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에서 본 세상

토도 할매는 살갑지도 무뚝뚝하지도 않다

김훤주 2017. 1. 31.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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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반은 섬 절반은 뭍

토도에 대하여 들었다. 전남 완도에 있는 섬인데 바닷물이 빠지면 둘레가 온통 갯벌이라는 얘기였다. 절반은 섬이고 절반은 뭍인 셈이다. 알아보니까 내일은 아침 9시 전후가 썰물 때였다. 20일에 새벽 같이 나서서 달렸다.

과연 그러했다. 도착했을 때는 섬으로 이어지는 콘크리트길이 젖은 몸을 말리고 있었다. 날은 흐렸으며 바람은 세게 불지 않았다. 아마도 밀물 때는 물 아래 잠겨 있었었겠지. 펄이 묻어 있어서 미끄러운 길이었다.

동네 할매를 모셔다 주고 나오는 모양이지 싶은 택시가 한 대 지나갔다. 운전기사는 아줌마였다. 차창을 내리더니 "어데서 오셨소?" 묻는다. "창원에서 왔는데예." 말하니까 "멀리서 오셨네, 잘 놀다 가시고 종종 오시소." 한다. 웃는 얼굴이 정겨웠다.

우편 배달 오토바이도 하나 지나갔다. 젊은 아저씨였는데 펄이 안 튀도록 하려고 지나갈 때는 속도를 늦추었다. 편지보다는 갖가지 고지서를 요즘은 더 많이 배달한댔지, 생각이 들었다.

섬을 두르는 토도의 콘크리트길

섬은 지도에서 본 대로 크지 않았다. 조그만 섬은 보통 둘레길이 없기가 십상인데 콘크리트길이 해안을 따라 이어지고 있었다. 밀물 때도 바다에 잠기지 않았을 부분도 필시 바닷물에 잠겼을 부분도 있었다. 원래 용도는 아무래도 토도 사람들 갯일을 위했겠으나 놀러 삼아 온 이가 한 바퀴 걷는 것에도 좋았다.

경남과 같은 남해의 갯벌

토도 갯벌은 대단했다. 심하게 말하면 화엄이었다. 화려하고도 장엄했다. 끝나는 데가 보이지 않았다. 썰물은 육지와 토도를 이어줄 뿐 아니라 토도를 다른 섬들까지 이어주고 있었다.(돌아와서 찾아보니 장죽도·장구도·고마도에 더해 이름없는 섬까지 하나 더 있었다.)

돌을 꽂아 만든 구획은 인공이다. 지금도 유효한지는 모르겠으나 권리를 나누고 공유하는 흔적이라고 할 수 있겠다.

갯벌은 보아하니 서해가 아니라 남해의 것이었다. 서해안 갯벌은 펄=진흙이 대부분이다. 전남 신안 일대 갯벌이 대표적이라 할 수 있다. 반면 남해안 갯벌은 펄=진흙이 비슷하게 섞여 있다. 그러니까 토도 갯벌은 경남의 마산이나 사천에서 볼 수 있는 그런 갯벌이었다.

사람을 콩알만하게 만드는 토도 갯벌

저 멀리 건너편으로 경운기가 두어 대 바다 쪽으로 들어가 있었다. 갯벌에서 거둔 파래·미역이나 굴·바지락 등을 실어 나르기 위한 것이겠지. 거기 말고는 사람 자취를 찾기가 어려웠다. 썰물 때면 사람들이 갯벌에 일하는 사람들이 있어야 마땅한데 어째서 없을까 싶었다.

길에서 조금 떨어진 데에 갈대 줄기가 두엇 보였다. 갈대는 혼자 동떨어져 자라는 경우가 드물다. 이상한 생각이 들어 자세히 보았더니 대나무 가지였다. 생각이 퍼뜩 스쳤다. 갯벌이 물에 잠겼을 때 길잡이로 삼으려고 마을 사람들이 갖다 꽂은 것이구나.

대나무 가지 너머로 눈길을 돌리고서야 사람이 보였다. 갯벌 지평선과 맞붙어 조그맣게 움직이는 사람을 알아보지 못했던 것이다. 참 멀리도 나가시는구나. 물이 조금씩 차오르면 그에 따라 사람들도 섬 가까이로 나오시겠구나.

지게를 지고 나오는 사람도 있었다. 처음에는 한 사람인 줄 알았는데 가까워지면서 보니 두 사람이었다. 지게를 진 사람은 앞에서 걷고 다른 한 사람은 뒤를 받치고 있었다. 지나치는데 보니 상노인 부부였다.

부부는 말이 없었다. 거저 걷기만 하였다. 지게에 올라앉은 굴 망이 퍽이나 무거워 보였다. 사진을 찍고 싶었지만 찍지 못했다. 그러기에는 너무 진지하고 고된 부부의 노동이었다.

토도 할매들의 심드렁한 대꾸

부두가 나왔다. 밀물 때 물이 차는 자죽을 보니 나름 깊어 보였다. 조그만 배 두어 척이 바닥에 내려앉아 있었다. 조금 떨어진 데에는 노가 실려 있는 배가 하나 있었다. 하지만 모터도 달려 있는 품이 지금도 노질을 해서 운항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할매 한 분을 만났다. 갯벌에서 장만해 온 파래를 헹구고 있었다. 콘크리트도로에 엉덩이를 붙이고 섬쪽을 향해 앉아 있었다. 저기 고이는 물은 소금기가 덜한 민물이겠지. 

등 뒤로 안녕하시냐 인사를 건넸더니 "어이~" 하는 소리가 돌아왔다. 심드렁한한 대꾸였다. 토도를 찾는 외지인이 적지 않음을 알 수 있게 해주는 반응이다.

굴막이 나왔다. 할매 세 분이 있었다. 다들 꼬부랑한데도 손에 잡힌 굴 망은 한 아름이었다. 무거워 보여서 거들겠노라 나선 나는 들어서 옮겼지만 할매들은 땅에서 바닥을 떼지 않은 채로 살살 끌어서 옮겼다. 할매들은 옛날에는 꼬막도 났지만 지금은 거의 없어지고 굴만 난다고 했다.

굴 까는 작업이 바로 시작되었다. 1만원 어치만 파시라 했지만 주문이 밀려서 팔 물량이 없다고 했다. 사진은 살짝 한 장만 찍었다. 곧장 발길을 돌렸더니 할매들 말한다. "다들 오면 사진 찍는다고 난린데 아저씨는 안 그라네?"

"하하" 웃었을 뿐 부러지게 대답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속으로는 "제가요, 그런 정도 염치는 있거든요, 남들 힘들게 일하는데 그걸 제 놀이로 삼을 수는 없을 것 같아서요." 했다.

"인간백정" 글자가 남아 있는 담벼락

한 바퀴를 다 돌고 원래 자리로 돌아왔다. 전혀 서둘지 않았는데도 한 시간밖에 안 걸렸다. 이어서 마을로 들어갔다. 마을은 작지 않았다. 서른 가구는 넘어보였다. 사람이 사는 것 같지 않은 집도 별로 없었다. 담벼락을 두툼했다. 바람이 세게 부는지 '보로꾸'를 무겁게 양쪽 끝에 매단 밧줄이 걸쳐져 있었다.

길은 마을 가운데 즈음에서 십자로가 되어 세 갈래로 갈라졌다. 앞으로 가면 부두가 있는 건너편으로 곧장 넘어가졌다. 넘어가면서 보니 담벼락에 "인간백정을 때려잡자"고 적힌 담벼락이 있었다. 아니 무슨 이런 살벌한 말이 시골 어촌 마을에까지?

깜짝 놀랄 뻔했다. 바로 옆 담벼락에 적힌 "반공"이 실마리가 되었다. '인간백정'과 '을' 사이에 비어 있는 세 글자는 아마도 빨간색으로 쓰여 쉬이 바랬을 '김일성'이었지 싶다. 70년대 박정희는 한 손으로는 이북의 김일성과 내통하면서도 다른 한 손으로는 이렇게 전국을 냉전이데올로기 감옥으로 만들었다.

흙도 나무도 대나무도 좋았다

나머지 오른쪽과 왼쪽 길은 끝자락에 밭이 달려 있다. 밭두둑에 올라서니 사방으로 저 너른 갯벌 너머 멀리에서 바닷물이 밀려들어 오는 장면이 눈에 들어왔다. 광활하였다. 밭을 내려다보니 토도가 홁 토(土)자를 쓰는 토도겠다는 짐작이 들었다. 불그스레한 황토 위에 마늘이 자라고 있었던 것이다.

토도는 나무도 좋았다. 커다랗게 잘 자란 나무들이 품격 있게 서 있었고 덩굴식물이 이것들을 휘감아 오르고 있었다. 조릿대도 좋았다. 사람 키를 훌쩍 넘긴 조릿대가 무성하게 자라나 오솔길을 포근하게 감싸고 있었다.

살랑이는 바람이 빗질하듯 쓸어내리자 대숲은 서걱대는 소리를 내었다. 바람소리는 조용한 마을을 더욱 조용하게 만들었다. 삽상한 바람소리를 들으며 고개를 들자 이번에는 잠깐 나타난 햇살이 댓잎에 부딪혀 흩어지고 있었다.

공적비와 표지석과 군사 초소

기분 좋게 마을 산책을 마치고 마을 나들머리로 나왔다. 거기에는 빗돌이 하나 있었다. 공적비였다. 앞면에 '김해 김공 개수(介守) 공적비'라 적혀 있는 공적비 옆면을 보니 1965년 7월 24일 세워졌다. 뒷면을 보니 "이 어른은"으로 문장이 시작되고 있었다. 어지간히 존경받은 사람이 아니구나 싶었다.

옆에는 '토도 마을'이라 적힌 표지석도 있었다. 뒷면을 보지 않았으면 아무렇지도 않게 넘겼을 것이다. 재미있는 뒷면이었다. 마을 표지석은 많이 보았지만 이처럼 사연이 있는 표지석은 이번에 처음 보았다. 1990년 2월 28일 정년퇴직 기념으로 토도분교장 위운량 선생이 기증한 것이었다.

그런데 조금 전 돌아보았지만 마을에는 한 때 아이들 목소리가 흥건했었을 그 분교가 그야말로 자취도 없었다. 27년 세월이 결코 짧은 것이 아니구나 싶었다. 1990년은 공교롭게도 내가 태어난 지 27년이 되는 해이기도 했다. 그 짧지 않은 세월을 나는 곱으로 살았다.

바로 옆에는 병사들 밤을 지키며 보초를 섰을 초소도 남아 있었다. 수풀이 우거져 알아보기 어렵기는 했지만 그래도 자세히 보니 콘크리트로 '보로꾸'로 만든 군사시설이 분명했다. 30년 40년 전에는 남과 북이 이렇게 대결을 했었구나!

토도는 갯벌이 정말 좋았다. 할매들은 살갑지도 않고 무뚝뚝하지도 않았다. 마을은 낡았기도 하고 새롭기도 했다. 더불어 지나온 세월과 오늘을 사는 나날이 그대로 내려앉은 토도였다. 두 시간 남짓 걸려 4km 정도 걸었더니 절로 기분이 삽상해졌다.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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