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에서 본 세상

임진왜란 의병들께 큰절하던 베트남 사람

김훤주 2015. 12. 31. 1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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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활동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장면 


경남도민일보와 해딴에(문화사업을 전담하는 경남도민일보 자회사)는 올해도 여러 가지 활동을 벌였습니다. 고등학생들과 함께 ‘고장 사랑 지역 역사 탐방’과 ‘우리강지킴이 청소년 기자단’도 하고 지역아동센터 아이들과 더불어 ‘토요 동구밖 교실-역사탐방/생태체험’도 했습니다. 


어른들을 상대로 전국 명소를 찾아다니는 생태·역사기행도 진행을 했고, 경남에 머물고 있기는 하지만 경남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외국인 노동자들을 상대로 해서 ‘경남 체류 외국인 지역 풍물기행’도 맡아 했습니다. 


올 한 해 벌인 이런 활동이 모두 저마다 나름 보람도 있고 재미도 있었지만, 그 가운데 가장 뚜렷하게 기억에 남은 인상 깊었던 장면은 베트남 사람들과 의령으로 탐방 나갔을 때였습니다. 


의령이라 하면 대부분 사람들은 볼거리가 별로 없는 지역으로 여기지만 사실 그것은 잘 모르기 때문이지 실제로 그렇지는 않습니다. 이는 이날 베트남 사람들 나들이에서도 적실하게 확인이 됐습니다. 


이병철 생가 앞에서.


이병철 생가 안채에서.

10월 15일 의령을 찾았는데 먼저 삼성그룹 창업자 이병철 생가를 둘러본 다음 백산 안희제 선생(독립운동가) 생가~임진왜란 의병장 곽재우 장군 생가~의령천 잣나무 숲길~충익사~정암진 일대를 차례로 탐방했습니다. 


백산 안희제 선생 생가 안채에서.

백산 안희제 선생 생가 사랑채에서


하루 나들이하기에 딱 좋은 일정이었는데요, 이날 베트남 사람들 참 잘 놀더군요. 곽재우 장군이 의병을 모으기 위해 북을 걸었던 나무 현고수(懸鼓樹)나 곽재우 생가 앞 은행나무 같은 데서는 강강수월해 하듯 나무를 감싸고 돌면서 노래를 불렀고 너른 잔디밭을 만나면 퍼질러 앉거나 이런저런 모양을 만들면서 즐거워했습니다. 


의병장 망우당 곽재우 생가 앞 은행나무에서

곽재우 생가 안채 마당에서


더불어 제가 이런저런 설명을 곁들이면 그 또한 놓치지 않고 귀기울여 들을 줄도 알았습니다. 이렇게 즐겁게 지내다가 의령천을 따라 양쪽으로 잣나무가 늘어서 있는 둑길을 걷고 구름다리를 건넌 다음 충익사 일대에 다다랐습니다. 


여기는 나무가 좋습니다. 전시관도 있고 사당도 있는데 대부분 사람들은 잔디 깔린 뜰에서 시간을 보냅니다. 저는 간단하게 한 마디 했습니다. 동행한 베트남 사람 가운데 우리 말을 할 줄 아는 한 사람이 통역을 해줬습니다. 


충익사.


“우리나라도 베트남처럼 침략을 많이 받았습니다. 베트남은 중국 프랑스 미국의 침략을 받았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나라는 중국 몽골 일본 이렇게 침략을 당했습니다. 베트남이 프랑스 식민지였을 때 우리나라는 일본 식민지였습니다. 


일본은 앞서 500년 전에도 우리나라로 쳐들어온 적이 있습니다. 임진왜란이라고 하는데요, 마을은 불타고 나라는 엉망이 되고 백성들은 마음 붙일 데 없이 죽어나가고 임금은 도망가고 하는 난리가 났습니다. 


이렇게 세상이 어지러워져 있을 때 자기 한 몸 돌보지 않고 나라와 지역을 위해 목숨 걸고 일어나 맞서 싸운 사람들이 있습니다. 앞서 생가를 둘러봤던 곽재우 장군이 제일 대장이었고 그 아래 열일곱 장수가 있었습니다.


이들을 중심으로 많은 사람들이 모여 정암진 전투 등에서 일본군을 물리치고 나라를 지켰습니다. 이들을 의병이라 합니다. 곽재우는 의병 대장이었지요. 당시 나라 이름이 조선이었는데, 이런 의병들 덕분에 나라가 일곱 해 동안 난리를 겪었는데도 망하지 않고 결국에는 일본을 물리칠 수 있었습니다. 


지금 여기가 충익사인데요, 이런 의병들 장한 뜻을 기리면서 제사지내는 장소입니다. 1978년 12월 완공을 할 때 의령 곳곳에서 좋은 나무 멋진 나무 커다란 나무들을 골라 가져와 여기 뜰에다 심었습니다. 그래서 충익사 뜰이 아주 그럴 듯합니다. 


그러니까 너무 떠들지는 마시고요, 천천히 둘러보시면 되겠습니다.” 


정암철교. 충익사 들른 다음 이리로 옮겨갔습니다.


그러고 나서 저는 충의각 있는 데로 걸음을 옮겨갔습니다. 베트남 사람들 둘러보고 나오면 충의각에 대해 간단하게 설명해 주려고 말씀입니다. 대충 이렇게요. 


“만들어진 지는 100년 정도 됐습니다. 쇠못은 하나도 쓰지 않고 나무끼지 짜 맞춰서 세워놓은 건물입니다. 겉모습은 옛날 우리나라에서 사람이 죽으면 장사지내러 갈 때 널을 태워가는 상여를 본땄습니다. 


충익사에서 모시는 열여덟 대장 이름판이 안에 들어 있는데, 아마도 이 분들 죽고 나서 좋은 세상 가시라고 그런 모양입니다.” 


이렇게 말할 내용을 머리로 정리해 보면서 어슬렁거리고 있는데, 함께 온 베트남 여자 몇몇이 충익사 건물 앞으로 가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그래도 저는 심상하게 지켜보고만 있었습니다.



그런데 둘씩 짝지어 서더니 콘크리트 바닥에 무릎을 꿇고는 너부죽하게 큰절을 올리는 것이었습니다. 한 번만 하지 않고 두 번 거푸 큰절을 올렸습니다. 또 일어서서는 가까이 다가가 탁자에 놓인 향을 두어 가닥 집어 불을 붙이더니 향로에 꽂고는 손을 흔들어 향기가 퍼지게 했습니다. 



저는 깜짝 놀랐습니다. 여태까지 여기 의령 충익사를 자주 찾아왔었지만 저 또한 저렇게 절을 한 적이 없고, 우리나라 다른 사람들이 이렇게 충익사 열여덟 대장한테 큰절을 올리는 모습을 본 적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이들은 그렇게 했습니다. 누가 시키지 않았는데도 말씀입니다. 한둘도 아니고 대여섯이 큰절을 올리고 향까지 살랐습니다. 방명록에다 자기 이름을 적어넣은 다음 ‘고맙습니다’, 하고 소감까지 밝혔습니다. 


뭉클했습니다. 감동이었습니다. 그래 뒤늦게 뒤따라가 그이들 하는 모습을 사진찍었습니다. 표정도 보니까 장난이 아니었습니다. 사뭇 진지했습니다. 그이들한테 왜 이렇게 큰절을 하고 향을 불살라 바쳤는지 물어보지는 않았습니다. 


자기네 조국 베트남도 우리나라와 마찬가지로 같은 침략에 시달렸다는 데서 오는 동병상련(同病相憐)이었을까요? 아니면 곽재우 장군 등등이 그렇게 일본을 물리쳐준 덕분에 오늘날 자기네가 여기 와서 일하고 돈 벌 수 있게 됐다고 생각했기 때문일까요? 


모르겠습니다. 어쨌거나 그이들 감수성만큼은 대단하다 싶었습니다. 마음이 진정으로 움직이지 않고서는 그렇게 서슴없이 큰절을 하고 향을 사르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입니다. 2015년 마지막 날을 맞아 문득 떠오르는, 아주 인상 깊은 베트남 사람들의 큰절이었습니다. 


정암진에서


어쨌거나 돌아오는 버스에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러분들 여기 계시는 동안 아프거나 다치지 않기를 빕니다. 몸 성하게 여러분 나라로 돌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 우리가 생가를 둘러본 사람들 가운데 이병철은 대한민국에서 가장 많이 돈을 번 사람입니다. 


그리고 백산 안희제 선생도 이병철과 마찬가지로 자산가였습니다. 이병철이 돈을 가장 많이 번 사람이라면 안희제는 우리나라에서 돈을 가장 훌륭하게 쓴 사람입니다. 나라의 독립과 후세의 교육을 위해 아낌없이 가진 돈을 썼으니까요. 


여기 한국에 계시는 동안에는 돈 많이 버시고요, 베트남에 돌아가서는 더 많이 돈 벌고 또 훌륭하게 쓰시기 바랍니다. 고맙습니다.”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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