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에서 본 세상

우포늪생태관광, 마을에서 보물찾기부터

김훤주 2016. 3. 8. 1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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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12월 25일 창녕우포늪생태관광협회 부탁으로 우포늪(소벌)을 둘레에 있는 신당·주매·장재·세진 네 군데 마을을 둘러볼 수 있었습니다. 저마다 마을을 알리는 활동을 벌이고 있는데 이를 확인하고 소개해 달라는 취지였습니다. 


네 마을을 종일 돌아다녔는데, 저로서는 나름 보람도 재미도 있었습니다. 시들어가는 시골마을들이 어쩌면 조금 피어날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까지 들었습니다. 


물론 이런 생각이 ‘사실’이기보다는 ‘희망’에 가깝다는 정도는 잘 알고 있습니다. 마을이든 길이든 무엇이든 사람이 복닥거려야 되든지 말든지 할 텐데, 지금 우리나라 모든 시골은 그런 복닥거림과 거리가 멀어도 너무 멀기 때문입니다. 



제가 어릴 적에는 밥 짓는 연기가 고샅고샅 깔리는 저녁 어스름이 지나도록 들판이든 마당이든 아이들 뛰노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는데, 지금은 어느 마을에서도 기껏 개 짖는 소리만 들릴 뿐 인기척 자체가 모두 드물어져 있는 것입니다. 이런 실정에 마을을 누가 찾겠으며, 찾아온다 한들 무슨 재미나 즐거움을 어느 구석에서 찾아 누리겠느냐는 얘기입지요. 


그럼에도 희망의 씨앗을 하나라도 길어올리는 심정으로 말하자면, 먼저 마을마다 집집마다 골목마다 샅샅이 다니며 바깥에서 오는 사람한테 보여줄 이른바 ‘보물’ 찾기부터 한 번 해보면 어떨까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는 물론 마을 사람이 아니라 찾아오는 사람이 보물로 여길 만한 것들이어야 하겠습니다. 마을 사람들이 아무리 소중하게 여긴다 해도 찾아오는 사람들한테 재미가 없고 즐거움이 되지 못한다면 소용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마음 먹고 둘러봤더니 보물 될 만한 거리들이 하나둘 눈에 들어왔습니다. 물론 저는 눈썰미도 야무지지 못하고 생각 또한 어설픕니다. 전체를 바라보며 크게 기획을 하는 처지도 아니기에 단편적이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한 꼭지 글을 써보는 까닭은, 이런 ‘개떡’ 같이 썼어도 ‘찰떡’ 같이 생각하는 ‘마음눈 밝은 이’를 만나는 행운을 행여라도 누리고 싶기 때문입니다. 


먼저 담장들입니다. 황토를 벽돌처럼 찍어 켜켜이 쌓아올린 녀석도 있고 진흙에다 볏짚과 자갈을 넣어 만든 녀석도 있고 아래쪽에 듬성듬성 큼직한 돌이 들어간 녀석도 있었습니다. 황토벽돌로 만들어진 담벼락은 그 두터움 덕분인지 무척 따듯하게 느껴졌습니다. 



또 진흙은 자세히 보면 군데군데 조개나 고둥 따위의 껍데기가 섞여 있었는데요, 그런 고둥이나 조개는 우포늪(소벌)에 바글바글합니다. 소벌이라는 습지에 바탕을 둔 마을이라고 일러주는 생태 물증으로 보면 딱 맞는 셈입니다. 



아래쪽에 박힌 돌들도 마을 생태를 알려주는 노릇을 하고 있습니다. 청석(썩돌. 살짝만 건드려도 깨질 만큼 푸석푸석해서 붙은 이름)을 주로 썼으면 습지에 더욱 가까운 마을이고요, 그렇지 않고 화강암 따위 다른 계통 돌이 많으면 습지를 벗어난 산비탈에 가까운 마을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게다가 이렇게 돌을 넣어 쌓을 때 여러 모로 질서와 변화와 조화를 새기는 미적 감각을 살린 부분도 있었으니 그를 바라보는 입가에다 슬그머니 웃음을 물릴 수도 있었습니다. 커졌다가 작아지고, 어긋나게 나가다가 일치되게 나가고



구조가 아주 독특한 집도 있었습니다. 먼저 우스꽝스럽게 여겨질 정도로 지붕 용마루가 매우 좁았습니다. 방을 들어앉힌 방식도 저로서는 여태껏 보지 못한 것이었습니다. 보통은 방을 일(一)자로 나란히 앉히지만 여기서는 방 네 개를 전(田)자로 한 군데 쓸어모았습니다. 



대청도 남달라서 일단은 무척 널렀습니다. 그러고는 니은(ㄴ)자 모양으로 방을 왼쪽에서 오른쪽 앞으로 감싸돌렸습니다. 오른쪽 앞은 좁은 편이었고 왼쪽은 아주 널찍했습니다. 아마 농사를 짓고 그 산물을 갈무리하는 데에 이렇게 너른 마루가 필요했었기 때문이 아닐까 짐작해 봤습니다. 


그래서 많이 허물어지고 사랑채는 자취만 조금 남은 정도였지만 제 깜냥으로 볼 때는 문화재로 삼아도 충분히 되겠다 싶었습니다. 이밖에도 토담집이 적지 않았고요 그런 가운데서 서까래가 멋들어진 집도 여러 채 있었습니다. 



앞에 마루 너른 집도 서까래가 멋졌지만, 그보다 더 멋진 서까래가 또 있었습니다. 용마루 아래를 받치는 나무를 중심으로 삼아 사방으로 흘러내린 품이 상당히 느낌이 좋습니다. 거기에 구불구불함이 더해져 있어 천연스러운 기운이 뿜어나오는데요, 그것이 곧게 뻗어 지붕을 받치는 기능을 해치는 데까지는 나가지 않는 절제도 함께 머금고 있습니다. 


또 우리가 무슨 절간에서나 볼 수 있으려니 여기기 십상인 그런 바람벽도 있었습니다. 아래위로 곧바른 나무 대신 휘영청 살짝 구부러진 나무가 거기 기둥으로 서 있는데, 바람벽 마감을 그에 맞춰 휘어지게 한 흙벽이랍니다. 



우리는 속세를 떠난 암자 같은 데서나 이런 모습을 봐왔습니다. 그런 때문에 자연을 존중하고 자연과 하나 되는 어떤 깨달음이 여기에 스며 있는 줄로 여깁니다. 하지만, 그게 언제나 그렇지는 않고 또 그게 어쩌면 막연한 초탈의 산물이 아니라 결핍의 구체적인 산물일 수 있겠다 생각하게 됩니다. 가난해서 등등 이유로 곧바른 목재를 장만할 수 없었던 것이 아닐까요?


길가에 버려지다시피 놓인 탈곡기도 눈에 밟힙니다. 낡은 정도로 가늠해 보니 일제강점기 태어난 녀석이 틀림이 없지 싶습니다. 적어도 일흔 살은 넘은 이 몸통에는 일본글자랑 한자가 뒤섞여 적혀 있습니다. 



우리말로 더듬더듬 옮겨봅니다. 첫 줄은 ‘농림성 추천 권장품’, 둘째 줄은 ‘실용신안등록’, 셋째 줄 왼쪽 세 글자는 ‘가와베식’인데 그 다음 세 글짜는 못 읽거나 못 알아보겠습니다.(하지만 대충은 그 뜻이 우리 말 ‘탈곡기’에 해당되리라 짐작해 봅니다.) 


넷째 줄은 이 녀석 탄생하신 동네 ‘효고현 시카마군 아오야마’입니다.(인터넷으로 찾아보니 시카마군이 지금은 히메지라는 도시의 한 부분이네요.) 다섯째 줄은 그러니까 '가와베 농구 제작소 제품'이라는 얘기이고요.


40년 전만 해도 우리 농촌에서는 이처럼 발로 밟아 돌리는 ‘와릉와릉’ ‘가릉가릉’ 탈곡기가 많았습니다. 아니 전부였습니다.(경운기로 석유를 끌어쓸 수 있기 이전에는 사람이 유일한 동력이었습니다.) 


가을철 타작은 아침부터 밤중까지 이어졌고, 탈곡기 돌아가는 소리는 바깥마당을 울렸습니다. 탈곡기에 털려나온 검부러기들은 온 마당을 뿌옇게 뒤덮으며 떠돌았는데요, 특히 까끄라기들은 살갗에 달라붙어 징글맞게 따끔거렸습니다. 


어린 우리는 그런 탈곡기 페달을 한 번이라도 밟아보고 싶어 안달이었습니다만, 어른 장골들은 잠깐도 틈주지 않고 번갈아 돌아가며 쉴 새 없이 밟아댔습니다. 낟알을 달고 있어 무겁던 볏단은 줄어들고 그만큼 탈곡기 저 너머에는 나락이 수북하게 쌓여갔더랬습니다. 


더 열심히 일하라고 족치는 할아버지 호통 소리는 날이 깜깜해서 사람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계속됐는데, 그렇게 어두운 속에서도 검부러기 뒤섞인 마당 흙냄새는 이상하리만치 구체적으로 코 끝에 머물렀었습니다. 


이런 옛날 생각을 하며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으려니 이 녀석을 되살려 쓸 수 있다면 아주 좋겠다는 생각이 불쑥 들었습니다. 어른들한테는 옛날 어린 시절을 떠올리게 하는 구실을 할 테고요 아이들한테는 와릉와릉 신나는 체험 대상으로 인기가 대단할 것 같았습니다. 


동네 양지바른 데 놓여 있는 앉을자리. 발 밑 자리에는 땅거죽을 뚫고 나온 봄풀이 새삼스럽습니다.


이처럼 마을 고샅을 돌아다니다 보면 유별나게 양지바른 자리가 꼭 있기 십상입니다. 이런 데는 희한하게도 다른 데서는 야무지게 불던 바람조차도 잦아들고 맙니다. 한동안 앉아 있으면 먼저 온 몸이 노골노골해지고, 이어서 정신마저 살짝 혼미스러워지기 쉽습니다. 


발 아래 땅거죽에서는 다른 데서는 피어날 엄두도 못낼 새싹들이 소복하게 돋아올라 있기도 합니다. 봄은 이렇듯 야트막하고 조그만 몸집으로 풀이 돋아나면서 오기 시작하는 모양입니다. 물론 물러설 줄도 아는 녀석이 바로 봄일 때도 많습니다.



잠깐 머물렀다 살짝 일어나 다시 마을 쓰러진 집 담장 안으로 들어가 봅니다. 여기저기에 돌확 돌절구 절굿대 돌떡판 따위가 너부러져 있습니다. 주인은 이미 세상을 떠났거나 아니면 최소한 마을을 떠났음은 분명합니다. 이런 것들도 잘 추스르면 마을 찾아오는 이들 발길 눈길 손길을 한 번씩은 잡아당길 수 있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네팔 타루 마을 전시관. 벽에는 '타루마을 발전을 위한 기부함'이 걸려 있습니다.


2015년 2월 네팔을 다녀온 적이 있는데요, 거기서 저희 일행은 시골 농촌 동네 전시관을 둘러볼 수 있었습니다. 그이들 농경 유물 생활 유물 그리고 지금껏 쓰고 있는 도구들이 둘러서 있었는데요, 아주 정겹고 따뜻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동네 박물관은 몇몇 지역에 만들어져 있습니다. 이런 물건들과 풍경들, 그리고 동네 역사와 사람 이야기를 제법 버무릴 수만 있다면, 거기에 담을 수 있는 보물들은 마을마다 집집마다 골목마다에서 찾아낼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물론 눈높이는 잘 맞춰야 하겠지요. 마을 주민 그러니까 공급자가 아니라, 마을을 찾아드는 수요자한테 말씀입니다.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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