여 명에 의해 거창 6·10대회가 치러진 것도 아니었다. 통일민주당을 포함해 아림민주협의회, 민주산악회, 가톨릭농민회, 거창군농민회 등 5개 단체가 공동으로 주최한 행사였다. 더욱이 이 행사를 저지하기 위해 거창군청과 면사무소, 경찰서, 지서, 농협, 농촌지도소 직원들은 5~6명씩 1개조를 짜서 6월 9일부터 각 단체 회원들을 감시했다.


그들은 농민회원들이 모 심는 데 찾아가서 지키고, 사과 솎는 데 가서 지키고, 심지어 변소까지 따라가서 6·10대회 참가를 막았다. 거창군 웅양면의 한 농민회원의 경우 공무원들이 낮에 모 심는 걸 감시하다가 저녁에는 마을 이장 집에 모여 밤을 새우며 지켰다고 한다. 10일 아침이 밝자 한조가 된 6명의 공무원들은 마을 입구에 술과 고기를 사다놓고 먹으면서 한 사람을 지키기 위해 하루종일 있었다고 한다. 이에 대해 <거창농민신문>은 이렇게 비판하고 있다.


"면사무소나 농협·군청에 볼 일 보러 가면 바쁘다고 세워두면서, 얼마나 수월(?)하기에 그 짓거리를 하는지? 한창 모심기에 바쁜데, 그늘나무 아래서 고기를 먹고 술을 마시는 꼴을 보는 농민들의 가슴은 분통이 터질 노릇이었다. 그 술값, 고기값은 누구의 돈인가? 자기들 월급 털어서 그러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 돈은 농민들이 피땀 흘려 낸 세금으로 운영하는 군 예산에서 빼돌린 것이 아닌가!"


이날 거창군 마리면의 한 농민은 수승대로 납치됐고, 가지리에서는 건계정으로 납치되는 일도 벌어졌다고 한다. 그런 감시 속에서도 한 농민은 "독재정권이 거꾸러지고 민주화된 세상이 오지 않으면 농민도 잘 살 수 없다"며 낫을 들고 나가 공무원들의 방해를 뿌리치고 행사장에 참가했다고 한다.


◇항쟁의 거점, 마산에서 진주로 = 그러나 이미 터진 봇물은 막을 수 없었다. 마산이 거점이었던 6월 10일 이후부터 항쟁이 도내 전역으로 번져나가기 시작한 것이다. 경상대를 비롯한 진주지역 학생과 시민들도 10일 이후에는 마산에 합류하는 대신 독자적인 항쟁을 준비하고 있었다.


11일 오후 경상대생 700명은 가좌동 캠퍼스에서 전두환·노태우의 화형식을 한 뒤 교문 앞으로 진출, 한동안 경찰과 대치했다. 이들은 시위를 마친 후 6·10대회에 대한 평가회를 갖고 이후 투쟁계획을 논의한 후 단식농성 중인 간부들 외에는 일단 해산했다.


12일에는 오후 3시 경상대 총학생회 주최로 '호헌 철폐와 대학민주화를 위한 개척인 전진대회'를 열었다. 이날 모인 학생들은 4000~5000여명으로 경상대 시위 사상 가장 많은 숫자였다고 한다.


이날 이슈는 학교측의 대학언론 탄압에 대한 항의였다. 학생들은 개사곡 경연대회를 마친 후 '관제언론 타도하고, 민주언론 쟁취하자' '어용총장 물러가라' 등 구호를 외치며 총장실로 진입했다. 그러나 학생들이 잠겨 있는 문을 부수는 사이 총장은 이미 빠져나가고 없었다.


이날부터 150여 명의 학생들은 철야농성을 시작, 13일 밤 늦게까지 편집 자율권 보장과 교수의 편집국장 제도 철폐 등 요구안을 놓고 학교측과 협상을 계속했다. 마침내 13일 밤 11시 요구안을 쟁취한 학생들은 점거농성을 풀며 승리의 자신감을 만끽했다.


당시 운동권 지도부 중 한 명이었던 진홍근(의예과 83학번)씨는 "11일부터 13일까지는 의도적으로 학생들을 동원하기 위해 학내문제를 쟁점으로 삼았다"면서 "13일 투쟁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한 데 자신을 얻어 일요일인 14일 밤 최익호씨 등이 각 단과대학을 돌며 15일에는 시내로 진출하자고 결의했다"고 상황을 전했다.


6월 15일 진주시청 앞에서 농성을 벌이고 있는 학생과 시민들. 남아 있는 원본 사진 2장 중 1장이다.


◇4·19 이후 최대의 시위 = 마침내 15일이 밝았다. 이날은 4·19혁명 이후 진주에서 최대규모의 시위가 벌어진 날이었다. 80년 봄 '남강도하작전' 때도 대규모 거리시위가 있었지만, 그땐 시민들과 결합되지 못한 학생들만의 저항으로 끝났었다. 


그러나 이날은 달랐다. 미리 계획된 대로 아침 9시부터 각 단과대별로 집결하기 시작한 학생들은 3000~5000여명을 헤아렸다. 이들은 수업과 기말고사를 전면거부하고 시내 진출을 시작했다.


대형태극기를 든 공대생을 선두로 정문과 후문을 돌파한 학생들은 오전 11시 30분쯤 새벼리와 대동중공업을 지나 구호를 외치며 진주역 사거리에 도착했다. 먼저 도착한 1000여 명이 약식집회를 마치고 시내로 진입할 무렵에는 이미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군중이 불어나 있었다.


정오 무렵 진주시청 앞에 모인 학생들은 연좌농성을 하던 중 다른 대학 학생들과 시민의 동참을 유도하기 위해 3개 대열로 나눴다. 제1대열은 진주간호보건전문대로, 제2대열은 진주교육대학과 KBS진주방송국으로 향했다. 이들은 북부파출소에서 전두환 사진이 든 액자와 집기를 들고 나와 부수고 KBS기와 새마을기를 불태웠다. 3대열은 진주MBC로 몰려가 민주언론 구호를 외치고 시내 일원을 돌며 시민의 동참을 호소했다.


87년 6월 15일 시내로 향하고 있는 시위대의 모습을 보도한 <경상대신문>의 사진. 그러나 이 사진의 원본은 남아 있지 않다.


이날의 시위는 진주교육대학 학생들에게도 큰 충격을 주었다. 당시 교대생이었던 전녹수(85학번)씨는 "시험기간인 당시 도서관 창문으로 내다보니 경상대생들이 '뭐하고 있느냐'며 고함과 구호를 지르고 있었다"고 말했다.


그는 "이 일로 충격을 받아 개인적으로 사회과학 공부를 해왔던 학생들끼리 만나 회의를 열었고, 그 결과 '시험이 문제가 아니다' '우리도 이대로 있어선 안된다'며 시위에 참석했다"고 말했다. 전씨는 그 때 일을 계기로 86~87년 진주교대 학생운동의 핵심이 됐다.


서울 명동성당 농성 해산 소강국면 투쟁 다시 불지펴


◇진주시내는 '해방구' = 어쨌든 오후 2시쯤 3개의 시위대열은 다시 진주시청 앞 광장에 모였다. 광장은 투쟁열기로 마치 해방구를 방불케 했다. 시민들의 호응과 지지도 높았다.


당시 신문기자의 취재메모에도 '진주, 시민들이 옆에서 먹을 것 사주며 격려'라고 적혀 있을 정도였다. 진주시청 앞 연좌농성은 시민과 함께 하는 집회의 새로운 형식을 자연스럽게 만들어냈다.


시민들의 '애국민주성금 전달식'과 함께 '개사곡 경연대회'는 물론 시민과 고등학생의 즉석 연설도 있었다.


오후 4시30분쯤 시위대는 다시 시외터미널과 진주MBC, 봉곡로터리, 인사동로터리 등을 돌며 평화시위를 벌였고, 5시40분쯤에는 민정당사에 돌을 던지다 경찰이 최루탄을 쏘자 투석전이 벌어지기도 했다.


오후 6시부터 중앙로터리에서 연좌농성을 벌이던 시위대는 7시부터 진주교와 역전파출소, 진주역을 거쳐 상평공단 쪽으로 향했다. 경찰은 여기서부터 필사적으로 시위대를 막았다. 그때까지 속수무책으로 있던 경찰이 시위대를 막기 시작한 것은 마산으로 파견됐던 경찰력을 급히 증원받았기 때문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역시 15일 진주시청 앞 시위를 보도한 <경상대신문>의 사진.


당시 신문기자의 오전 11시25분 취재메모에는 "진주는 마산쪽으로 병력 빼앗기고 3개 중대밖에 없어 병력 절대 부족. 경찰, 도경에 병력지원 요청"이라고 적혀 있다. 이어 낮 12시20분 메모는 "진주에 3개 중대 긴급지원, 가스탄 헬리콥터로 지원"이라고 기록돼 있다.


이처럼 15일의 진주 시위는 경찰이 허를 찔린 셈이 됐다. 그동안 경남지역 항쟁의 거점이 마산이었으므로 그날도 경찰은 경남도내 거의 모든 경찰력을 마산으로 차출했던 것이다.


이에 따라 마산에는 10개 중대(1700명 정도)가 집결해 있었으나 진주의 시위가 의외로 크게 벌어지자 급히 3개 중대를 보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미 불어난 군중을 진압·해산시키기엔 역부족이었다.


이날의 진주 시위는 우선 서울 명동성당의 농성 해산으로 소강상태로 접어들 수도 있었던 항쟁의 불을 다시 지핀 계기가 됐다. 또한 경남지역 민주화운동의 거점이 마산 한 곳에서 두 곳으로 늘어나게 됐다는 점도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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