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빙 필자의 글/박영주의 사진과 역사 이야기

빛바랜 사진 속 1920년대 마산의 소녀들과 청년들

기록하는 사람 2017. 2. 17. 1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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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 살 안팎으로 보이는 치마저고리 차림의 소녀들이 두 줄로 앉고 서서 청년들과 함께 사진을 찍었다. 가만 세어보니 소녀들은 모두 열다섯 명이다. 앞줄 가운데 모자 쓴 꼬마는 남자아이인데, 아마도 누나를 따라 왔을 터이다. 앞줄 소녀들 옆엔 좌우로 청년 둘이 앉고 뒤로 청년 셋이 서 있다. 웃는 얼굴 없이 모두 조금은 긴장한 표정이다. 이들은 누구이고 어떤 일로 이런 사진을 남겼을까.

얼마 전 한 독립운동가의 집안에서 찾은 사진이다. 사진 상단에 글자가 있긴 한데 희미해서 도무지 알기 힘들다. 내가 들은 건 앞 줄 맨 오른쪽 한복을 입은 이가 황수룡이고 맨 뒷줄 오른쪽에 서 있는 이는 김종신이라는 것 뿐이다. 듣는 순간 김종신은 바로 알아볼 수 있었고 황수룡도 수감자 카드 사진 등을 통해 알고 있었기에 같은 사람임을 알 수 있었다. 김종신은 마산의 근현대사에서 유명한, '토호세력의 뿌리' 중의 한 사람인 바로 그 사람이다. 황수룡은 같은 시기 마산에서 활동한 이로 건국포장을 받은 독립운동가이다.

자세히 보면 김종신은 단추가 달린 옷을 입고 있다. 당시 대학생들이 입던 교복으로 당시 그가 학생의 신분에서 가까운 시기였던 때에 이 사진을 찍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부림시장 포목점의 점원이던 김종신은 점주와 주변 사람들의 후원으로 열일곱 살이던 1921년 동경으로 유학을 떠나 1924년 말에 일단 돌아와 청년운동에 앞장서기 시작한다. 김종신보다 세살 아래인 황수룡은 십대 후반부터 청년운동에 뛰어들었던 사람이다. 다섯 청년의 복장이 각기 다른 걸로 봐서 서로의 처지도 달랐음을 알 수 있다. 그에 비해 가운데 소녀들은 둘만 빼고는 모두 하얀 저고리에 검은 치마를 입었다. 당시 학생들의 옷차림으로 이들이 보통학교나 야학의 학생들로 보인다.

그런데 김종신과 황수룡은 1926년 8월 ‘제2차 조선공산당사건’으로 일제경찰에 검거되어 오랜 수사와 재판 끝에 김종신은 무죄 판결은 받아 1928년 2월 석방되고, 황수룡은 1년 6개월 징역형을 받아 복역하게 된다. 그러므로 1925년 혹은 1926년경의 사진으로 짐작해 볼 수 있다. 옷차림을 볼 때 봄가을쯤이고 야외로 소풍을 나온 듯하다. 이 청년들이 보통학교의 교사는 아니었기 때문에 이들은 야학의 교사와 학생이거나 야학 외의 관계일 수도 있겠다 싶었다.

여기까지 오자 떠오르는 게 있었다. 바로 이 시기에 전국적으로 일어났던 청년운동과 소년운동이다. 당시 마산에서도 이 운동이 아주 활발했다. 자료를 찾아보고 또 이 사진의 농담을 짙게 하여 글자를 맞춰본 결과 이 소녀들은 마산소녀회(馬山少女會)의 회원들이고, 1926년 6월경 원유회(園遊會)를 갔었을 때의 사진이라는 걸 알아낼 수 있었다.

1926년 당시 마산에는 신화소년회, 씩씩소년회, 불교소년단, 소녀회, 샛별소년회, 무산소년단 등 십여개의 소년단체가 조직되어 활동하고 있었다. 그중 소녀들로만 구성된 모임이 마산소녀회이다. 당시 15세 소년으로 동시 ‘고향의 봄’을 발표했던 이원수가 활동하던 단체가 바로 신화소년회이다. 당시 대부분의 아이들은 교육받을 기회는 커녕 온갖 고된 노동에 시달려야 했고 온전한 인격체로 대접받지도 못하는 처지였다. ‘어린이날’을 만들어 기념하고 어린이들을 소중히 키우고 나라의 미래를 책임질 소년들의 역량을 키우자는 운동이 소년운동이었다.

소녀들과 함께 사진을 찍은 이들은 마산청년연합회의 회원이다. 마산청년회연합회는 마산의 여러 청년단체 중 마산청년회 어시공조청년회 형평청년회 수양청년회 등 4개 단체가 만든 연합체로 청년들의 의식을 고양시키기 위한 여러 활동을 펼치게 된다. 연합회는 또 소년단체에 대한 지도를 주요한 활동의 하나로 삼아 소년단체의 동화대회, 토론대회, 원유회 등을 후원하였다. 1926년 초에는 소년운동의 지도를 전담하는 소년지도부를 만들고 김종신 김형선 이쌍룡 등 세 사람을 임시위원으로 선정한다. 이 청년들이 함께 사진을 찍은 이유가 이해가 간다. 이들은 마산소녀회의 활동을 지도해 왔고 그 일환으로 원유회도 함께 했던 것이다.

사진 속 뒤에 선 세 청년이 소년지도부의 위원들이 아닌가 싶다. 가운데 선 이는 김형선이 아닌가 싶다. 그의 다른 사진들과 비교해 보니 꽤 닮았다. 김형선은 김종신과 같은 나이로 열렬한 항일 혁명가로 성장해 가고 있었다. 당시 김형선은 부두 노동자나 점원을 하고 있었고 김종신은 조선일보 마산지국 기자, 황수룡은 금융조합 서기로 있었다.

이들은 표면 단체인 청년회 활동 외에도 비밀결사에도 깊이 참여하게 된다. 당시 마산에는 새로운 사상을 연구하는 사상단체가 생겨나면서 사회주의 청년단체도 조직되었다. 1924년 8월 ‘마산공산청년회’와 ‘마산공산당’이 조직될 때 이들도 참여한다. 1925년 4월 조선공산당과 고려공산청년회가 창립된 이후 마산공산당과 마산공산청년회는 각각 조선공산당 마산야체이카 고려공청 야체이카로 개편된다. 이때 공청 마산 제1야체이카는 황수룡, 제2야체이카는 김형선이 책임자가 된다. 1925년 11월 말 신의주사건으로 마산 공청의 책임자 김상주가 구속되고 난 이후에도 이들은 활동을 계속하다 1926년 제2차 조선공산당사건이 터지면서 김명규 등 마산지역 활동가 12명이 검거됨으로써 마산의 당 활동을 큰 타격을 입게 된다. 이때 김형선 만이 중국으로 탈출하는데 성공한다.

김종신 황수룡 등은 감옥에서 나온 이후에도 마산에서 한동안 청년운동을 계속 이어 나갔다. 중국으로 간 김형선은 당재건운동에 전념하다 체포되어 11년 감옥살이 끝에 해방이 되면서 서대문형무소에서 출옥하게 된다, 20대 초반 마산에서 사회주의 청년운동을 함께 한 동지였지만 이후 이들의 인생행로는 크게 달라지게 된다.

이 사진을 찍은 곳은 어디일까? 사람들 뒤로 비스듬히 언덕이 솟아 있고 숲이 있는 걸로 봐서 추산이나 제비산 언덕이지 싶다. 당시 마산에서 원족을 가기에도 가까운 곳이었다.

이 사진은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것으로 당시 청년운동과 소년운동 활동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자료이다. 더구나 일제강점기 마산에서 벌어진 무수한 활동에 비해 그 사진은 거의 남은 게 없는 상황에서는 더 귀중하게 느껴진다.

글쓴이 : 박영주(경남대학교 박물관 비상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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