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에서 본 한국현대사

지리산 덕유산을 동해에 던져버리고 싶었다는 함양 사람들

기록하는 사람 2017. 1. 25. 1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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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경남도민일보에 보도된 '경남의 산-함양' 편을 읽으며 문득 오래 전에 썼던 보고서가 생각났다. 함양군 민간인학살 피해자 전수조사를 했던 결과보고서였는데, 거기에 함양군의 지리적 특성을 설명하는 부분에서 함양사람들은 "지리산과 덕유산을 원자력의 힘으로 떠서 동해에 던져버리고 싶었다"는 구절이 나온다.

그 산 때문에 유난히 파르티잔의 활동이 많았고, 그들을 토벌하던 군경에 의해 수많은 민간인들이 희생되었기 때문이다. 이런 역사적 맥락도 '경남의 산'에서 좀 언급되었더라면 좋았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 부분을 다시 여기에 옮겨놓는다. <김주완>


함양의 행정구역변천

조선시대까지만 하더라도 함양지역은 함양군과 안의현으로 나뉘어 있었다. 고종 32년(1895) 지방관제 개정으로 안의현이 군으로 되었다가, 1914년 지방행정구역 정리에 따라 안의군이 폐지되면서 남부 7개 면은 함양군에, 북부 5개 면은 거창군에 각각 편입되어 함양군은 총 12개 면이 되었다. 1957년 함양면이 석복면(席卜面)을 편입하여 읍으로 승격하여 1읍 10개면이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함양읍, 마천면, 휴천면, 유림면, 수동면, 지곡면, 안의면, 서하면, 서상면, 백전면, 병곡면 이다. 법정리동은 101개이며, 마을은 255곳이다.

함양의 지리적 특성

함양군은 경상남도의 서북단에 위치하여 동으로 산청군, 서로 전북 남원과 장수군, 남으로 하동군, 북으로 거창군에 연접하고 있다. 함양군은 지리산에서 덕유산으로 이어지는 백두대간의 산자락에 위치해 있다.

통영대전고속도로에서 본 남덕유산

소백산맥이 북쪽에서 남쪽으로 뻗어 있어 사방이 험한 산지로 둘러싸인 산간 분지를 이룬다. 군의 북부에 남덕유산(南德裕山, 1,507m), 월봉산(月峰山, 1,279m), 금원산(金猿山, 1,352m), 기백산(箕白山, 1,331m), 황석산(黃石山, 1,190m), 서부에 깃대봉(棋臺峰, 1,015m), 백운산(白雲山, 1,279m), 삼봉산(三峰山, 1,187m), 삼정산(三丁山, 1,182m)이 있으며, 남부에 형제봉(兄弟峰, 1,433m), 덕평봉(德坪峰, 1,522m), 칠선봉(七仙峰, 1,576m), 영신봉(靈神峰, 1,652m), 촛대봉(燭臺峰, 1,704m), 제석봉(帝釋峰, 1,806m), 지리산(智異山, 1,915m), 중봉(中峰, 1,875m), 하봉(下峰, 1,760m) 등의 높은 산이 있고, 중앙에도 괘관산(掛冠山, 1,252m)을 중심으로 한 500∼700m의 저중산성 산지부가 전개되고 있다.

하천으로는 남계천(九溪川)이 군의 북동부를 남동류하고, 위천(渭川)이 중앙을 동류하며 유림면 웅평리에서 남계천에 합류하고, 임천강(臨川江)이 남부를 북동류하여 유림면 장항리에서 남계천과 합류한 뒤 경호강(鏡湖江)이 되어 흐른다. 이 밖에도 지우천·안의천·죽산천·구룡천 등 크고 작은 하천이 많이 있다. 이들 하천유역에는 좁은 산간침식분지가 널리 형성되어 있다.

가을에 본 남덕유산 자락들

이러한 자연지리적 조건은 한국전쟁 전후의 과정에서 함양지역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함양은 지리산과 덕유산이 있고 이 산들을 잇는 연봉(連峰)의 산세가 험하고 깊어서 빨치산이 은거하기가 알맞은 조건을 갖추고 있었던 것이다. 즉 해방 이전 하준수를 비롯한 학병을 기피했던 청년들이 입산했으며, 1948년 10월의 여순사건에서부터 한국전쟁에 이르기까지 빨치산이 활동했던 것이다. 이에 따라 함양지역민들은 어느 지방 사람보다 더욱 많은 고통을 감내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낮에는 대한민국, 밤에는 인민공화국’이라는 양다리 속에서 웃지도 못하고 울지도 못하는 쓰라림을 겪어 온 고장이었던 것이다.

2006년 함양군과 함양문화원에서 편찬된 『간추린 함양역사』에는 “조국 광복의 기쁨이 가시기도 전에 국가가 혼란에 이르고, 함양지방은 지리산과 덕유산 사이에서 더욱 고충을 감수해야 했다. 국토분단, 사상적 대립, 여순반란사건, 빨치산의 준동, 6․2사변 등 혼란 상태로 생사의 기로에 있었다.”라고 서술하고 있다. 

지리산과 덕유산을 끼고 있는 자연적 조건을 탓하기도 하였다. 심지어 원자력의 힘으로 지리산과 덕유산을 동해(東海)로 던졌으면 좋겠다고 탄식하고 있다. 『함양군지』는 이렇게 서술하고 있다.

북한군의 포성은 멀리갔으나 공비들의 총성과 습격은 날로 심해졌다. 낮에는 들로나가 일을 하고 해만 지면 피신지를 찾아서 들판이나 냇가의 바위 밑을 더듬어야 하며 또는 지서가 있는 소재지로 옮기든지 아니면 밤에 잠만자려 가야할 딱한 일들이 하루 이틀이 아닌 몇 년을 계속했으니 함양의 자랑이요, 우리나라의 명산인 지리산과 덕유산이 있기에 그들의 근거지가 되었기 때문에 이 고통을 받는다고 생각하니 이제는 명산도 원망의 대상일 뿐이었다. 年老한 사람들이 모이면 ○○비결에 “초입자(初入者)는 멸(滅)하고, 재입자(再入者)는 생(生)하고, 삼입자(三入者)는 불급(不及)”이라고 했으니, 이것은 지리산을 두고 예언한 것인데, 지금의 공비나 패잔병은 초입자이니 반드시 멸망할 것이라고 자위했다. 사회에서는 ‘함양,산청은 사람살 곳이 못된다’고 하여 공무원의 귀양살이인 좌천지(左遷地)가 되었고, 그와 반대로 함양,산청만 벗어나면 어떠한 곳에 가더라도 심지어 외딴 섬으로 가더라도 영전(榮轉)이라하여 이곳을 빠져나가려고 애썼다. 그러니 똑똑하고 젊은 사람들은 모두 도시로 나가고, 늙고 병들고 힘없고 가난한 자나 오도가도 못할 사람만 남아 있을 수 밖에 없었다. 

대대로 살고 정든 땅 조상의 뼈가 묻혀있는 고향을 떠날 수없어 지리산과 덕유산을 바라보며 “원자력의 힘으로 고스란히 저 산들을 떠서 東海로 던졌으면 얼마나 좋을까”하고 생각하다가 “무거운 절 떠나라 하지말고 가벼운 小僧물러가오”하는 식으로 뒤도 돌아보지 않고 훌훌 떠난 사람들이 부지기수였고, 떠난 사람 모두가 잘되었다는 후문이다.(15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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