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에서 본 세상

서형수 전 경남도민일보 사장을 기억함

김훤주 2016. 2. 17.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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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형수, 라 적고 보니 여러 생각이 떠오릅니다. 2009년 겨울에서 봄으로 넘어가는 어느 날 서울 안국동인가 인사동인가에서 처음 만났습니다. 


당시 경남도민일보는 새로 사장을 모셔야 하는 처지였습니다. 전임 허정도 사장 임기가 끝나는 시점이었거든요. 이를 위해 꾸려진 경영진추천위원회(위원장 김남석 경남대 교수)가 사장 물색에 나섰고 그렇게 해서 만나진 인물 가운데 서형수가 포함돼 있었습니다. 


저는 경영진추천위원회의 한 성원이었고요, 2007~2008년 한겨레신문 사장을 지낸 그이는 희망제작소에서 소기업발전소 소장을 맡고 있었습니다. 


능소능대(能小能大)한 사람 


처음 만나 무슨 얘기를 나눴는지 구체적으로 기억나지는 않습니다. 경남도민일보 차기 사장을 맡아 달라 이렇게 주문했고요, 서형수 소장은 똑 부러지게 그러마고 하지는 않았지만 시원시원하게 선선하게 여러 갈래로 자기 구상을 풀어내었던 것 같습니다. 


왼쪽 취임하는 서형수 사장. 오른쪽 이임하는 허정도 사장.


그러고 몇 차례 더 만난 다음 청문회 사원투표 주주총회 같은 절차까지 거쳐 6월 1일 서형수 경남도민일보 사장 취임식이 열릴 수 있었습니다. 저는 당시 서형수 사장 이력을 보며 이해할 수 없는 구석이 좀 있었습니다. 


1980년대 말 롯데라나 뭐라나 다니던 대기업을 때려치고 한겨레신문 창간에 합류한 데 대해서는 시대정신이려니 생각할 수 있었습니다. 57년생이니 당시 서형수는 서른을 갓 넘긴 청춘이었으니까요. 서형수 사장은 말했습니다. “합류할 때는 기자 요원이었지. 가서 보니까 신문 만들 사람은 넘쳐나는데 신문사 만들 사람은 없는 거라. 그래서 사업 파트를 맡게 됐어요.” 


신문 만드는 일은 취재하고 기사 쓰고 편집·제작하는 일을 이릅니다. 신문사 만드는 일은 신문 발행에 필요한 사람과 자원을 끌어오는 일을 이릅니다. 둘 가운데 어느 쪽이 더 누리고 편하고 좋고 표나는지는 누구나 알 수 있습니다. 


신문 만드는 일=기자 노릇은 바로 물 위에 떠 있는 백조의 화려하고 우아한 날갯짓이라면, 신문사 만드는 일=영업직은 백조가 그렇게 떠 있기 위해 물 아래에서 발버둥으로 안간힘을 쓰는 갈퀴질입니다. 서형수는 자기 앞에 비단길을 자갈길로 바꾸고도 ‘필요하니까……’ 하며 웃을 줄 알았습니다. 


저라면 그러지 못할 것 같습니다. 지금도 그렇습니다. 기자직으로 들어왔는데, 업무직 발령을 내면서 돈을 벌어 오라면 당장 그만두고 나가버리지 싶습니다. 


한겨레신문 사장까지 지낸 사람이 희망제작소 소기업발전소 소장을 하는 것도 쉽사리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한겨레신문이면 적어도 구성원이 400명은 될 것입니다. 소기업발전소는 구성원이 10명(어쩌면 5명)도 채 되지 않을 것입니다. 한겨레신문이면 세상이 알아주는 전국 단위 영향력 있는 매체입니다. 소기업발전소는 알아주는 사람이 한 움큼도 되지 않는 서울 소재 운동조직이라 하겠습니다. 한겨레신문은 그 아래에 다른 매체나 법인을 여럿 거느리는 우두머리입니다. 소기업발전소는 희망제작소라는 더 큰 틀 안에 들어 있는 부분일 따름입니다. 


한겨레신문의 그런 빛남과 대단함을 사장 자리에서 누린 사람이 서슴없이 조그만 운동조직 소장을 할 수 있다는 생각을 저는 그때까지 해본 적이 없었습니다. 



서형수 사장 취임하신 뒤 살짝 물어본 적이 있습니다. 어째서 그럴 수 있었느냐고요. 돌아온 대답은 이랬습니다. “필요하니까, 또 할 수 있는 일이니까.” 


이렇게 쓰고 나니 능소능대(能小能大)라는 낱말이 생각납니다. 작은 일도 잘할 수 있고 큰 일도 잘할 수 있다, 능히 커질 수 있고 능히 작아질 수 있다, 큰 자리를 맡으면 크게 하고 작은 자리를 맡으면 작게 한다……. 


그러고 보니 군자불기(君子不器)도 떠오릅니다. 능소능대라는 표현과 자주 함께 다니는 개념이지요. 군자는 그릇이 아니다, 군자는 모양과 크기가 그릇처럼 정해져 있지 않다, 상황과 시대에 따라 커질 수도 있고 작아질 수도 있어야 군자다……. 뭐, 서형수 사장이 그런 군자라는 말씀은 아닙니다만. 


문제도 해답도 내부에 있다는 깨우침 


경남도민일보에서 서형수 사장 시대는 길지 않았습니다. 2009년 5월부터 2010년 3월까지였으니 1년도 안 되는 10개월 남짓이었습니다. 게다가 사장 사퇴 계기가 된 김주완 편집국장 임명 동의 투표 부결이 2010년 2월 11일 벌어진 일이었으니 더 짧게 잡을 수도 있습니다. 


경남도민일보 사장은 임기가 3년이고 편집국장은 임기가 2년입니다. 2010년 2월 11일 편집국장 임명 동의 투표가 가결됐다면 서형수 사장(2012년 5월)과 김주완 편집국장(2012년 2월)은 어금버금하면서 임기를 마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서형수 사장은 경남도민일보 경영에 대한 생각이 아주 뚜렷했습니다. ①신문 발행(광고 포함)은 적자를 각오해야 한다 ②신문 지면은 자기 색깔을 분명하게 가져가야 한다 ③그런 존재감을 바탕으로 새로운 수익 창출 영역을 개척해야 한다, 였습니다. 


서형수 사장의 그 첫걸음이 김주완 편집국장 임명이었습니다. 김주완 편집국장 체제를 통해 경남도민일보 색깔을 분명히 내고 그 위에서 출판·기획·교육 등 영역에서 새 사업을 펼쳐 수익을 내겠다는 구상이었습니다. 


그런데 김주완 편집국장 임명이 구성원들의 동의를 얻지 못해 꺾이고 말았습니다. 경남도민일보 사장의 편집국에 대한 권한은 편집국장 임명 동의 투표가 고작입니다. 편집국은 인사조차 사실상 편집국장이 하게 돼 있습니다. 사장은 편집국장 의논 상대일 뿐입니다. 


당시 서형수 사장 사퇴 등 경남도민일보 사태는 언론계 전체의 뜨거운 관심사였습니다. <기자협회보> 2010년 2월 24일치 5면.


서형수 사장은 그래서 편집국장 임명 동의 투표 부결을 자신에 대한 불신임으로 간주했습니다. 곧바로 사퇴 의사를 밝혔으며 숱한 구성원들이 반대했음에도 결국 떠났습니다.(김주완 선배도 경로는 달랐지만 사직했습니다. 그리고 나중에 우여곡절 끝에 돌아옵니다.) 


서형수 사장이 편집국장 임명권을 행사하면서 올린 글에 들어 있는 표현들입니다. 

“변해도 살아남을 수 있을지 어떨지는 자신할 수 없지만, 변하지 않고서는 다른 것은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습니다.” 

“지면의 혁신과 조직의 소통이 필요합니다. 지금 최선을 하고 있는 것 같기는 하지만 긴장과 정성을 찾아볼 수 없고 현재 상황이 지속된다면 미래는 없습니다.” 

“회사가 살고 신문이 살려면 편집국 조직이 살아야 하고 지면이 살아야 합니다. 조직을 살리고 지면을 살리는 일은 여러분이 해야 할 일이지 경영자가 할 일이 아닙니다. 책임 있는 선택과 선택에 따른 책임 완수를 기대합니다.” 


서형수 사장이 경남도민일보를 떠나면서 남긴 글에는 이런 대목도 있었습니다. 

“<문제는 '안'에 있고 그 문제의 해결책도 '안'에 있다>는 결론과 함께, 어쩔 수 없이 저는 ‘안’의 사람이 아니라 ‘밖’에서 온 사람이기에 저는 이 회사의 문제를 풀 적임자가 아니라는 단순한 사실이 새삼 확인되었습니다.” 


당시 서형수 사장 사퇴를 말리기 위해 모였던 경남도민일보 구성원들. 자발적 참여였는데도 10명이 넘었습니다. 또 1기부터 14기인가까지 모든 기수에서 성명서를 내기도 했었습니다.


서형수 사장은 경남도민일보 구성원들이 그토록 붙잡고 애원했음에도 한 번 돌이킨 몸과 마음을 돌리지 않았습니다. 냉정하게 여겨지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바로 구성원들한테 남긴 서형수 사장의 마지막 선물이었습니다. 


그때까지 경남도민일보 구성원들은 바깥에서 유능한 인물을 모셔오는 데에 사활을 걸었었습니다. 처음에는 자본이 두둑한 물주를 모시면 좋겠다는 생각이나 움직임도 있었고요, 다음에는 경영능력이 검증된 인사를 모셔오자는 생각과 움직임이 있었습니다. 


서형수 사장은 경남도민일보 구성원들한테 이태 전 한겨레신문에서 출중한 경영 능력을 보여준 외부 인사였던 것입니다. 그런 외부 인사가 ‘안’의 문제를 짚었습니다. 서형수 사장 사퇴 이후 6월에 이르기까지 경남도민일보 구성원들은 격렬한 갈등·대립과 엄청난 토론·소통을 거쳤습니다. 


그러면서 ‘밖’으로 나가 있던 눈을 ‘안’으로 돌릴 수 있었고 그 결과가 지금껏 이어지고 있는 구주모 사장 체제입니다.(구주모 사장은 1999년 경남도민일보 창간 멤버로 데스크와 편집국장·상무이사 등을 거쳤습니다.) 한편 혁신하고 한편 소통해서 조직은 안정이 됐으며 수익도 크지는 않지만 흑자로 전환했다고 저는 알고 있습니다. 


그이는 이렇게 떠날 때가 언제인지 잘 알고 그 때를 맞춰 떠남으로써 경남도민일보 구성원들에게 깨우침을 안겼습니다. 


그 때 처음 들은 인생삼분법 


서형수 사장을 만날 때까지 저는 속도 조절이 안 되는 고장난 기계처럼 살았습니다. 나름 옳은 일을 하면서 살다가 죽으면 그만이지, 이렇게만 생각을 했더랬습니다. 빨라지고 느려지고 쉬었다 하고 하다가 쉬고 하는 것이 없었습니다. 


하루종일 일년 내내 일에 찌들려 살았습니다. 그렇다고 일을 잘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런 강박에 짓눌려 있다 보니 늘 지쳐 있고 힘에 겨워하면서도 일을 놓을 줄 몰랐던 것입니다. 


방향 조절도 안 되는 못난 기계였습니다. 내가 옳다고 여기는 일이 어떤 다른 사람한테는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못했습니다. 내가 옳다고 여기고 하는 일이 다른 어떤 사람한테는 거추장스럽고 성가신 일일 수도 있다는 생각도 못했습니다. 나이 들어서도 계속 죽치고 활동하면 그것이 나이가 적은 어떤 다른 사람들한테는 방해가 될 수 있다는 생각도 못했습니다. 


경남도민일보 떠난 1년 뒤 성공회대 사회적기업가학교 교장 직책으로 경남도민일보 강당에서 강의하는 모습.


서형수 사장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잘 생각해 보라고, 사람 일생을 말이야. 사람은 누구나 태어나서 얼마 동안은 다른 사람 도움으로 살아가지. 지금으로 치면 대학 졸업할 때까지가 되겠네. 이건 자기가 선택할 수 있는 일이 아니야. 운명처럼 주어지는 것이지.(1단계) 

다음은 어때? 사회적으로든 가정적으로든 다른 사람을 위해 살지. 좁게는 배우자나 자식을 위해, 크게는 나라와 사회를 위해……. 정년퇴직 정도까지가 되겠지, 좀 늘거나 줄 수 있겠지만. 이쯤 되면 자식도 다들 앞가림은 할 테고. 자기가 선택했을 수 있겠지만 하기 싫어도 해야 하는, 어쩔 수 없이 해야 되는 성격이 강하지.(2단계) 

다음은 뭘까? 자기자신을 위해 살아가는 것이지. 어느 누구도 아닌 자기자신을 위해 말이지. 그게 자연스러워, 억지스럽지 않지. 이쯤 되면 자기가 하고 싶어하는 일을 할 수 있어야겠지. 그리고 늙어서까지 다른 누구를 위해 또는 세상을 위하겠다 나서면 그게 욕심일 수도 있어. 다른 사람한테 방해일 수도 있고.(3단계)” 


지금은 이런 얘기를 아무렇지도 않게 고개를 끄덕이며 들을 수 있지만 2009년 2010년에는 아니었습니다. 머리에 찬 물을 뒤집어쓰는 충격이었습니다. 저렇게 여유롭게 생각할 수 있다니. 저런 여유로운 생각이 저런 자유로운 행보를 만드는구나. 


한겨레신문 사장을 마친 뒤 그에 훨씬 못 미치는 소기업발전소 소장을 하고, 그 소장을 하다가 경남도민일보에서 요청하니까 다시 급여 같은 조건 일절 따지지 않고 서울서 마산까지 내려오고. 그러다가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구나 싶으니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나고. 


더불어민주당 경남 인재 영입 1호 입당 출마 기자회견 장면.


그러고 나서 2011년 하반기에 창원대 사회적기업지원센터와 함께 ‘사회적 기업가학교 창업·입문 과정 아카데미’를 진행한 적이 있었습니다. 11월 12일 마지막 열두 번째 강의가 있었는데요, ‘사회적기업 창업 어떻게 할 것인가?’를 주제로 강의를 한 강사는 바로 서형수 사장이었습니다. 맡고 있던 자리는 이름도 낯선 성공회대 사회적기업가학교의 교장이었고요. 


생각이 여유로우니까 행동이 자유로운 것 같습니다. 또 이렇게 자유로우니까 능소능대할 수 있는 모양입니다. 이런 사람이 이번 20대 총선에서 경남 양산 선거구에 입후보했습니다. 자기가 태어나 자란 고향이랍니다.


선거구 획정이 아직 안되기는 했지만, 웅상 쪽에서 출마를 한다고 합니다. 더불어민주당 경남 인재 영입 1호라 하네요. 물론, 경남 인재라 하기는 좀 어렵겠고, '경남 출신 서울 인재'라 해야 좀더 정확하겠습니다.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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