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에서 본 세상

이미지카드로 풀어보는 경남의 숨은 매력

김훤주 2016. 5. 26. 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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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희 경남도민일보 출판미디어국 이종현 기자가 이미지 카드를 만들어주었습니다. 자기한테 주어진 업무만으로도 적지 않게 바쁠 터인데, 가욋일을 마다 않고 제가 펴낸 책 <경남의 숨은 매력-역사문화 스토리텔링>을 알릴 수 있는 새로운 도구를 제공해 주었습니다.


출판기념회 날짜(5월 31일 오후 7시, 창원 마산회원구 삼호로 38 경남도민일보 3층 강당)를 받아놓고도 어쩌다보니 이런저런 다른 일도 생기고 해서 제대로 알리지도 못하고 있었는데 참 고마운 노릇입니다.(이종현 기자는 <경남의 숨은 매력> 편집자이기도 합니다.)


이종현 기자가 만들어준 이미지 카드는 스물두 개입니다. 경남 전역 열여덟 시·군 스무 개 지역마다 하나씩 그리고 책 알리는 하나와 출판기념회 알리는 하나. 주욱 늘어놓기만 해도 홍보가 되겠지만, 카드마다 떠오르는 생각들을 짧게나마 붙여 보겠습니다. 


31일 출판기념회에 쓸 플래카드입니다. 창원에 있는 한글미디어에서 제작했습니다.괜찮죠?






거제는 섬입니다. 옛날 사람들이 배를 타고 다닐 수 있는 바다는 거제 안쪽이냐 바깥쪽이냐로 나뉘었습니다. 안쪽 바다는 든바다라 하고 바깥바다는 난바다라고 하는데요, 든바다는 파도나 바람이 잔잔한 반면 난바다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지금과 달리 선박을 운항하는 기술도 동력도 보잘것 없었던 옛날에는 난바다란 그야말로 죽음 그 자체였습니다. 420년 전 임진왜란에서 조선 수군과 일본 수군이 견내량에서 한 판 크게 싸울 수밖에 없었던 까닭입니다. 견내량은 거제 본섬과 통영 사이 좁다란 해역입니다. 




정자를 두고 영남과 호남을 구분해 영남=경상도 정자는 자연 위에 걸터앉아 있는 반면 호남=전라도 정자는 자연에 안겨 있다는 식으로 말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면서 경상도 사람과 젼라도 사람의 성향이 서로 다른 근거로 들먹이기도 합니다.


그것은 자연의 차이이지 사람의 차이는 아니지 싶습니다. 거창은 바위와 돌이 많습니다. 우리나라 화강석 으뜸 생산지이기도 합니다. 거창 이름난 정자는 죄다 바위를 올라타고 있습니다. 전남 담양의 전라도 대표 정자 대부분이 들판과 잘 어울리는 것과는 사뭇 다릅니다.    



고성은 상족암 공룡발자국화석으로 이름이 높습니다. 여기서 조금만 더 들어가 생각해 보겠습니다. 공룡발자국화석은 아주 옛날 뻘흙이었다가 그대로 굳어서 이루어진 퇴적암에 남았습니다. 퇴적암이 아니면 공룡발자국이 화석으로 남을 수 없었습니다.


퇴적암은 산꼭대기 계승사 살림집 앞마당에도 물결무늬화석으로 남았습니다. 퇴적암은 고성 곳곳에서 쓰임을 받고 있습니다. 아름다운 학동 돌담장도 퇴적암 계열이고 심지어 그윽한 장산숲에는 퇴적암으로 만든 돌평상이 자리를 잡고 있답니다. 




김해 하면 대부분 사람들은 가락국(금관가야)과 김수로와 허황옥을 떠올립니다. 누군가는 구지가가 생각난다고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물론 틀린 얘기는 아니지만 과잉 대표되는 문제가 있습니다. 그 탓에 다른 뜻깊은 문화유산들이 가려지는 역효과가 작지 않습니다.


김해에는 수로왕 이전에도 사람이 살았습니다. 당대에도 계통이 다른 사람들이 같이 살았습니다. 그이들 문화유산 가운데 상당히 의미있는 것들이 많습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항만 유적도 있고 갖가지 고인돌=지석묘가 어우러진 데도 있습니다. 




남해는 보물섬입니다. 많이 망가지기는 했지만 갯벌도 멋집니다. 곰탁곰탁 구석구석 누비며 즐기라고 바래길도 개척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놀러와서 보는 이들에게는 아름다운 이 자연이 거기 눌러붙어 사는 이들에게는 악전고투의 대상이었습니다.


가천마을 다랭이논도 그런 현장입니다. 평지서도 논 만들기는 엄청난 고역이었습니다. 하물며 가파르기 그지없는 산비탈에 들이세운 다랭이논입니다. 남해 명물 죽방렴도 마찬가지, 우리나라 가장 물살이 센 여기에 그물 설치하기가 보통 어려운 일이었겠습니까.




밀양은 예로부터 큰 고을이었습니다. 낙동강과 밀양강이 만나는 어귀 들판 덕분입니다. 너른 들판은 고된 노동과 넉넉한 살림살이를 낳았습니다. 넉넉함은 일제강점기 활발했던 독립운동의 바탕이었지요. 영화 <암살>로 유명해진 '밀양 사람 김원봉'이 탄생한 배경입니다.


밀양의 강과 들판은 물론 산까지 멋집니다. 산 좋고 물 좋고 들판 너르고 정자까지 멋진 데가 어디 쉽느냐고들 하는데요, 밀양에서는 그렇게 말씀하면 다치실 수도 있습니다. 잘 알려진 영남루 말고 월연대(월연정+쌍경당)까지 품고 있기 때문입니다.

 



경남 갯벌의 절반 이상이 사천에 있습니다. 썰물 때 사천만은 한 눈에 담기 어려울 만큼 너른 갯벌이 펼쳐집니다. 절반 가까이 매립되어 옛날과 견줄 수 없을 만치 쪼그라졌지만, 그래도 여전히 사천은 갯벌이 멋지고 거기서 나는 산물 또한 적지 않게 풍성합니다.


사천 갯벌은 습지 문화유산도 품었습니다. 가산마을 돌장승도 갯벌이 있었기에 생겨났습니다. 퇴계 이황이 스승 어득강과 술잔 마주쳤던 새섬도 갯벌 한가운데 있었습니다. 천한 백성들 미륵왕생을 빌었던 사천매향비도 갯벌 덕분에 남았습니다. 




김해 가락국 마지막 임금의 무덤이 산청에 있습니다. 동남쪽 바닷가 김해에서 임금 노릇을 하던, 신라에 나라를 바친 구형왕이 어떻게 산청까지 들어와 살다 죽었을까요? 게다가 우리나라에서 보기 드물게 돌을 쌓아 만든 적석총 형태입니다. 왜일까요?


산청은 느낌이 산뜻한 고장입니다. 여기 살던 남명 조식도 분위기가 비슷합니다. 그이 모시는 덕천서원과 제자들 가르쳤던 산천재가 있는 덕산 고을에 가면, 남명이 호랑이를 거느렸다든지 하는 얘기를 해주는 어른들이 살고 있습니다.




신라 만고충신 박제상이 양산 사람입니다. 고구려와 왜국에 볼모로 잡혀간 이들을 구하려고 목숨을 바친 왕족이었습니다. 충(忠)에 대해 다시 생각해 봅니다. 지금 지배집단은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칠, 아니 자기것을 좀이라도 내놓을 인간이 과연 얼마나 될까요?


백결선생은 박제상의 아들입니다. 거문고를 잘 탔습니다. 옷을 백(百) 번 기워(結) 입을 정도로 가난했습니다. 세밑에 이웃집 쌀 빻는 소리를 부러워하는 아내를 달래려고 '방아타령'을 지었답니다. 충신 아버지 때문입니다. 아무 대가가 없어도 되는 것이 충일까요? 



삼성그룹을 창업한 이병철과 백산상회를 설립한 백산 안희제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의령 사람이라는 것과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난 자산가라는 것입니다. 차이점도 있습니다. 이병철은 돈을 굴린 목적이 자신과 식구의 안녕이지만 안희제는 나라의 독립이었습니다.


돈은 어떻게 모으느냐도 중요하지만 어떻게 쓰느냐가 더욱 중요합니다. 이병철이 부러움의 대상은 되어도 존경의 대상은 못 되는 까닭입니다. 임진왜란을 맞아 자기는 물론 일가친척 재산까지 털어 의병을 일으킨 곽재우도 의령 사람이군요.



진주는 '최초'가 가장 많은 고장입니다. 진주향교도 경남 최초, 옥봉경로당도 경남 최초, 상공회의소에 해당하는 진주상무사는 전국 최초, 진주교회도 진주 문산성당도 해당 분야 경남 최초입니다. 예나 이제나 경남에서 물산이 가장 풍부했던 덕분입니다.


진주역 차량정비고도 진주 물산이 풍부했다는 방증입니다. 삼랑진에서 비롯되는 경전선이 지금은 전라도 광주까지 이어지지만 일제강점기와 1960년대는 진주가 종점이었습니다. 진주 서쪽에 있는 물산은 일제가 철도까지 놓아가며 수탈할 정도는 되지 못했던 것입니다.



곽재우는 임금이 벼슬을 내려도 곧바로 그만두었습니다. 벼슬을 거절했다는 이유로 귀양도 살았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같은 남명 조식의 제자로 합천 의병장이었던 정인홍을 보면 짐작이 됩니다. 정인홍은 광해군 시절 영의정까지 했으나 인조반정으로 목이 떨어졌습니다. 


곽재우는 자연스러운 종신(終身)을 할 수 있었습니다. 벼슬길이 저승길임을 알았던 것일까요? 임진왜란이 끝난 뒤 곽재우는 창녕 도천면 우강마을 낙동강가에 망우정을 짓고 말년을 보냈습니다. 그이가 잊으려(忘) 했던 근심(憂)은 과연 무엇일까요?



고려-원나라 연합군의 두 차례 일본 정벌의 출발점이 마산이었습니다. 합포에서 견내량을 거쳐 쿠로시오해류를 타고 대마도로 갔습니다. 군대만 1차 4만, 2차 14만이니 보급 수발 인력까지 치면 사람으로 넘쳐났을 마산입니다. 지금은 그런 자취가 거의 사라졌습니다.


일제강점기와 60년대 70년대 끝자락에 이르는 유적들은 많습니다. 아직 역사로 편입되지 않은 당대 현실일 수도 있는 부분입니다. 이런 우리 시대 마지막 모습들은, 상상력을 키우고 감수성을 깨우는 스토리텔링을 기다리고 있지 않을까 모르겠습니다.




지금 진해는 진해가 아니었습니다. 원래 진해는 지금 마산합포구 삼진지역 진동면 진북면 진서면 일대였습니다.(진서면은 진주 양전면과 합해지면서 진전면으로 바뀌었음) 러일전쟁에서 이긴 일제는 원래 진해에서 이름을 뺏어와 지금 진해에다 갖다붙였습니다.


지금 진해의 원래 이름은 웅천(熊川)이었습니다. 우리말로 곰내입니다. 정말 참 고운 이름입니다. 웅천은 웅천읍성으로 남아 있습니다. 조선 세종 대마도정벌로 왜구를 쓸어낸 뒤 쌓았습니다. 그 남쪽 너머에는 왜구에 대비한 경남해군사령부격인 제포진성이 있었습니다.



창원을 신도시로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1974년 시작된 창원공단 개발로 말미암은 도시라는 것이지요. 하지만 창원이라는 지명은 600년도 넘은 옛적부터 쓰였습니다. 2010년 합쳐진 마산보다 더 역사가 오랜 고장이 바로 창원입니다.


창원은 문화재가 별로 없습니다. 성산패총만 덩그러니 있습니다. 박정희 시절 공단 조성을 하면서 독재시절답게 그야말로 싸그리 밀어붙인 탓입니다. 물론 창원이 품은 문화재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국립중앙박물관이 수탈해 가져갔을 따름입니다.  


<경남의 숨은 매력>에는 한산도나 제승당 얘기가 없습니다. 지금껏 알려진 이상으로 다른 무엇을 찾아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거기 해방 직후 어린아이들 성금을 모아 '리 충무공 계시던 제승당의 터다'라 새긴 한글 빗돌이 상당히 인상 깊었습니다.


통영은 통제영의 도시입니다. 통영에 삼도수군통제영이 들어선 때는 임진왜란 끝난 뒤인 1604년입니다. 이순신장군과 크게 관련되어 있지는 않다는 말입니다. 통제영은 주전소를 두고 군수물자를 자체 조달했습니다. 십이공방입니다. 십이공방은 예향 통영의 뿌리입니다.


신라말 슈퍼스타 고운 최치원은 하동에도 자취를 남겼습니다. 그러나 하동 지리산에서 살지는 않았습니다. 가야산 해인사에서 식구들과 더불어 살다가 죽었습니다. 그런데도 하동 지리산 사람들은 최치원을 굳이 지리산 산신으로 만들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악양에는 조씨고가가 있습니다. 박경리 소설 <토지>의 최참판댁 모델이랍니다. 비가 내리는 날 찾았습니다. 댁 어른은 "우리 말고도 천석지기 부자가 악양 골짜기에 다섯이 더 있었다"고 했습니다. 평야지대도 아닌 악양에 어떻게 그런 부자가 많을 수 있었을까요?



함안은 가야의 옛 땅이지만 성산산성에서 나온 것은 신라 유물이었습니다. 신라가 가야를 정복한 뒤 거점으로 삼았기 때문입니다. 성산산성은 많은 목간과 함께 600년 넘은 연씨앗도 품고 있었습니다. 함안박물관 연못에 가면 고려시대 그 연꽃을 볼 수 있습니다.


두루(咸) 편안한(安) 이 고장을 서울 사람들은 역수(逆水)의 땅이라며 반역과 연결지었습니다. 함안 물줄기가 임금이 있는 북쪽을 향하기 때문이었습니다. 악선동은 물론 사실과 다릅니다. 무진정, 고려동, 장춘사 등을 잠깐만 둘러봐도 바로 알 수 있습니다. 




박지원 소설 <열녀함양박씨전>을 아시는지요? 연암은 소설에서 열녀를 칭찬하는 듯하면서도 은근히 당시 여권의 참담한 실태를 고발하고 남녀 성정의 자연스러운 흐름을 강조했습니다. 연암이 안의 고을에 원님으로 와 있을 때 자기 아전의 며느리가 그 박씨였습니다.


동학농민전쟁을 촉발시킨 장본인 고부군수 조병갑의 선정비가 함양에 있는 것도 이제 많이 알려져 있습니다. 그 허황된 내용이 헛웃음을 자아냅니다. 그런데도 선정비를 세운 것을 보면 그 가렴주구가 얼마나 극성스러웠지 거꾸로 짐작하게 해 줍니다.


해인사의 합천 압도는 통도사의 양산 압도와 다르지 않습니다. 해인사 탓에 많은 사람들은 합천에 다른 명물이 있는 줄은 생각조차 않습니다. 대가야 마지막 태자 월광태자가 노닌 월광사지와 유홍준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로 이름을 알린 영암사지가 그렇습니다.


합천은 서울보다 1.5배 넓습니다. 합천(강양) 초계 삼가 세 군현이었다가 합해져 지금 합천이 되었습니다. 다른 지역에는 하나뿐인 향교를 합천은 넷이나 품고 있습니다. 이렇게 넓은 만큼 둘러보고 구경할 산천과 문물 또한 다른 고장과 견줄 수 없을 정도로 많답니다. 




천편일률에서 벗어났습니다. 역사 문화 생태를 지역마다 고유한 측면을 많이 담았습니다. 역사만큼 상상력을 일깨우는 것은 없다고 여기고 썼습니다. 인터넷서점이나 마산 학문당 영풍문고 창원 교보문고 그랜드문고 진주 진주문고 부산 영광도서 등에서 구할 수 있습니다.


5월 31일 화요일 제가 몸담고 있는 경남도민일보(창원 마산합포구 삼호로 38) 3층 강당에서 조그맣게 출판기념회를 합니다. 술 밥 떡 안주도 마련합니다. 경남을 아끼고 사랑하는 모든 분들을 초청합니다. 즐거운 마음과 가벼운 걸음으로 와주시면 무척 고맙겠습니다.      Orz...............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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