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형 작가/조현오의 구겨진 제복

20화. 조현오가 쌍용자동차 진압작전 밀어부친 까닭

기록하는 사람 2015. 11. 10. 15: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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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러진 화살》(후마니타스)의 작가 서형이 이번엔 조현오를 만났다. '노무현 전 대통령 차명계좌 허위발언'으로 8개월 징역을 살고 나온 바로 그 조현오 전 경찰청장이다.


서형 작가는 사법피해자 취재를 전문으로 해왔다. 취재 중 조현오 전 청장의 다른 면에 대해 듣게 되었고, 그의 진면목을 취재해보고 싶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미 '조현오'라는 이름 석자는 차명계좌 발언 하나만으로 많은 국민들에게 '공공의 적'이 되어 있는 사람. 이명박 정부의 경찰청장이었다는 것으로도 다른 쪽 진영에선 공적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일까. 몇몇 매체에 연재를 타진해보았으나 모두 난감한 기색으로 거절했다. 그러나 블로그 '지역에서 본 세상'은 그런 세간의 시선에 개의치 않기로 했다. 글에 대한 판단과 평가는 오로지 독자의 몫이니까. 근거없는 비난이나 명예훼손에 해당하는 글만 아니라면 이 블로그는 글쓰는 모든 이에게 열려 있다. [편집자 김주완]



[구겨진 제복]20화. 쌍용자동차 진압 작전


조현오는 경찰청장에서 물러난 지 4개월이 지난 시점에 국회 통지를 받는다. 2012년 9월 20일 국회 환경노동위원회는 조현오를 쌍용자동차 청문회 증인으로 지목한다. 주변에서는 출석하지 말라며 만류했다. 말린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2년 전인 2009년 4월 8일 쌍용자동차 사측은 2646명을 구조조정하는 안을 발표했다. 사측은 희망퇴직서를 내지 않은 976명을 정리해고한다. 이 가운데 600여 명이 옥쇄파업에 참가한다.


2009년 8월 6일 파업 77일 만에 쌍용차 노사는 '쌍용자동차 회생을 위한 노사 합의서'를 내놓으며 극적으로 합의한다. 정리해고자 절반을 무급휴직자로 하되 1년이 지나면 생산 물량에 따라 순환근무하게 한다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이후 회사는 휴직자에게 연락하지 않았다. 구조조정 이후 자살한 노동자와 가족 수가 22명이었다. 이 같은 노사합의 이행 과정을 확인하는 것은 고용노동부 일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조현오가 증인으로 출석하면 모든 책임을 뒤집어쓸 게 뻔하다는 게 주변 걱정이었다. 쌍용자동차 사태를 다루는 언론 논조도 달라졌다. 그동안 쌍용자동차 진압 작전을 '과잉진압 논란'으로 다뤘던 언론도 '과잉진압'으로 정리하기 시작했다. MBC <PD수첩> 898회 방송도 마찬가지였다.



청문회는 예상대로 조현오에게 모든 책임을 묻는 분위기로 흘러갔다. 조현오를 향해 사망한 쌍용차 노동자와 가족들에게 사죄하라는 요구가 쏟아졌다. 정신과 박사인 정혜신은 방송과 청문회 등에서 쌍용차 희생자 발생 원인 가운데 하나로 경찰특공대 진압을 꼽았다. 당시 하늘에서는 헬기가 최루액을 쏟아부었다. 경찰이 언제 들이닥칠지 모를 긴장되는 상황이 반복됐다.


지금은 은퇴했지만 당시 쌍용자동차 사건에 투입된 정보과 형사에게 물었다. 옥상에서 저항하는 노동자를 움츠러들게 할 방법이 최루액 투하밖에 없었을까. 그는 이렇게 답했다.


"대화가 가장 중요하지요. 경찰은 어떻게든 대화로 풀려고 노력했어요."


경찰 역할은 사회 안정이다. 경찰은 사회에 영향을 미치는 노사 갈등을 주시할 수밖에 없다. 지역에 오래 근무한 경찰은 노동자와 서로 잘 아는 사이기도 하다.


1986년 출범한 쌍용차는 1998년 대우그룹이 인수했지만 대우그룹이 몰락하면서 1999년 함께 워크아웃됐다. 쌍용자동차 주인이 바뀌는 시점에 노사 갈등은 증폭됐다. 2004년 중국 상하이차가 쌍용자동차를 사들이자 노조는 이에 반발하며 부분·전면 파업을 했다. 쌍용자동차 경영이 나아질 기미가 없던 2008년 말에는 대주주인 상하이차가 '먹튀' 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감돌았다.


쌍용자동차 노조는 12월 5일 한상균을 10대 지부장으로 선출한다. 정보과는 '정리해고 박살'을 구호로 걸고 지부장이 된 한상균을 평소 조용하고 온순한 성격으로 판단했다.


2009년 1월 9일 상하이차는 인수 4년 만에 서울중앙지방법원에 법정관리신청을 하며 경영권을 포기한다. 2월 6일 기업회생절차가 시작되면서 사측은 핵심 정책으로 구조조정을 밀어붙인다. 곧 정리해고자가 발표됐다. 부분파업을 벌이던 쌍용자동차 노조는 5월 22일부터 옥쇄파업을 시작했다. 이후 약 두 달 동안 정보과 형사가 조현오에게 받은 지시는 다음과 같았다.


"어떻게 해서라도 대화를 붙여서 빨리 해결하는 것이 최상이다."


노사 견해차는 너무 컸다. 정리해고 통보와 옥쇄파업이 맞섰고 사측은 대화 의지가 부족했다. 6월 26일과 27일 이틀 동안 직원 3000여 명이 회사를 가동하겠다며 사내 진입을 시도했다. 그러면서 공장 안에 있던 농성 노동자와 물리적으로 충돌했다. 경기지방경찰청은 경찰력 6개 부대를 투입해 폭력사태가 발생하지 않도록 노사 양측을 갈라놓았다. 당일 MBC 뉴스 보도는 이렇다.


“경찰은 27개 중대 2000여 명의 병력을 배치하고 헬기까지 띄워 감시하고 있지만, 쌍용차 직원들 간 격한 충돌에도 개입하지 않고 주변 통제만 하고 있습니다.”


사측은 경기지방경찰청에 방문해 "우리 회사에 왜 못 들어가게 하느냐"며 항의하면서 공장 진압을 재촉했다. 조현오는 공장 외곽에 경찰을 배치해 사측은 물론 그 누구도 공장을 출입할 수 없게 했다. 사측도 가만히 있지는 않았다. 사측은 네트워크를 동원해 공권력이 뒷짐을 지고 있다며 경기지방경찰청을 압박했다. 조현오도 물러서지 않았다. '제2의 용산사태'를 언급하며 버텼다.



실제로 평택 쌍용자동차 도장 2공장 믹싱룸에는 인화물질이 가득했다. 자칫 폭발이라도 일으키면 대참사를 각오해야 했다.


정보과 형사들은 물밑에서 해고 노동자와 접촉했다. 정보과 형사는 당시 해고노동자에게 최루액 때문에 고통이라는 말을 듣지 않았다고 했다. 노동자에게 가장 큰 관심은 '협상'이었다. 정보과 형사들은 노조 입장을 회사에 전했다. 성의를 보이지 않는 사측을 압박하고 대화장으로 끌어냈다. 다음은 경찰이 주선한 교섭일지다. 이 모든 사항은 조현오 지시로 이뤄졌다.


- 5월 28일 : 경기청 정보분실장이 쌍용차노조 한상균 지부장을 접촉하여 대화하는 과정에서 노조 측은 기존의 ‘총고용보장’ 입장에서 한발 물러서 무급휴직안 등 다양한 의견을 갖고 있다며 사측이 협상에 나서줄 것을 촉구


- 6월 15일 : 경기청 정보계장과 담당정보관이 사측 박영태 사장과 노조 한상균 지부장을 쌍용차 본관 1층에서 접촉. 6월 17일 박영태 사장과 한상균 지부장이 단독 협상으로 해결책을 모색하도록 주선.


- 7월 8일 : 경기청 정보계장과 정보관 1명이 공장 내 노조사무실을 방문. 노조사무실에서 한상균 지부장을 접촉. 기존 ‘총고용 보장’ 주장에서 한발 물러나 현실성 있는 대화를 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냈으나 회사 측이 교섭 주선 거부.


- 7월 중순부터는 경찰중재로 물밑 교섭을 진행하였으나 노조가 기존 입장을 철회하지 않음.


조현오도 직접 사측에 안을 제시했다. 정보계장을 통해 노조에도 의견을 전했다. 조현오 제안은 '독일식 일자리 나누기'였다. 각자 월급을 줄여 모두 껴안고 가자는 것이다. 노사는 모두 조현오 제안을 거절했다고 했다. 사측은 생산효율성을 들어 반대했다. 해고 대상자가 아닌 노동자는 월급이 깎이는 것을 반기지 않았다. 해고 노동자는 완전고용을 주장했다.


조현오는 2012년 7월 8일 <한국일보>와 인터뷰에서 "노사 양측을 중재하면서 잡셰어링으로 접근했는데 양쪽 다 씨도 안 먹혔다"고 말했다.


7월 30일부터 8월 2일까지 교섭이 이어졌다. 사측은 정리해고자 가운데 40%만 구제하겠다는 안을 제시한다. 노조는 이 제안도 거부한다. 8월 2일 협상이 결렬되자 정보과 형사는 눈앞이 깜깜해졌다고 했다.



그런데 이날 상황에 대한 노조 측 증언이 다르다. 2012년 9월 20일 청문회 증인으로 나온 한상균 지부장 말이다.


“우리 조합원이 모두 아는 상태에서 8월 1일 자 교섭을 정말 끝장 교섭이라고 하면서 진행했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거기에 실질적으로 정리해고를 회피할 방법들에 대해서 근접했던, 그야말로 그래서 우리 모두 정말 아픔이 있었지만 원만히 합의점을 찾을 수 있겠다는 기대가 좀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어디인지는 모르나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서 그것들이 어느 순간 깡그리 무시되는 그런 과정이 있었습니다.”


“공권력 투입만 없었다면 노사간 타협이 됐을 것”이라는 한상균 지부장 주장에 대해서 조현오는 “그것은 거짓말”이라고 강하게 받아쳤다.


반면 정보과 형사는 “지부장이기에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당시 한상균 지부장의 고뇌를 잘 알고 있었다. 쌍용자동차는 1차 협력업체 255개, 2·3차 협력업체 1900여 개로 딸린 노동자만 약 10만여 명이었다. 만약 파업이 이어지면 협력업체 수만 명이 길거리로 내몰리는 상황을 피할 수 없었다. 그러나 강경파들은 ‘완전 고용’을 주장할 수밖에 없었다. 정리해고를 받아들인다면 자신이 그 대상일 것은 자명했다. 당시 정보과는 강경파는 한상균 지부장 통제에서 벗어났음을 보고했다.


경찰은 합의점을 찾으려면 공권력으로 압박하여 강경파 입지를 좁히는 수밖에 없다고 판단했다. ‘도장 공장 폭파위협’ 강경파 움직임도 정보보고로 올라왔다. 게다가 쌍용자동차 협력업체가 하나씩 부도처리 되고, 법정관리에 들어가는 상황에서 공권력 행사를 마냥 미룰 수만은 없었다.


경찰은 8월 4일 작전을 시작했다. 12개 부대와 특공대 4개 대대를 동원해 폐수처리장 옥상을 장악했다. 5일 새벽이 되자 서울 등 타지역 부대가 속속 도착했다. 그런데 변수가 발생했다. 작전 직전에 경찰청장인 강희락이 “위험하니까 작전하지 마라”고 지시했다. 이미 인력과 장비를 모두 갖춘 상태였다. 충분히 작전 가능하다는 현장 판단이 있었다. 조현오는 청와대를 설득했다. 그리고 강희락에게 다시 작전지시를 받는다.


그런데 지방경찰청장이 경찰청장 지시를 무시한 것은 항명이라는 비난이 쏟아졌다.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청문회에서 의원인 심상정은 “이게 어느 나라 위계질서냐”며 “강희락 경찰청장이 투입하지 말라고 했는데 조현오 청장이 찍어 눌러서 1시간 만에 지시를 번복하게 한 것 아니냐”고 질책했다. 조현오는 이 대목에 대해서는 여전히 확고했다. 망설임 없이 이렇게 말했다.


“그런 논리라면 부당한 지시는 언제나 따라야 하느냐? 공무원 세계에서는 상사 지시가 부당하다고 생각되면 바로 그 상급자에게 이의신청이란 것을 할 수가 있다.”


8월 5일 경찰은 도장2공장을 제외하고 모두 장악했다. 당시 정보과 형사들은 노동자와 접촉할 때마다 경찰이 인화물질이 가장 많은 도장2공장 안에 들어오는 일은 없다는 말을 전하도록 했다. 그리고 사태가 벌어지면 어느 문으로 나가면 된다는 말도 전했다. 8월 5일 조현오는 6일까지 나오면 선처하겠다는 기자회견을 했다. 물리적, 심리적 압박에 못 이겨 노조는 8월 6일 사측과 합의했다.


조현오는 이듬해 서울지방경찰청장으로 영전했다. 그리고 2010년 8월 23일 경찰청장 인사청문회에서 “2009년 쌍용차 사태 해결로 10만여 명의 생존권을 지켜내고 국가경제의 피해를 최소화시킨 데 많은 보람을 느낀다”고 말했다. 실제로 쌍용차 진압작전이 끝나고 나서 수많은 사람이 전화로 찬사를 보냈다. 조현오는 칭찬에는 여야가 따로 없었다고 했다.


하지만 쌍용자동차 진압 작전에 담긴 사회적 의미는 변할 수밖에 없었다. 2009년 쌍용자동차 진압으로 모든 완성차 업체 임금은 한 번에 동결됐다. 완성차 업체 노동자들은 파업을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금속노조 전체 판은 그렇게 정리되기 시작했다.


2009년 10월 창원 대림자동차 노조가 무너졌다. 2010년 2월 경주에 있는 발레오만도 노조도 와해했다. 발레오만도는 직원 923명 중 621명이 조합원이었고 비정규직이 없다는 게 자랑이었던 업체였다. 그런데 취임 때부터 위기감을 조장하던 새 대표이사는 느닷없이 직장폐쇄를 강행했다. 노동조합 사무실도 용역을 투입해 출입을 막았다. 경주지역 금속노조는 연대파업을 벌였으나 노조 핵심 간부들은 바로 구속됐다.


2010년 6월 구미 KEC 여성 기숙사에 용역이 투입된다. 경주 발레오만도에 투입됐던 그 용역이었다. 그해 8월 대구 상신브레이크, 2011년 3월 광주 금호타이어까지 노동조합 파괴는 이어진다. 경찰과 검찰은 물론 노동부도 뒷짐을 지고 모른 척했다. 그리고 2개월 뒤인 5월 충남 아산에 있는 유성기업 차례가 됐다. 2012년 7월에는 안산 SJM 노조 농성장에 용역 깡패들이 들어왔다. SBS <그것이 알고 싶다> 프로그램은 ‘야만의 새벽’이라는 제목으로 이 내용을 보도했다.



같은 달 퇴직한 조현오는 <도전과 혁신>이란 제목으로 출판기념회를 한다. 서울 광화문에 있는 세종문화회관 1층이었다. 책에서 조현오는 여전히 업적 중 하나로 쌍용차 진압작전을 내세웠다. 출판기념회 현장은 문전성시를 이뤘고 화환이 가득했다. ‘부산고등학교’ 동문이 보낸 화환과 MB 정부 시절 또 다른 공적이었던 어청수가 보낸 화환이 눈에 띄었다. 필자는 잠시 둘러보고는 서울시청까지 걸어갔다.


서울시청 근처 덕수궁 앞에는 쌍용차 해고노동자들이 설치한 시위 천막이 눈에 띄었다. 쌍용차 희생자 추모와 더불어 정리해고 문제를 외치고 있었다. 길가에 주차한 경찰버스가 그 앞을 가렸다. 그날 밤 SNS에는 눈 한쪽이 멍든 조현오가 표지인 책 <도전과 혁신> 사진이 욕설과 함께 빠르게 전파되고 있었다.


조현오는 국가와 국민을 위해 경찰생활을 했다고 한다. 그런데 그는 왜 늘 국민과 부딪힐까? 연재 시작에 밝혔듯이 그와 공감할 수 있는 지점을 찾아보고자 한다. 이제부터 나오는 이야기는 <도전과 혁신> 책에는 없는 내용이다.


조현오는 1955년생이다. 전쟁 중에 몸을 다친 군인을 ‘상이군인’이라고 한다. 전쟁 후 상이군인은 국가 지원을 받지 못했다. 그러자 몇몇은 일반 서민에게 돈을 달라며 행패를 부리곤 했다. 조현오 부모 가게에도 상이군인이 찾아와 물건을 걷어차며 행패를 부렸다고 했다. 그때는 조현오가 3살이 채 안 됐는데 말을 막 배우기 시작할 때였다. 조현오는 상이군인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이렇게 말했다.


“사지군인 씨팔, 자지야, 보지야.”



그러자 어머니는 막내아들 입을 황급히 틀어막고 방문을 닫았다. 60년대는 모두 가난했다. 조현오는 형편 때문에 공장에서 일하다가 2년 늦게 중학교에 입학을 했다. 돈이 없어 산을 넘어 집에서 학교까지 걸어다녔다.


1969년에 개봉한 <천년호>를 단체관람했다. 하얀 소복을 입고 긴 머리를 풀어헤친 여자 귀신이 날아다녔다. 영화가 끝나 집으로 갈 때는 이미 밤늦은 시각이었다. 인적 없는 산길 숲 속에는 영화처럼 연못도 있었고 달빛도 비쳤다. 그리고 바람이 불었다. 그런데 저 멀리 진짜 머리를 풀어헤치고 흰 옷을 입은 천년호가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중학생 조현오는 도망가지 않았다. 대신 천년호를 죽이겠다는 결심을 했다. 그는 한 손에 돌을 들었다. 그리고 천년호에게 다가갔다. 그런데 그가 본 것은 바람 때문에 나뭇가지에 칭칭 감겨 도는 비닐이었다.


조현오는 무인 기질이 있다. 그런데 여기에 어머니 교육까지 더해졌다. 어머니는 조현오가 어릴 적부터 “남자는 용맹이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 어려운 시절 조현오 모친은 배급을 받으려 줄을 설 때 새치기하는 것을 몹시 싫어했다. 조현오가 어머니에게 물려받은 가장 큰 유산은 ‘정직’이었다.


2009년 쌍용자동차 진압 작전이 훌륭했다며 여야를 가리지 않고 칭찬을 받았는데, 사회적 상황이 변했다고 잘못이 되는 것을 조현오는 이해할 수 없었다. 청문회 불참으로 ‘불똥’을 피할 수도 있다. 그러나 조현오는 천년호도 피하지 않던 청소년이었다.


조현오는 고 노무현 대통령 차명계좌 발언 건으로 문재인 등에게 고소를 당했다. 당시 문재인은 고소취하 조건으로 ‘헛소리’라는 것을 인정하라고 했다. 단순한 조현오는 사태를 크게 만들었다. 막강한 정보력을 갖춘 임경묵에게 들은 이야기를 ‘헛소리’라고 볼 수는 없다 판단한 것이다. 조현오는 결국 사자 명예훼손 건으로 기소됐고 재판부는 조현오가 지어내서 한 말이라고 판단했다. 세상은 조현오를 거짓말쟁이라고 비난했다.


거짓말을 가장 싫어했던 조현오는 거짓말쟁이로 전락한 상황이 몹시 고통스러웠다. 그뿐만이 아니다. 2015년 5월 건설업자 정모 씨에게 5000만 원 뇌물을 받았다는 의혹이 일었고 이제 재판을 앞두고 있다. 이제는 그를 버티게 했던 ‘청렴’이라는 한 축마저 무너질 판이다.



그럼에도 그는 울지 않았다. 조현오는 눈물이 지닌 의미를 ‘굴복’과 ‘나약함’이라고 답하곤 했다. 한참 있다가 우는 것을 싫어하지만 울어본 적은 있다고 덧붙였다. 그때가 언제였는지 물었다. 조현오가 기억을 더듬기 시작했다.


“첫사랑 차였을 때. 자기는 학교 못 가고, 나는 좋은 데 가니까 여자가 안 만난다고.”

“영화 ‘닥터 지바고’ 마지막 장면에서.”

“내 첫 경찰 보직인, 금정경찰서 생활안전과장 시절에 직원들과 너무 정이 들어서 헤어질 때.”


경찰서 이야기가 나오자 다시 경찰 이야기로 돌아갔다. ‘치안상황’으로 주제가 옮겨갔다. 요즘 사람들은 상이군인이 행패를 부리던 상황을 모르는 것은 당연하겠지만 ‘범죄와의 전쟁’이 벌어지던 1990년대 시절도 잊어버린 것 같다고 했다. 불과 20년 전 상황인데도 말이다. 한국 치안이 매우 안정된 편인 것은 경찰 노력 덕이라고 했다. 아래처럼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그런 경찰 후배들을 위해서 ‘전과자’가 되지 말았어야 했는데….”


출세욕을 위해 산 것처럼 보이는 그는 ‘나는 지휘관으로서 상황마다 판단을 잘해야 한다’는 다짐을 거듭했다고 했다. 조현오가 이런 생각을 한 계기 중 하나는 쌍용자동차 진압작전이었다.


쌍용자동차 평택공장 터는 23만여 평이다. 8월 4~5일 진압작전을 개시할 때 그는 헬기에서 전반적인 상황을 파악했다. 도장1공장과 조립공장 옥상을 확보하는 과정에서는 동시다발적으로 작전을 전개했다. 조현오는 상공에서 무전으로 작전에 동원된 모든 부대를 지휘했다. 조현오는 아래 이야기를 하면서 몇 번이나 목이 메곤 했다.


“헬기 위에서 내 명령 하나에 위험한 작전구역으로 들어가는 경찰대원들을 봤을 때….” 


(끝)

서형작가  연락처 seohyung224@gmail.com  /블로그 4days.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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