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에서 본 세상

나라사랑 청소년 역사문화탐방 ②

김훤주 2015. 3. 18. 1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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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청

단성향교~단속사지~남사마을~남명조식유적지(산천재·덕천서원)~구형왕릉·덕양전

 

구형왕릉은 역사적 상상력을 한 뼘 더 키울 수 있는 장소입니다. 김해 가락국 마지막 임금 구형왕이 신라에 나라를 바친 뒤 여기 산청 지리산 자락에서 살다가 무덤을 남겼다는 얘기입니다.

 

무덤도 예사롭지 않습니다. 한반도에 유례가 없는 적석총, 돌을 쌓아 만든 무덤이랍니다. 구형왕은 여기서 고토회복을 위한 항쟁을 준비했을까요, 아니면 그냥 아무 뜻없이 목숨 부지만 했을까요.

 

단속사(斷俗寺)는 동·서삼층석탑과 당간지주로 남았습니다. 남향으로 두 갈래 개울이 흐르는 사이 도도록하게 솟은 자리인데요, 골이 넓어 온종일 햇살이 고루 비친답니다. 고려 무신정권 시절 두 번째로 실력자가 됐던 최우는 아들 만종을 단속사 주지로 삼았습니다.

 

단속사지 동서삼층석탑.

 

이 때 단속사에는 대장경을 새기기 위해 만든 관청인 분사대장도감(分司大藏都監)이 설치돼 있었고요 합천 해인사 장경판전 같은 장경판각(藏經板閣)도 있었습니다. 이런 사실을 알고 단속사를 보면 그 느낌이 사뭇 다르지 않을 수 없습니다.

 

구형왕릉.

 

구형왕을 모시는 구형왕릉 들머리에 있는 사당 덕양전.

 

남사마을. 능소화.

 

◇양산

통도사~춘추공원~용화사·황산잔도~북정동고분군·양산박물관

 

문화재만 놓고 보면 통도사는 양산을 압도합니다. 양산시 전체 문화재가 219개인데 63.5% 139개가 통도사에 있습니다. 하북면 백록리 718-1번지 35번 국도에 붙어 있는 국장생석표는 통도사가 옛적부터 어마어마했음을 일러줍니다. 고려 1085년 나라 명령으로 통도사 둘레에 세운 12개 가운데 하나라 합니다.

 

국장색 석표. 울산시 울주군에도 이런 석표가 하나 있습니다.

 

양산은 신라 박제상의 고장입니다. 박제상 앞에는 언제나 '만고충신'이라는 말이 붙습니다. 눌지왕의 아우를 왜왕 손에서 구하고 붙잡힌 박제상은 "차라리 계림의 개·돼지가 될지언정 왜국 신하는 될 수 없다"고 했습니다. 왜왕은 그이 발바닥 가죽을 벗기고 갈대 위를 걸린 다음 불태워 죽였습니다.

 

일본 대마도에 있는, '신라국사 박제상공(모마리비지) 순국비'.

 

춘추공원 삼조의열단.

 

생가터로 알려진 자리에는 그를 기리는 효충사가 있습니다. 춘추공원 장충단(삼조의열단)에는 고려 충신 김원현 조선 충신 조영규와 함께 신라 충신 박제상을 기리는 빗돌이 있습니다.

 

썩 괜찮은 양산시립박물관입니다.

 

조선 시대 옛길 황산잔도와 그 왼편에 세워져 있는 정현석 영세불망비.

 

◇의령

덕곡서원~정암진 일대~성황리소나무~곽재우·안희제 생가~망우정(창녕)

 

경남에서는 드물게 퇴계 이황을 모시는 덕곡서원. 의령에는 퇴계 처가가 있었습니다.

 

의령은 의병장 망우당 곽재우의 땅입니다. 곽재우는 기강나루에서 임진왜란 육전 최초 승리를 거뒀고요 정암진 전투 승리는 왜군의 전라도 침공을 막았습니다. 기댈 데 없던 백성들한테 커다란 희망이 된 활약이었습니다.

 

물길 한가운데 떠 있는 것이 바로 솥바위(정암鼎岩).

 

역사는 의병장한테 가혹했습니다. 전라도 의병장 김덕령은 역모로 몰려 죽었습니다. 곽재우와 함께 남명 조식 아래 공부한 정인홍은 합천 의병장의 대표격이었는데 전쟁이 끝난 뒤 인조반정 과정에서 죽임을 당했습니다.

 

곽재우가 의병을 모을 때 북을 내걸었다는 느티나무. 현고수(懸鼓樹).

 

의병을 일으키는 데 가진 재산을 모두 바친 곽재우는 전란이 끝난 뒤에도 재산과 권력을 가까이하지 않았습니다. 그 덕에 망우정에서 가난하기는 했으나(그리고 귀양살이 정도는 할 수밖에 없었으나) 종신(終身)은 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곽재우 생가와 세간리 은행나무.

 

백산 안희제 선생 생가. 안채는 내부 구조가 아주 복잡해서 독특합니다.

 

삼성 이병철 생가. 수리를 하고 있어서 이렇게밖에 찍지 못했습니다.

 

◇진주

청곡사~문산성당~진주역차량정비고~진주교회~진주상무사~옥봉경로당~진주향교~형평운동기념탑~진주성·국립진주박물관

 

진주향교.

 

진주교회. 1919년 삼일운동 당시 여기 종탑에서 종이 울림과 동시에 독립만세시위를 벌였답니다. 진주교회는 백정이 다른 신분 사람들과 처음 동석을 했던 역사적 공간이기도 합니다.

 

옛적 전통시대 경남에서 으뜸 고을은 단연 진주입니다. 진주향교도 역사가 1000년을 넘었고 천주교·개신교 같은 신식 종교도 문산성당이나 진주교회처럼 가장 먼저 자리를 잡았습니다. 청곡사가 한 번도 사그라들지 않고 오랫동안 큰 절간이었던 배경도 진주의 풍성한 물산이라고 봐야 합니다.

 

청곡사 괘불탱. 크고 멋집니다. 국보.

 

문산성당.

 

전통기와집으로 남은 옥봉경로당이나 경남 최초는 물론 전국적으로도 가장 앞선 축에 드는 진주상무사(지금 상공회의소) 결성도 진주가 교역이 활발했던 때문이겠습니다. 백정해방을 위한 형평운동조차도 진주 산물이 풍요로워 잡을 소가 많았던 때문이 크다고 해야겠지요.

 

전통 서원 양식으로 지은 옥봉경로당.

 

형평운동기념탑.

 

진주성 김시민 장군 동상. 김시민도 이순신처럼 시호가 충무공입니다.

 

◇창녕

관룡사·용선대~옥천사지~신씨고가·영산향교~창녕지석묘~망우정~술정리동삼층석탑

 

관룡사 들머리 석장승.

 

창녕 출신 가운데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진 역사 인물로는 신돈이 으뜸입니다. 절간 종년의 자식으로 연줄이 없었던 신돈을 고려 공민왕은 개혁 추진 파트너로 기용했습니다. 신돈은 권문세족이 독차지했던 땅과 노비를 원래대로 돌리려 했습니다.

 

망한 절터 옥천사지에 남은 석등 받침. 모서리가 정에 맞은 듯이 떨어져나갔습니다.

 

가진자들는 극악하게 저항했고 신돈은 임금의 신임을 잃고 실각하자 곧바로 처형당했습니다. 그것으로도 모자라 권문세족은 신돈이 나고 자란 옥천사를 모조리 파괴했습니다. 옥천사지에 서면 인간의 탐욕이 어느 정도까지 비정해질 수 있는지 나름 가늠이 됩니다.

 

아울러 야트막한 등성이에 높다랗게 자리잡은 창녕지석묘는 경남 고인돌을 대표할만큼 잘 생겼고 덩치도 큽니다. 술정리동삼층석탑이야 따로 말할 필요조차 없겠지요.

 

곽재우 만년을 보낸 망우정.

 

술정리동삼층석탑. 오른편으로 억새로 지붕을 이은 하병수가옥이 보입니다.

 

◇창원

창원향토자료전시관~동판저수지~제포진성·웅천읍성~창동·오동동 근대역사유적

 

창원향토자료전시관. 양해광 관장이 평생 모은 물건들입니다. 지금 일상 물품들도 세월이 쌓이면 문화재가 됩니다.

 

진해 제포진성은 요즘으로 치면 해군 경남본부에 해당됩니다. 임진왜란 이전까지 마산 합성동에 있었던 경상우도병마절도영과 더불어 이 일대가 군사요충이었음을 일러주는 지표입니다. 지금도 진해에는 해군기지가 들어서 있습니다.

 

맛이 깊고 그윽한 동판저수지. 동판저수지는 주남저수지를 이루는 셋 가운데 하나입니다.

 

창동·오동동 일대 근대역사유적은 이렇습니다. 경남 최초 조선인 주식회사로 부산 백산상회를 통해 독립자금도 냈다는 원동무역터, 일제 때 공연이 펼쳐졌고 1950년 보도연맹 관련해 마산 앞바다에 수장시킬 사람들을 모아 뒀던 옛 시민극장, 독립운동가 민주화운동가를 가둔 마산형무소 자리…….

 

원동무역터.

 

옛 시민극장. 벽에는 아직도 옛날 영화 간판을 걸었던 표시가 납니다.

 

70~80년대 마산이 아주 잘 나갈 때 사람들 들끓던 가게도 많이 남았습니다.

 

무슨 할머니 보쌈 가게 앞 길바닥 3.15의거 발원지. 1960년 당시 보쌈 가게 자리에는 민주당 마산시당이 있었습니다.

 

◇통영

서포루~통제영~문화동 벅수~삼덕항 일대~당포성지~박경리기념관

 

통영은 1603년 들어선 삼도수군통제영을 빼놓고는 말할 수조차 없는 도시입니다. 군수물품과 생활용품을 생산·조달했던 십이공방은 통영 예술의 뿌리입니다. 십이공방에 옛적 관청 건물까지 나름 복원하고 본디 있던 세병관까지 아울러 2014년 통제영으로 선보였습니다.

 

통제영 십이공방 건물들. 가장 왼쪽에 세병관이 있고 그 너머에 경무당을 비롯한 관아 건물들이 있습니다.

 

통제사 권한이 상당했음을 일러주는 주전소(요즘으로 치자면 조폐창) 터도 있고 장수기 꽂는 기삽석통과 오방기 꽂는 석인도 발굴돼 나와 있습니다.

 

엽전을 만들기 위해 쇠를 녹이던 화로들이 있던 자리(노지爐址).

 

 

돌벅수는 위험한 바다에서 고기잡이를 하던 사람들이 자기들 의지가지로 삼아 세웠던 신물이었습니다. 삼덕항 그 앞에서 고기 많이 잡고 탈없이 돌아오게 해달라 빌었습니다.

 

삼덕항 돌벅수. 새끼줄을 두르고 있습니다. 지금도 사람들이 섬긴다는 표시입니다.

 

삼덕항 옆 당포성도 바다가 없었으면 들어서지 않았을 성곽이라 합니다. 왜구가 들끓던 고려 말기에는 최영 장군이 여기서 승전했고 임진왜란 당시에는 이순신 장군이 당포 앞바다에서 왜적을 무찔렀습니다.

 

당포성.

 

통영 예술을 대표할 만한 인물은 여럿이겠지만 빠뜨릴 수 있는 인물이 바로 소설가 박경리 선생입니다. 박경리기념관과 박경리 묘소는 자리가 아주 좋습니다.

 

 

그이 일생과 작품 세계가 잘 정리돼 있는 기념관에서는 <토지>와 <김 약국의 딸들>에 형상화돼 있는 통영 모습도 볼 수 있습니다. 묘소로 이어지는 여기저기에는 그이 육필 원고와 시편·산문이 읽기 좋게 놓여 있습니다.

 

◇하동

하동읍성~쌍계사~범왕리푸조나무~세이암~조씨고가~최참판댁

 

 

고전면 고하리 양경산 꼭대기 하동읍성은 특징이 한둘이 아닙니다. 읍성으로는 드물게 평지가 아닌 산마루에 있습니다. 조선시대 축성 방법이 정해지기 전에 쌓아진 것이라 그 옛 모습을 알 수 있습니다. 외적을 효과적으로 무찌르기 위한 치성과 옹성이 제대로 남아 있습니다. 산성인데도 해자가 뚜렷하게 파여 있습니다. 읍성 마루는 전망도 빼어나게 좋습니다.

 

오른쪽 너럭바위가 세이암. 한자가 여럿 새겨져 있습니다.

 

하동에는 신라 슈퍼스타 최치원 관련 유적도 많습니다. 쌍계사 진감선사대공탑비는 최치원이 쓴 몇 남지 않은 금석문입니다. 최치원은 재능이 뛰어났지만 당나라에서는 외국인이라 빛을 못 보지 못했고 모국 신라서는 신분이 왕족이 아니라 따돌림을 당했습니다.

 

세이암과 마주보고 있는 범왕리푸조나무.

 

어쩌면 그런 덕분에 관련 유적이 이처럼 곳곳에 많이 남았는지도 모릅니다. 아주 잘 나가는 존재였다면 이토록 곳곳을 돌아다녔을 리가 없겠고, 만약 돌아다녔다 해도 당대와 후세 사람들이 이렇게 쳐줬을 리도 없을 것입니다.

 

하동 운암영당에 있었던 최치원 영정. 지금 국립진주박물관에 있습니다. 최치원이 쓴 글씨를 새긴 진감선사 대공영탑비. 하동 쌍계사에 있습니다.

 

어쨌거나 범왕리푸조나무는 그이가 꽂았던 지팡이에서 난 싹이 시초라 하고 곁에 있는 세이암은 최치원이 속세에서 마지막으로 귀(耳)를 씻은(洗) 바위(巖)라고 한답니다. 벼슬을 살고 권력을 누리는 데는 불우했지만 그 덕분에 자연만큼은 제대로 즐기고 삶을  누릴 수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하동 매암다원. 차꽃. 늦가을에 핍니다. 하동은 우리나라 차 시배지이기도 합니다.

◇함안

칠원향교~장춘사~무기연당~주리사지사자석탑~말이산고분군·함안박물관

 

함성중학교 들머리 주리사지사자석탑은 경남에서 보기 드문 모양새를 하고 있습니다. 화엄사사사자삼층석탑처럼 사자 네 마리가 몸돌을 떠받치고 있는 것입니다. 상태가 좋지는 않지만 그래도 눈에 담기는 모습이 색다릅니다.

 

주리사지사자석탑 부분.

 

말이산고분군은 그 규모만으로도 엄청나고 유물까지 더해지면 더욱 대단하답니다. 하지만 함안 학생들은 귀하게 여기지 않는답니다. 너무 가까이 있고 너무 자주 보기 때문이겠지요.

 

말이산고분군. 왼쪽 아래 안내판을 장식한 미늘쇠 새.

 

함안에서 아름답기로 으뜸은 무기연당입니다. 길게 네모난 연못과 굽은 소나무와 누정 두 채가 어우러지는 정원은 몸도 마음도 시원하게 합니다. 욕심 부리지 않고 자연과 더불어 살겠다는 주인의 뜻도 곳곳에 새겨져 있습니다.

 

무기연당.

 

하환정(何換亭)은 '(이 멋진 풍경을) 어찌 (벼슬과) 바꾸겠는가' 하는 뜻이고 풍욕루(風浴樓)는 바람으로 씻겠다는 바람입니다. 연못 계단 앞 탁영석(濯纓石)은 "물이 맑으면 갓끈(纓)을 씻고(濯) 더러우면 발을 씻겠다"는 얘기고 연못 안 석가산은 백세청풍(百世淸風) 하는 양심대(養心臺)입니다.

 

더불어 대나무 사립문 하나로 성(聖)과 속(俗)을 나누는 조그맣고 욕심없는 장춘사도 함안 명물로 그럴 듯합니다.

 

대로 만든 삽작문. 돌아앉은 일주문. 뒤로 보이는 감나무. 장춘사 가을 풍경.

 

◇함양

벽송사·서암정사~용유담~남계서원·청계서원~허삼둘가옥~운곡리은행나무~거연정·동호정

 

벽송사는 선원(禪院)입니다. 기도하는 데가 아니고 도 닦는 공간입니다. 절간 한가운데에 대웅전이나 비로자나전 같은 법당 대신 벽송선원이 있는 까닭이 되겠습니다.

 

벽송사 봄 풍경.

 

풍경도 멋지고 푸근하고요 나무 장승 한 쌍도 나름 유명하답니다. 판소리 가루지기타령에서 옹녀와 함양 등구 마천에 자리잡은 변강쇠가 도끼질을 해댔을 그런 장승이랍니다.

 

곁에 있는 서암정사는 미래 문화재라 할만합니다. 80년대부터 바위를 갈고 불상과 글씨와 그림을 새기고 굴법당도 만들었습니다. 100년이나 200년 뒤 후세 사람들은 이 절간 물건들 좋고 나쁨을 가리면서 나름 문화재 취급을 하겠지 싶습니다.

 

 

경북 영주 소수서원에 이어 두 번째 오래된 서원이 함양에 있는 남계서원입니다. 함양 선비 문화의 기둥뿌리인 셈인데요 규모도 작지 않고 짜임새도 잘 갖췄고 잘 자란 나무들과도 썩 어울립니다. 구조는 단순하고 꾸밈은 소박합니다. 옆에 청계서원도 규모만 작을 뿐 분위기는 처지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런 남자 중심 양반 고을 함양에 여자가 중심이 되는 독특한 옛집이 있어 눈길을 끕니다. 허삼둘 가옥입니다. ㄱ자로 꺾어지는 안채 한가운데에 부엌이 있고요 여기서 보면 안마당이나 행랑채는 물론 사랑채까지 한 눈에 장악된답니다.

 

허삼둘가옥 안채 한가운데 부엌 들머리.

 

와불능선. 보이시나요? 용유담.

 

거연정. 동호정.

 

◇합천

영암사지~뇌룡정~삼가장터삼일만세운동기념탑~월광사지~옥전고분군·합천박물관(또는 해인사)

 

영암사지.

 

가야산 해인사는 팔만대장경을 품은 불보종찰로만 알려져 있을 뿐 대가야 건국설화가 서려 있다는 사실은 대부분 잘 모릅니다. 해인사 국사단 산신령=정견모주가 대가야를 세운 뇌질주일(惱窒朱日)의 어머니랍니다.

 

해인사 국사단. 국사단에 모신 정견모주.

 

대가야의 옛땅이 경북 고령 경계 안쪽뿐이었겠습니까? 합천과 고령은 비록 경남과 경북으로 나뉘어 있지만 가야산을 공유하는 가까운 이웃입니다. 임진왜란 때 떨쳐 일어난 의병들은 합천(초계 포함)과 고령을 동일한 작전 구역으로 여겼습니다.

 

월광사지는 대가야 마지막 태자 월광태자 관련 전설이 있습니다. 나라가 망한 뒤 월광태자가 여기 거닐었다는 것입니다. 물론 월광사지동·서삼층석탑은 아무리 올려잡아야 8세기 신라시대 작품입니다. 어쨌든 월광사지 언덕과 들판과 개울이 어우러지는 풍경은 참 대단합니다.

 

남명 조식을 모시는 용암서원 남명 조식이 제자들 가르쳤던 뇌룡정.

조선 시대 경남 대표 선비 남명 조식이 태어난 삼가면 외토마을에는 그이가 제자들 가르쳤던 뇌룡정과 그이를 제사 지내는 용암서원이 있습니다. 그이는 무엇이 옳은지 아무리 깨우쳤어도 실천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가르쳤습니다. 그이 사후 임진왜란 때 의병장 대다수가 남명 제자였습니다.

 

남명의 이런 정신은 300년 남짓 세월에도 흐트러지지 않고 이어졌습니다. 1919년 삼가장터에서 만세 시위가 두 차례 벌어졌는데 3만 명 넘게 참가했습니다. 전국 최대 규모라 하겠는데 이 또한 남명이 끼친 영향이 여기 이 지역에 남아 있었기 때문이겠습니다.

 

 

합천박물관. 옥전고분군.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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