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에서 본 세상

6월항쟁이 서울에서만 진행되었다면?

기록하는 사람 2015. 12. 13. 1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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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사람들에게 참으로 묘한 말버릇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서울 이외의 지역은 모두 ‘지방’이라 통칭하는 버릇이다. 부산에 출장을 가면서 ‘지방 출장 간다’ 하고, 창원에 와서 현지 사람과 함께 술을 마시던 중 전화가 걸려오면 ‘응, 지금 지방에 와 있어’라고 대답한다.


서울도 수많은 지역 중 하나일 뿐인데, 그들에겐 대한민국이 ‘서울+지방’으로만 보이는 걸까. 아니 서울이 곧 대한민국이고, 그 외에는 그냥 이름 없는 ‘부속 도서’ 쯤으로 여기는 건 아닐까. 그렇다면 정말 서운하다.


민중의 힘으로 대한민국 역사를 바꾼 사건은 모두 서울 이외의 지역에서 시작됐다. 1948년 제주 4·3항쟁부터 1960년 이승만 독재에 맞서 일어선 2·28 대구항쟁이 그랬고, 부정선거에 항거한 3·15 마산의거가 전국에 확산됨으로써 4·19혁명과 이승만 하야로 이어진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변화는 지방에서 시작되었다


박정희 정권의 종말을 부른 부마민주항쟁도 그러했고, 80년 광주의 통한을 바탕으로 전두환 군사독재를 종식하고 대통령 직선제를 쟁취한 6월민주항쟁도 전국 각 지역의 열정적인 투쟁이 없었다면 2008년 광화문 촛불시위처럼 사그라지고 말았을 것이다.


특히 87년 6월항쟁의 역사는 그동안 서울 중심 시각에서 기록된 게 많으므로 약간 설명이 필요하다. 서울과 전국 주요도시에서 6월 10일 대규모 시위가 벌어진 후 나흘간 계속되던 명동성당 농성이 14일 밤 해산되면서 15일부터 서울의 시위는 소강상태에 들어갔다.


이때 경남 진주에서 전국은 물론 세계를 놀라게 한 사건이 발생한다. 6·10대회는 마산을 경남의 거점으로 삼아 연합시위로 치렀지만, 이후 진주에서 독자적인 시위를 벌이던 시민과 대학생들이 15일 1만여 명에 이르는 대규모 시위를 벌여 시내 거리를 완전 장악해버렸다. 마산에 집결해 있던 경찰은 허를 찔린 격이 됐다. 급히 3개 중대를 진주로 급파했으나 진압은 역부족이었다. 그날 마산에서도 격렬한 시위가 있었음은 물론이다.


15일 진주 시위에 놀란 경찰은 16일 8개 중대를 증원해 무차별 폭력 진압에 나섰다. 이에 분노한 시민과 학생들은 파출소를 습격해 불태우는 등 민중항쟁의 양상을 보이기 시작했다.


17일 기어이 일이 터졌다. 시위대가 경전선 철도와 남해고속도로를 점거하고 LPG 운반트럭 2대를 탈취해 경찰과 대치하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워싱턴포스트 1987년 6월 18일자


이런 지역도시의 투쟁은 18일자 전국 주요언론은 물론이고 <워싱턴포스트>(WP)와 <타임> 등 외신에도 대서특필된다.


WP는 ‘S. Korea Protests Grow In Provincial Cities’(지방도시 시위 증폭)라는 제목을 뽑았고, 조선일보 1면 머리는 ‘남해고속도 3시간 장악’, 사회면 머리는 ‘지방시위 갈수록 격렬’이었다. 또 <타임>지는 인포그래픽으로 시위 발생 지역을 표시했는데, 진주·마산·부산·울산·포항·대구·목포·광주·전주·군산·대전·청주·수원·원주·춘천·인천·서울에 선명한 폭발 이미지를 그려 넣었다.


이런 지역의 투쟁으로 6월항쟁은 다시 고양되었고 6·26대행진으로 최고조에 이를 수 있었던 것이다.

타임지 6월 18일자. 한국의 시위.


그래서 신영복 선생도 ‘변화와 창조는 중심부가 아닌 변방에서 이루어진다’고 하지 않았던가. 굳이 이런 이야기를 하는 까닭은 요즘 집회와 시위는 모두 서울, 그 중에서도 광화문으로만 집중되고 있어서다. 그럴 때면 경찰도 모두 서울로 가버려 그 외 지역은 치안공백 상태가 된다. 2008년 촛불시위 이후 서울 집중 현상은 더 두드러졌다. 예전에도 ‘상경투쟁’은 있었지만 요즘만큼은 아니었다. 교통이 좋아져서일까. 시위에도 서울 빨대효과가 작용해서일까.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다.


하지만 혹시라도 이를 기획하고 주최하는 사람들이 보기에 서울이 곧 대한민국이고, 서울에서 대규모 시위만 벌이면 대한민국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 아닌지 걱정스럽다.


※미디어오늘 12월 2일자 [바심마당] 코너에 기고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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