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본 곳

사랑하는 관룡사

김훤주 2008. 2. 28. 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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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고향 창녕에는 관룡사라는 절간이 하나 있습니다. 창녕읍 옥천 골짜기에 있습니다. 어릴 적 ‘국민’학교 시절에는 6학년이 되면 이곳 관룡사로 창녕군 모든 아이들이 수학여행을 오기도 했습니다. 쌀 두 됫박씩을 숙박비로 내고서 말입니다.


저랑은 인연이 깊은 절입니다. 고3이던 81년 봄과 여름에, 제가 그야말로 세상이 무너지는 엄청난 일을 겪어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을 때 어버이께서 저를 이 절집에서 두어 달 묵게 하셨습니다.


허리가 너무 아파 약사전 약사여래불 앞에서 밤새도록 염불을 바치시던 젊은 스님이랑 부산 출장이 잦으셨던 주지 스님, 지금 어떻게 지내시는지 궁금하군요. 같이 요사채에 머물던 철학 경제학 공부하시던 대학생 형도 무엇 하시는지 궁금하네요.


그리고 스물여섯 늦은 나이에 대학 입시를 준비하던 형도 생각납니다. 늦깎이 입시생 형의 여자 친구 분은 ‘억수로’ 예뻐서 제가 질투가 다 날 정도였습니다. 이 형은 우리들 사이에서 웃음보따리였습니다.


지금은 절간 바로 아래까지 자동차가 쑤욱 들어가지만, 27년 전에는 버스에서 내린 다음 오솔길을 따라 두 시간은 족히 올라가야 했습니다. 지금은 땀은 흘리지 않아도 되지만, 대신 1000년은 넘게 된 오솔길이 발길에 짝짝 달라붙는 그런 맛을 느낄 수는 없게 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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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솔길을 올라가다 이런 돌장승을 만납니다. 그러면 절간이 바로 눈 앞에 있는 줄 알아야 합니다. 절집 경계가 여기서 시작된다는 뜻이니까요. 돌장승은 옛적부터 척사(斥邪)하는 노릇도 했다지요. 오른쪽이 할멈이고 왼쪽이 할아범입니다. 할멈은 키가 좀 작은데다 윗니가 아래로 내려와 있고 부드럽습니다. 할아범은 키가 큰데다 아랫니가 위로 솟아 있고 조금 억셉니다.


돌장승 노부부는 2000년대 들어 말 못할 고초를 겪었습니다. 2003년 9월 태풍 ‘매미’ 때는 골짜기를 덮쳐 흐르는 물살에 휩쓸려 자취를 잃어버리기도 했습니다. 그 뒤 어찌어찌해서 찾기는 했는데 도둑질을 막는다는 핑계 아래 행정 당국은 이 부부를 파묻어 놓습니다.


그런데 도둑들이 파묻는다고 안 훔쳐 가지는 않는 법이더라고요. 이듬해 1월 도둑질이 들통나 전국에 수배가 됐고 돌장승은 2월 충남 홍성까지 나들이했다가 돌아왔습니다. 물론 나들이시킨 ‘주역’들은 아직 확인이 되지 않고 있습니다.


이들은 돌아오자마자 원래 자리에 가지 못하고 관룡사 일주문 아래 황량한 자리에 이렇게 세워졌습니다. 사진은 2004년 3월에 찍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지금은 어떻게 돼 있는지 알아보지 못한 셈인데, 여태 보도가 없는 데 미뤄 원래 자리로 아직 돌아가지는 못했나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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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는 관룡사 들어가는 옛길입니다.(지금 일주문은 따로 있습니다. 저는 지금 일주문으로 절대 들어가지 않습니다. 맛도 없고 멋도 없기 때문입니다.) 관룡사는 신라 8대사찰의 하나였다 하고, 394년(내물왕 39)에 지어졌다고도 합니다. 기록에 따르면 그 때는 신라에 불교가 전해지기 전인데, 그렇다면 가야-허황후-계 불교 유적이 되는 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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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나중에 말씀드리겠지만, 통일신라 시대 요석공주와 일이 있었던 원효께서 중국 스님 1000명을 모아 놓고 화엄경 설법한 장소라고도 합니다.-물론 양산 천성산 화엄벌에도 같은 이야기가 얽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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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그 잘 알려진 해동원효 척판구중(海東元曉 躑板救衆) 있지 않습니까? 중국 어느 절집이 무너질 위기에 빠졌는데 이를 신라 땅에 있던 원효가 보시고 널빤지를 집어 던졌더니 그 중국 절간 앞에 가 공중에 떠 있었고, 이 신기한 일을 보려고 절집에서 사람들이 나왔고, 그러자마자 절집이 무너져 사람 목숨을 다 살렸다는. 그 사람들이 원효 스님을 찾아 해동에 왔다가 천성산 화엄벌에서 화엄경을 듣고 죄다 성불했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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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길을 올라가기 전에 왼쪽으로 살펴보면 이 같은 솔숲이 또 나타납니다. 다른 이들은 어떻게 보는지 몰라도 저는 이 사진이 아주아주 좋습니다. 골짜기에서 내려오는 싱싱한 바람이 손에 묻어날 듯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절간은 많이 바뀌었습니다.(원음각이 대표입니다. 원음각이라면 부처님 말씀이 울려퍼지는 곳인데, 부끄럽게도 옛날에는 탁 트여 있었으나 지금은 사방팔방 문짝을 해 달아 말씀이 널리 퍼져나갈 수 없게 돼 있습니다.) 사진은 2001년 6월과 2004년 3월에 찍었습니다. 푸르른 기운이 있거나 없거나로 가려 보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뒤쪽 배경으로 둘러친 병풍바위는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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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로 따지면, 조선시대 관룡사는 산사태를 만나 사라진 적이 있었습니다. 병풍바위는 아마, 그 때 흙들이 떨어져 나가고 나서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을까 저는 짐작해 봅니다. 병풍바위는 가을에 가장 멋집니다. 물론 지금처럼 조금 스산한 느낌을 주는 겨울도 괜찮고, 여름도 나름대로 멋집니다. 그러나 가장 좋기로는, 어느 철이든, 구름 또는 안개가 휘감고 있다가 살짝 걷힐 때 바라보이는 풍경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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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는 용선대(龍船臺)입니다. 돌로 만들어진 석가여래좌상이 모셔져 있습니다. 통일신라 후대 작품이라 합니다. 앞서 만들어진 경주 석굴사 본존불과 견줘 아름다움이 꽤 떨어지고 많이 형식화돼 있다는 평을 받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그 시대 사람 솜씨와 마음씨가 따른 문제지, 부처님 본디 용모와 생각이 문제이지는 않을 것입니다.

용선(龍船)이 무엇인지 행여 아십니까? 반야용선(般若龍船)의 줄임말입니다. 반야용선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슬기와 깨달음의 세계로 나아가는 배를 이릅니다. 반야용선은, 감히 제 식으로 말씀드리자면, 중생의 세계와 부처의 세계를 오갑니다. 절간에서 온전한 부처님께서 머무시는 데가 어디입니까? ‘평준화해서’ 말씀드리자면 ‘대웅전’입니다. 대웅전에 용이 많이 새겨져 있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그것도 용머리가 뱃머리 모양을 하고 있습니다.) 앞에 사진은 관룡사 요사채에서, 그러니까 멀리서 바라본 용선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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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선대 뒤쪽 있는 바위에는 이런 구멍이 나 있습니다. 깎은 나무를 나무를 질러 넣었음직한 구멍 둘레에 못을 쳐 박았지 않았을까 싶은 자국이 나 있습니다. 이를 두고 문화재 공부를 하는 이들은 닫집을 만들어 부처님 위에 씌운 자국이리라 짐작합니다. 닫집은 불전에 가면 대부분 있습니다. 부처님 머리를 가리는(또는 덮는) 장식물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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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선대 부처님 오른쪽에는 이렇게 사람 사는 풍경이 펼쳐집니다. 그러나 부처님께서 보여주시고자 하는 풍경이 아닙니다. 석굴사 본존불과 마찬가지로, 여기 부처님도 동짓날 해 뜨는 데를 바라보시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정동에서 동남쪽으로 15도 어긋나 있다는 얘기입니다. 여기 비춰본다면 옛적 새해 시작은, 봄이 아니었고 비로소 겨울이 물러가는 때였습니다. 동짓날은 해가 가장 짧아졌다가 길어지기 시작하는 날이거든요. 그러나 미안하게도, 다음 사진은 동짓날 해 뜨는 데를 찍은 것이 아닙니다. 병풍바위를 찍은 사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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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선대는 법당 앞을 가로질러 살림채 뒤쪽으로 난 길 끝에 달려 있습니다. 절간에서 용선대까지는 20분 남짓이면 가 닿습니다. 길도 평탄해서 식구들끼리 오르기에는 그만입니다. 왼쪽 뒤통수에는 화왕산성이 보이고 왼쪽 앞머리에는 말씀드린 병풍바위가 있습니다. 앞쪽에는 숲 속에 파묻힌 채 보일 듯 말 듯 관룡사가 숨어 있고요. 어떤 이들은 줄곧 바람이 불어대는 이 용선대에 서서 병풍바위만 넋 놓고 바라보다가 그냥 발길을 돌려 내려오기도 한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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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바, 제가 만든 말이기는 합니다만, 천명 구시입니다. 1000천년이 됐다는, 인도에서 가져 온 나무로 만들었다는 구시입니다. 표준말로는 구유라고 하겠지요. 절에서는 절간 규모가 여간 대단하지 않았다는 증거로 삼는 물건입니다. 옛날 엄청 모여든 사람들을 위해, 한꺼번에 밥을 했고 이를 주먹밥으로 만든 다음 연잎으로 싸서, 차곡차곡 담았다는 말씀입니다. 적어도 1000명이 점심으로 먹을 정도는 되지 않았을까요? 이밖에도, 바로 옆 대웅전 본존불 뒤로 돌아가 보면, 사물(四物)이 있습니다. 옛적 원음각에 걸려 있었음직한, 목어 운판 범종 북 따위. 지금은 어떻게 돼 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만.

여기서 관룡사로 돌아 내려오지 않고 내쳐 오르면 화왕산 마루에 닿습니다. 화왕산은 따로 말씀드릴 만한 산입니다. 여기서는 몇 장 사진만 올려놓습니다. 억새와 갈대들입니다. 그리고 동문 바깥에서 찍은 성벽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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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왕산 사진은 2001년 11월 찍었습니다. 참, 마지막 사진 성벽 위 여성은 저와는 아무 관계도 없는 분입니다.


김훤주(전국언론노동조합 경남도민일보지부 지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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