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에서 본 세상

밀양향교 그렝이 공법 나무기둥을 보니까

김훤주 2017. 3. 7. 1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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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향교로 답사를 간 적이 있다. 처음 찾아간 밀양향교는 무척 아름다워서 도무지 향교답지 않을 정도였다. 은행나무 잣나무 느티나무 배롱나무 향나무 매화나무 등등 건물을 둘러싼 숲과 나무들이 웅장하고 대단했다. 

규모가 결코 작은 편이 아니었는데도 밀양향교는 숲 속 자연 한가운데 들어앉은 조그마한 별장 같은 분위기가 났다. 그것도 인공으로 만든 느낌은 거의 들지 않고 마치 저절로 어디서 생겨난 것 같이. 

그렇게 둘러보는 가운데 기둥과 주춧돌에 눈길이 갔다. 속으로 가만 손뼉을 쳤다. '아하! 이게 바로 그렝이로구나.' 주추는 이른바 덤벙주추여서 표면이 울퉁불퉁한 원래 생긴 그대로였으며 나무기둥은 그에 맞추어 주추와 닿는 면이 나온 데는 들어가 있고 들어간 데는 나와 있었다. 

그런데 이 그렝이를 공글린 밀양의 이 대목(大木)은 아무래도 솜씨가 서툴렀나보다. 주춧돌의 울퉁불퉁함을 따라 나무기둥을 가다듬었으나 뜻대로 되지는 않았다. 주추와 기둥이 아귀가 맞지 않은 데가 여럿이었다. 그래서 이렇게 되는대로 쐐기를 군데군데 꽂아넣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겠지. 

이 덤벙주추와 나무기둥을 보면서 깔끔하게 마무리하는 대신 쐐기를 여러 곳에 박은 모습을 보면서 어떤 느낌이 들었다. 그렝이를 둘러싸고 있던 어떤 신비로운 커튼이 걷히는 듯한. 

그렝이라 하면 우리 겨레 전통 공예의 알짜로서 자연을 배려하고 존중하는 정신과 자세가 담겨 있다고들 얘기를 한다. 그렝이가 무엇인지 아는 이들 사이에 널리 퍼져 있는 믿음이기도 하다. 

말하자면 이렇다. 나무기둥 편평한 단면이 인공이고 주춧돌 거친 표면이 자연이다. 인공과 자연이 마주칠 때 인공에 맞추어 자연을 가공하는 대신 자연에 맞추어 인공을 가공한다는 것이지. 그런 만큼 자연을 존중·배려하며 자연을 본위로 여긴다는 뜻이다. 

좋은 말이기는 하지만 여기에는 덧칠이 있음이 분명하다. 이번에 밀양향교 주춧돌과 나무기둥 사이에 끼여 있는 쐐기를 보면서 그 덧칠이 무엇인지 짐작이 되었다. 

생각보다 간단했다. 돌이 단단하냐 나무가 단단하냐였다. 돌이 깎기 쉬우냐 나무가 깎기 쉬우냐였다. 사람이 좀더 손쉽게 주무를 수 있는 것이 무엇이냐였다. 돌이 나무보다 물러서 좀더 쉽게 손질할 수 있었다면 분명 사람들은 주춧돌을 먼저 끌이나 징으로 파내었겠지. 

하지만 그렇지 않았기에 나무를 깎고 주물렀던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하고나서도 아귀를 제대로 맞추지 못해 나무를 얇게 저미어 저렇게 쐐기를 박은 것이 아니냐 이거지. 

바로 이것이 자연에 대한 존중이나 배려에 앞서는 것이 아닐까. 밀양 시골 대목의 어설픈 그렝이질과 그 모자람을 채워주는 투박한 쐐기질이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그러므로 일부 민속 애호가들 사이에 신앙처럼 자리잡고 있는 '그렝이 공법에 담긴 우리 겨레의 정신'은 근거가 합당하지 않다고 해야겠다. 자연에 대한 존중과 배려는 뜬금없는 신화(神話)일 따름이다. 그렝이 공법은 그냥 편리함을 따르는 인간 속성의 발현이고 결과일 뿐이라 해야 맞지 싶다. 

그런데 지난해 경주 지진 이후 그렝이공법이 지진에 강하다는 평판까지 얻고 있나 보다. 이 또한 우연의 일치라고 보아야 하지 싶다. 옛날 우리 겨레붙이한테 주춧돌과 나무기둥 아귀를 맞추는 여러 방법이 있었는데도 굳이 지진 대비를 위하여 그렝이 공법을 골라잡은 것이 아니라면 말이다. 

그러니까 밀양향교 쐐기 투성이 나무기둥과 덤벙주추에서 내가 본 것은 우리 민족의 우수성 어쩌고저쩌고 하는 자화자찬의 허무맹랑함인 셈이다. 거기에는 다만 세계 어느 나라 어느 민족에게나 다 있게 마련인 편의성이 스며들어 있는 것 같다.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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