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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왕은 자신이 무슨 짓을 하는지 모른다

기록하는 사람 2016. 1. 4. 1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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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사 안에서 출판 업무를 맡고 있다 보니 오랜만에 소설 한 편을 읽게 되었다. ‘혜주’라는 조선시대 여왕의 이야기인데, 착하고 곱게 자란 공주가 왕위를 물려받은 후 희대의 폭군이 되어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이 소설에서 내가 주목한 것은 ‘악(惡)의 평범성’이었다. 폭군이나 독재자는 본래 성품이 포악해서가 아니라는 것이다. 지극히 선하고 평범한 사람이라도 막상 권력을 쥐고 보면 자신도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폭군으로 변모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소설이었다.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이란 개념은 독일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의 저작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정립된 것이다. 나치 치하에서 600만 명의 유대인을 강제수용소로 보내 학살을 지휘한 희대의 악마 아이히만은 우리가 상상하던 괴물이 아니었다. 오히려 아내를 사랑하고 자식을 끔찍이 아끼는 평범한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일말의 양심의 가책도 느끼지 않고 그 엄청난 학살을 저지를 수 있었던 것은 ‘아무 생각 없는 삶’ 때문이었다고 한다.



그런 아이히만과 함께 ‘점령지를 피로 물들인 도살자’, ‘유대인 절멸을 입안한 저승사자’라고 불리는 히틀러의 충복 하이드리히 또한 바이올린을 잘 다루는 음악도였고, 하루 일과를 마치면 늘 음악으로 피로를 풀었다고 한다.


민주주의와 인권에 대한 확고한 가치와 철학이 없는 사람이 권력을 잡으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 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다.


당장 시위에 참여한 칠순의 백남기 농민에게 물대포를 조준 직사한 경찰관 아저씨가 떠오른다. 그 또한 집에 가면 자상한 아빠이고 남편일 것이다. 그 사람뿐일까. 제주 강정마을에서, 밀양 송전탑 현장에서 절규하는 주민들을 끌어내고 폭력을 행사한 사람들도 자신이 무슨 짓을 하는지 자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의 공통점은 자신의 행위를 ‘국가가 하는 일’로 생각한다는 것이다. 백남기 농민이 45일이 넘도록 사경을 헤매고 있지만, 책임 있는 자리에 있는 현 정권의 누구 하나 병실을 찾은 이가 없다. 자신이 한 일도 아니고, 자신이 책임 질 일도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뉴스타파 화면 캡처. "저와는 관계없는 일입니다."


박근혜 대통령이 자신의 말 바꾸기나 공약 뒤집기, 각종 실정에 대한 국민의 비판여론에 오히려 화를 내며 복면금지법이나 테러방지법, 쉬운 해고법, 교과서 국정화에 몰두하는 것도 그걸 자신이 한다고 생각하지 않고 ‘국가가 하는 일’로 동일시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그동안 드러난 특유의 ‘유체이탈 화법’을 봐도 그럴 것이다.


여왕 혜주 또한 간관(諫官)의 상소를 불윤비답(不允批答)으로 무시하고, 괴소문이나 비판성 벽보 게시자를 색출해 극형에 처하는가 하면, 성균관 유생들의 농성을 강제 진압하는 등 폭정을 일삼다가 ‘조선왕조실록’에서도 지워지는 역사적인 수모를 당하게 된다. 그런 과정에서도 여왕은 자신이 하는 일이 폭정이고 학정이라는 사실을 전혀 자각하지 못한다.


나는 박 대통령이 후보 시절 몇 기자들과 함께 점심 식사를 함께 한 적이 있다. 그때 본 인상은 차분하고 조리 있는 말투를 쓰는 단아한 중년 여인이었다. 나는 왜 결혼을 하지 않았는지를 물었다. 그는 “아버지 어머니가 그렇게 돌아가지 않으셨다면 저도 결혼하여 평범한 삶을 꾸렸겠지요”라고 대답했다.


그의 말처럼 부모를 그렇게 잃고 혼자 사는 ‘영애(令愛)’의 모습이 안쓰러워 표를 찍은 사람도 적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 결과가 새로운 파시즘의 부활이라면 그 자신에게도, 그를 찍은 국민에게도 비극이 아닐 수 없다. 여왕 혜주에서 박 대통령의 미래가 어른거린다면 불경스런 생각일까.


※미디어오늘 '바심마당'에 칼럼으로 실린 글입니다.


혜주 - 10점
정빈 지음/피플파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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