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저런 생각-김훤주

첫 이별 첫 농활 첫 취업

김훤주 2008. 7. 23. 0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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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첫 이별

대부분 사람이 그렇듯, 제게도 여자를 사귄 경험이 있습니다. 국민학교 시절부터 대학 시절까지 좋아서도 만나고 그냥도 만난 여자들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대부분 만남이 그렇듯, 저의 그것도 슬그머니 이뤄졌고 헤어짐도 아닌 듯이 진행됐습니다. 충격적으로 찾아온 이별도 있었는데, 이별다운 이별은 제가 딱 한 번 해봤습니다.

4학년이던 85년 봄이었습니다. 지금도 기억하는데, 서울 건국대 근처 ‘스페인’이라는 카페였습니다. 같은 4학년이던 한 여자와 ‘정식’으로 헤어진 것입니다.

참 착한 친구였습니다. 저도 키가 크지만 그 친구도 키가 큰 편이었는데(얼굴도 예뻤습니다), 이를테면 저를 만날 때는 제가 작아 보이지 않도록 꼭 운동화만 신었습니다.

참 잘 웃었습니다. 웃으면 눈꼬리도 따라 웃으면서 얼굴 전체가 함박꽃처럼 피어났었습니다. 우리가 그런데 자주 만나지는 않았습니다. 한 학기에 두세 차례 정도였지요.

만나서는, 그냥 많이 걸었고, 때때로 허름한 술집에 들어가 술을 마시기도 했는데, 제가 주로 마시고 그 친구는 술잔을 만지작거리기만 할 때가 많았습니다.(요즘은 사람들이 그렇지 않다지요.)

해야 할 얘기가 정해져 있지는 않으니까, 서로 자기 관심사를 많이 얘기했던 것 같습니다. 저는 멋대가리 없이 주로 운동 이야기를 했고 그 친구는 주로 들었습니다.

그 친구는 옷이나 빵 이야기를 했고 ‘코니아일랜드’에서 하던 아르바이트 관련해서도 심심찮게 얘기했습니다. 제 이야기는 틀림없이 재미없었을 텐데도 그런 기미를 전혀 보이지 않았습니다.

4학년이 되면서 저는 고민이 많아졌습니다. 공부를 계속하느냐, 아니면 운동을 계속하겠느냐가 문제였습니다. 그 친구도 고민이 생긴 듯했습니다.  ‘스페인’에서 만났습니다.

저로서는 정말 뜻밖에도 결혼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여러 이야기를 했는데, 운동을 그만두고 대학원에 진학하자, 그리고 결혼을 하자는 말도 제게 했습니다.

저는 갑자기 무거워져서, 한참을 더듬거리다가(아닐 수도 있습니다) 운동을 그만둘 수는 없다, 그리고 그밖에 니가 말한 몇 가지도 나는 따를 수가 없다, 고 했습니다.

그러고는 서로 아무 말도 없었습니다. (협상은 결렬됐습니다. ^.^) 좀 있다가 그 친구가 탁자 위에 올려져 있던 제 손을 꼭 잡았습니다. 저는 그 때서야 그 친구 얼굴을 쳐다봤습니다.

입이 웃고 있었습니다. 그 친구 착한 눈도 함께 웃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제가 눈치 채지 못했으면 더 좋을 수도 있을 텐데, 그 친구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서, 넘칠 듯 말 듯 하고 있었습니다.

그 친구가 그랬는지 제가 그랬는지 기억이 뚜렷하지는 않은데 그만 일어나자고 누군가 그래서 우리는 일어나 밖으로 나왔습니다. 한참을 나란히 걷다가 우리는 헤어졌습니다.

믿거나 말거나지만, 우리가 손을 맞잡은 것은 그 때가 처음이었습니다. 둘이 팔짱을 끼고, 또 기대어진 그 친구 어깨에서 따뜻함을 느낀 것도 그 때가 처음이었습니다. 그 뒤로 우리는 연락조차 한 번 주고받지 못했습니다.

2. 첫 농활

사용자 삽입 이미지

80년대에는 당연히 이리 못했습니다. 경남도민일보 사진.

보통 첫 농활은 대학 1학년 때 이뤄지지만 저는 3학년 때 처음 경험을 했습니다. 1학년과 2학년 때는 집안 농사 거드느라 그리했습니다.

3학년 여름 저와 동료들이 농활을 간 곳은 거창이었습니다. 지금은 어떤지 잘 모르겠는데 그 때는 대부분 회관 같은 데서 학생들이 따로 묵었습니다만, 우리는 그리 안 했습니다.

개별 농가에 들어가 같이 자고 같이 먹었습니다. 일도 농활 학생들이 프로그램을 짜지 않고 자기가 묵는 집의 농사를 거드는 식으로 진행됐습니다.

우리가 묵었던 재우․범우네는 그 어머니 아버지가 사과 과수밭과 토마토 하우스를 했습니다.(밥을 해 줬던 재우 엄마는 정말 예뻤습니다. 재우 아버지가 결혼할 상대를 찾아 일부러 서울 한 공장에 취업해 있다가 결혼을 하자마자 곧장 짐 싸서 고향으로 왔답니다.)

사과 농사는 그다지 힘들지 않았습니다. 별로 기억에 남아 있지도 않습니다. 반면 토마토 농사는 꽤 힘들었습니다. 비닐하우스에 들어가 익은 토마토를 따는 작업이었습니다.

덕분에 토마토는 배터지게 먹었습니다만, 기온이 장난 아니었습니다. 바깥이 36도 37도라면 비닐하우스 안은 43도 44도 이랬습니다. 땀이 비보다 더 심하게 흘러내렸습니다.

저는 그 때 팔이 긴 옷이 짧은 옷보다 여름에 시원할 수도 있음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한 번 젖은 이는 두 번 젖지 않는다는 깨우침도 얻었습니다. 땀이 말라 옷에 소금이 어리는 ‘소금꽃’도 그 때 알았습니다.

비닐하우스 더위가 어느 정도냐 하면은요, 그 안에서 삐질삐질 땀 흘리며 일하다가 바깥으로 나오면 한낮에 햇살이 쨍쨍 내리쬐는데도, 오히려 서늘한 느낌이 들 정도였습니다.

나중에 이 첫 농활의 교훈을 되살려, 한여름 자동차를 몰 때 써먹기도 했습니다. 창문을 열고 달리다가 신호등 따위에 막히면 서둘러 창문을 닫습니다. 꽉 막힌 공간에서 제 몸은 샘물처럼 퐁퐁퐁 땀을 쏟아냅니다.

1분이나 2분쯤 그렇게 하다가 신호등이 바뀌어 달릴 즈음에 다시 창문을 엽니다. 창문을 타고 들어오는 바람이 그렇게 시원할 수가 없습니다. 이른바 이열치열의 참뜻이 바로 이런 데에 있다고 저는 여깁니다요. 하하하.

3. 첫 직장

저는 국민학교 5학년 때 가출을 한 적이 있습니다. 창녕에서 부산까지 갔다가 여인숙에서 경찰 임검(臨檢)에 걸려 실패했습니다. 그런 가출을 대학 졸업하고 한 번 더 합니다.

공장 취직이 목적이었습니다. 86년 당시, 옥살이를 했다고는 하지만, 대학 나온 인간의 생산직 취업이 어른들 눈에는 정상이 아니어서 집안 식구들이 적극 말렸기 때문입니다.

87년 3월 취업을 했습니다. 마산 봉암공단 ‘마찌꼬바’였습니다. 가출은 86년 8월 했지만, 제가 준비한 ‘가라’ 주민등록증을 다른 친구가 써먹는 바람에 이렇게 한참을 기다렸습니다.

면접은 3월 7일 토요일에 봤습니다. 별다른 장애는 없었습니다. 경력이 아닌 초보로 들어갔기 때문입니다. 이.사.주만 갖추면 됐습니다. 이력서와 사진과 주민등록증 말입니다.

그런데, 회사에서 출근하라고 한 날은 3월 9일 월요일이 아니었습니다. 3월 11일이었습니다. 이상했습니다. (일할) 사람이 모자란다는 얘기도 들었는데 이틀이나 출근을 미뤘습니다.

나중에 봤더니 하루 유급 휴가를 주기가 싫었기 때문이었습니다. 3월 10일은 근로자의 날이었습니다. 어용으로 찍힌 한국노총의 생일로 5월 1일 노동절을 대신하던 때였습니다. 좀 치사했지요.

남들 다 하는 잔업과 철야를 저도 밥 먹듯이 했습니다. 돈도 모아보리라 마음먹고 우체국에 통장도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쉽지 않았습니다. 한 달 일한 대가가 ‘당나귀 귀 빼고 × 빼고 나면’ 10만원을 겨우 웃돌 정도였습니다.

자취하는 방값이 5만원이었습니다. 아주 허름한 방이어서 봉암동에서는 가장 싸게 얻은 편이었는데도 그랬습니다. 그러다가 6월 항쟁이 벌어지고 난 다음 7월 중순에 파업을 했다가 쫓겨났습니다.

파업은 차별이 발단이 됐습니다. 공지가 점심시간에 붙었습니다. 여름휴가를 생산직은 이틀, 관리직은 사흘을 준다는 내용이었습니다. 밥 먹으러 가다가 보고는 모두들 투덜거렸습니다.

밥 먹고 오니까 선배들이 모두들 장갑도 벗고 안전화도 벗어 버리고는 작업복을 갈아입고 있었습니다. “죽을라 카마 호랭이 ××를 못 만져?” 가장 나이 많던 이가 던진 말입니다.

파업은 이틀을 갔습니다. 옷 갈아입고 나갔던 사람들이 돌아오지 않은 기간입니다. 저와 동갑이던 한 사람과, 한 살 어리던 또 한 사람과 함께 저도 파업에 동참했습니다.

선배들은 공장 밖에 있더라도 한 군데 모여 있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개별 협상은 말아야 한다는 취지였습니다. 그러나 개별 협상은 이미 이뤄지고 있었습니다.

저는 노동조합을 만들어야 한다고 했습니다만, 아무도 제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하기는, 용접기를 잡은지 넉 달밖에 안 됐는데, 그런 사람의 말을 누가 들어주겠습니까만!!!

사흘 뒤, 회사는 생산직과 관리직 모두 사흘씩 휴가를 준다고 발표를 했습니다.(제 기억으로는) 그러니 모두 돌아오라고 했습니다. 저도 연락을 받고 갔습니다.

상무가 면담을 하잔다고 연락을 해 왔습니다. 두려울 바가 없으니 앞장서 갔습니다. 그러나 회사에서 볼 때는 무게가 떨어지는 인간이었던 모양인지 면담은 가장 늦게 이뤄졌습니다.

상무는 별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적극 나섰더군. 나가 줘야 되겠어.” 제가 받아서 좀 쪽 팔리지만 이리 질러줬습니다. “이번에는 졌습니다. 조직이 없어서 졌습니다. 나중에는 우리가 이길 것입니다.”

상무가 뭐라 말하기 전에 먼저 자리를 박차고 나왔습니다. 상무는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었습니다. ‘사정을 해도 모자라는 판에 저리 건방진 새끼라니…….’ 뭐 이런 것 있잖습니까? 저를 비롯해 셋이 잘려 나왔습니다.

들어갈 때 제 일당이 4100원이었습니다. 한 달 일하니까 4200원으로 100원 올려 주더군요. 내년 법정 최저임금이 시간당 4000원이더군요. 명목상 여덟 배 가까이 올랐습니다.

행복지수도 그만큼 올랐는지요. 저는 행복지수 첫 경험도 한 번 말해 보고 싶습니다. 그런데 아직 겪지를 못했습니다. 물론 행복지수는, 이렇게 돈으로는 절대 나타낼 수 없는 줄은 잘 알지만 말입니다.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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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완 지음 | 커뮤니케이션북스 펴냄
지역신문 기자의 고민과 삶을 담은 책. 20여 년간 지역신문기자로 살아온 저자가 지역신문에 대한 뜨거운 애정과 자부심을 갖고 기자생활을 하면서 겪은 일들을 풀어낸다. 이를 통해 서로 비슷한 고민을 가진 지역신문끼리 정보를 공유하는 장을 마련하고자 했다. 아직도 사라지지 않은 촌지, 살롱이 되어버린 기자실, 왜곡보도, 선거보도 등 대한민국 언론의 잘못된 취재관행을 비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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