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별 의미없는 것

엄마 따라 여탕에 들어갔던 기억

김훤주 2015. 10. 3. 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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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명절 치레가 많았던 시절 


추석 이틀 전인 9월 25일 경남 창녕 부곡온천에 가서 ‘추석 치레’로 목욕을 했습니다. 제가 어릴 적에는 이런 ‘치레’가 많았습니다. 가난이 넘치고 모자람이 많았던 때문이겠습니다. 


옷도 설과 추석에 치레로 장만했습니다. 평소 임의롭게 사기는 어려웠기 때문이었고, 또 한편으로는 평소 입는 옷은 그야말로 남루해서 설이나 추석 때 입고 나가기 민망할 정도였기 때문일 테지요. 신발 장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당연히 머리 깎는 이발도 명절 치레였고 목욕 또한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치레로 때 밀러 간 공중목욕탕이 참으로 썰렁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저를 포함해 예닐곱이었습니다. 25일이 금요일 평일이고 제가 있었던 때가 오전임을 감안한다 해도 무척 적은 숫자였습니다. 


요즘은 사람들이 목욕을 ‘명절 치레’로 하지 않는다는 것을, 전혀 새삼스럽지도 않게 실감을 했습니다. 그러고 보니 저 또한 설 치레 추석 치레로 공중목욕탕에 간 기억이 30년 안쪽으로는 없더군요. 


2. 목욕탕에서 마주친 같은 반 여자아이 


어쨌거나 목욕을 마치고 옷장 있는 데로 나와 마른 수건으로 물기를 몸에서 훔치는데, 그야말로 뜬금없이 국민학교 3학년 때 목욕탕 풍경이 떠올랐습니다. 엄마 따라 여탕에 갔었는데, 전에도 엄마 따라 여탕에 간 적이 통 없지는 않았지만, 그날따라 별나게 국민학교 같은 반 여자애랑 마주친 것입니다. 



지금 그 친구 이름은 기억이 나지 않지만, 그 친구 표정은 기억에 뚜렷합니다. 저를 바라보는 눈길이 좀 놀란 듯한 것이었고요(그런데 저는 저 친구가 왜 저러나, 속으로 생각을 했었습니다), 또 똑바로가 아니라 비켜선 듯이 지긋하게 꽤 오랫동안 쳐다봤다고 기억돼 있습니다. 눈이 좀 큰 편이었지요. 


저는 엄마 등살에 밀려 탕 안에 들어가 살갗이 벌겋게 되도록 있다가 나와서 엄마 손길을 따라 이쪽저쪽 ‘이태리타올’로 때밀이를 당해서 살갗이 벌겋게 돼 있었을 것입니다. 어쩌면 세포 돌기가 좀 상해서 피가 나기 직전인 상태로 통째 빨갛게 돼 있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 가운데 목욕탕 안은 온통 뿌옇게 수증기가 피어올라 사람 분간이 그렇게 쉽지는 않았는데, 그 여자애 얼굴은 어째서 제게 그렇게 뚜렷하게 기억에 남아 있는지 그 까닭은 잘 알지 못하겠습니다. 


아마도 그 뒤로는 제가 엄마가 억지로 가자 해도 여탕 ‘출입’을 삼갔지 싶은데요, 지금 생각하면 그 여자애 지긋한 눈길의 ‘이건 아니잖아’ 그 뜻하는 바를, 뚜렷한 지각(知覺)으로는 아니지만 어렴풋한 눈치로는 알아차리지 않았나 싶기는 합니다. 


달리 말하자면 그 때 저는 남자가 아닌 아이였는데, 여탕에서 같은 반 여자애랑 만나지고나서부터는 같은 아이라도 남자가 다르고 여자가 또 다르구나 하는 생각이 제게 희미하게나마 생기지 않았나 싶습니다. 


3. 누가바 열여섯 개를 살 수 있었던 목욕비 


어쨌거나, 제가 국민학교 3학년일 어름에는 목욕비가 800원이었다고 기억돼 있습니다. 어떻게 기억하느냐면, 엄마가 저를 목욕탕 아닌 집에서 목욕 시킬 때, 가슴짝을 밀고 등짝을 밀고 다 씻기고 나서 방에 들어가 옷 갈아입어라 이럴 때 엉덩짝을 툭 두드리면서 “아따, 오늘 800원 벌었다!” 이러시는 얘기를 들은 기억이 가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좀 외설적인가요? 하하.


추운 겨울에는 그것도 두 달에 한 번 꼴로 목욕탕 신세를 졌지만, 좀 따뜻해진다 싶으면 그 때부터는 거의 언제나 집에서 빨간 ‘다라이’에 뜨거운 물을 받아서 목욕을 했었습니다. 추울 때도 적지 않게 집에서 목욕을 했는데요, 참 추웠다는 기억이 아직도 있습니다.(엄마는 또 얼마나 추웠을까요!!!)


그 때 800원은 작은 돈이 아니었습니다. 이듬해 제가 국민학교 4학년인 1973년에 해태제과에서 누가바가 처음 나온 줄로 아는데요, 그 때 그것 하나에 50원을 했습니다. 그 때 새로 나온 해태제과 롯데제과의 아이스크림은 읍내 얼음집에서 팔던 아이스케키와는 비교조차 되지 않는 맛이었습니다.


당시 목욕 한 번 가는 돈으로 그러니까 그렇게 멋지고 맞나는 누가바를 열여섯 개씩이나 살 수 있었는데요, 지금 누가바가 얼마인지는 잘 모르지만, 한 차례 목욕비로 열여섯 개를 먹을 수는 없지 않을까 생각이 듭니다. 


4. 우리는 왜 목욕을 싫어했을까? 


그렇습니다. 우리는 그 때 공중목욕탕에서 목욕을 하는 일은 설이나 명절이 아니면 누리기 어려운 호사였습니다. 그렇다고 어린 우리가 그런 호사를 좋아했느냐 하면 꼭 그렇지는 않았습니다. 우리는 목욕 자체를 싫어했습니다. 


아마 자유롭게 우리가 하고 싶은대로 하면서 목욕을 할 수 있었다면, 때를 밀 수 있었다면 조금은 달랐겠습니다. 우리는 목욕탕도 싫었고 목욕도 싫었습니다. 어떻게 해서든 피하고 싶은 고역이 바로 목욕이고 목욕탕 출입이었습니다.



지금은 같은 목욕탕이라 해도  보기 어려운, 뿌옇게 피어올라 사람조차 잘 보이지 않게 만드는 김(=수증기)가 싫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무엇이든 어렴풋하게 보일 때 호기심도 자극이 되고 궁금증도 커지는 법이어서 그랬던 모양입니다. 


그러나 뜨거운 탕에 들어가 오래 앉아 있어야 하는 것은 고역이었습니다. 그것도 한두 번이 아니고 틈만 나면 되풀이해야 하는 고역이었습니다. 저는 기억에 갈 때마다 머리가 어질어질했었고요, 어떤 때는 그렇게 들어가 있던 끝에 너무너무 역겨워져서 구토를 한 적도 있었습니다. 


엄마는 우리한테 그렇게 시켰습니다. 그래야 때가 잘 불어 일어나고 그래야 목욕비 안 아깝다 하면서 막무가내였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이태리타올’이 제 손에는 잘 올라붙지 않았지만 엄마손에는 그야말로 착 달라붙었습니다. 


엄마의 이태리타올은 제 등짝 가슴짝 볼기짝은 물론 겨드랑이와 사타구니까지 샅샅이 낱낱이 훑었습니다. 그러면 이미 뜨거운 물에 벌겋게 달아올라 있던 제 살결은 빨갛게 바뀌어 갔습니다. 아주 따가웠습니다. 


그 때 목욕탕에서는 반드시 아이 울음소리가 쨍쨍하게 울려퍼졌습니다. 그렇게 울어대는 아이 등짝이나 볼기짝을 엄마들이 손바닥으로 후려치는 소리 또한 쨍쨍하게 울려퍼졌습니다. 그러면 아이 울음소리는 한 옥타브 더 높아졌습니다. 물론 저는 그 때 이미 그렇게 울기에는 너무 커버린 아이였고요. 


5. 언제나 붐볐던 공중목욕탕 


제 기억으로는, 목욕탕은 언제나 붐볐습니다. 설 추석 같은 명절이 아니라도 늘 그랬습니다. 앉을 자리조차 없을 때가 많았고요, 이른바 탕 안에는 뜨거운 물에 몸을 불리려는 사람들이 빼곡하게 들어차 머리만 내놓고 있었습니다. 


탕 바깥에도 사람들이 곳곳에 자리잡고서는(말하자면 거울이 없는 자리에도) 다른 데는 여념 없이 때 미는 데 몰두해 있었습니다. 이런 가운데 앞에 말씀드린 것처럼 아이들이 곳곳에서 빽빽 꽥꽥 울어대었으니, 그야말로 더없이 소란스러운 데가 바로 공중목욕탕이었습니다. 



물론 목욕탕이 가장 붐비는 때는 바로 명절 밑이었지요. 지금 생각하면 과연 그 때 그런 것이 어떻게 가능했을까, 신기할 정도였는데요, 이를테면 옷장이 마흔 개 쉰 개 있었다면 그것은 이미 꽉 다 들어차 있었고 임시 옷 그릇도 남아나지 않았습니다.


평소에는 옷장 위에 올라져 있었던, 그리고 지금은 공중목욕탕에서 한 번 쓴 수건 정도나 담아두는 플라스틱 그런 임시 옷 그릇이 서른 개든 마흔 개든 가득차 있었습니다. 때를 다 밀고 나왔을 때 자기 옷이 담겨 있는 통이 어디 있는지 찾는 데 적지 않은 시간이 걸릴 정도였으니까요. 


어쨌거나 그렇게 해서 목욕탕을 나서면, 손바닥은 물에 불어서 더없이 쪼글쪼글했고, 열에 들뜬 얼굴 또한 발갛게 달아올라 있었습니다. 그런 제 모습을 바라보는 엄마 얼굴에는 만족스러워하는 웃음이 가볍게 떠올랐고요. 제 눈에 비친 엄마 모습 또한, 발갛게 달아올라 있었더랬지요. 


몸에서 물기가 빠져나가 목이 말랐지만, 엄마한테 마실거리 뭐 좀 사달라는 말은 아예 할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었지요. 800원씩이나 하는 목욕비가 어린 아이들한테는 물론 어른한테도 적은 액수가 아니었으니까요. 집에 와서 숭늉 들이키는 것이 최선이었습니다.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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