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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팔 여행 01 : 트레킹에서 만난 람(1)

김훤주 2015. 3. 15. 15: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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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키가 작고 어려보이던 람

 

네팔에 도착한 첫날 1월 26일 카트만두에서 하룻밤을 자고 이튿날 비행기로 두 번째 도시 포카라로 갔습니다. 포카라는 휴양·관광 도시로 많은 이들이 히말라야 트레킹을 시작하는 지점으로 삼는다고 합니다.

 

포카라 공항에서 처음 만난 사람이 람입니다. 람이 들고 있는 조그만 도화지에는 매직펜으로 알파벳이 적혀 있었습니다. ‘KOREA PARK YOUNGJU.’ 영주(YOUNGJU)형은 이번 여행을 앞장서 이끈 대장이었거든요. 영주형이 이 친구랑 뭐라뭐라 하더니 우리한테 이름이 ‘람’이라 일러줬습니다.

 

람은 열대여섯 살로밖에 보이지 않았습니다. 키는 160cm를 갓 넘었나 싶을 정도로 작고 살갗은 까무잡잡했으며 살결은 고왔습니다. 눈동자는 맑은 까만색이고 눈은 컸습니다. 쓸쓸한 기색이 느껴질 정도로 차분하고 조용한 성격이었습니다. 말이 많거나 성격이 활달하지는 않았습니다.

 

람은 반팔 차림이었고 모자는 쓰고 있지 않았습니다. 조그만 배낭이 하나 있었고 운동화(등산화가 아니고)를 신고 있었습니다. 배낭은 싸구려로 보였는데 그나마 몇 군데 헤져 있었습니다. 운동화도 유명한 브랜드 제품이 아니었고 배낭과 마찬가지로 많이 낡아 있었습니다.

 

타고 간 택시에서 짐을 내리는 모습. 빨간 반팔 티셔츠를 입은 친구가 람. 그 옆에 아래위 검은 옷이 저랍니다.

 

람까지 더해져서 네 사람이 된 우리 일행은 시간에 맞춰 미리 불러놓은 택시를 타고 빠져나왔습니다. 히말라야 푼힐(Poon Hill)을 목적지로 삼은 트레킹에 곧바로 들어간 것입니다. 택시를 타고 간 다음 지프로 갈아타고는 자동차로 올라갈 수 있는 데까지 올라갔습니다.

 

2. 우리는 앞자리에 람은 뒤쪽 짐칸에

 

지프는 사람이 앉는 자리가 운전석 빼고 셋뿐이었습니다. 택시에서는 일행 넷이 모두 승객 자리에 앉을 수 있었지만 지프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앞에 앉고 람은 배낭들과 더불어 뒤쪽 짐칸에 탔습니다.

 

포장되지 않은 비탈길이라 무척 흔들리고 덜컹거렸습니다. 앞에 앉은 우리도 옆 차창이나 위 천정에 몸이 부딪혔습니다. 람은 우리보다 더 심하게 흔들리고 더 많이 부딪혔을 것입니다.

 

내려서 점심을 먹은 다음 새롭게 고쳐 맨 배낭 가운데 가장 무거운 것을 람에게 맡겼습니다.  영주형은 람이 스물한 살이라 했습니다. 네팔서는 나이를 몇 년 몇 달 몇 날까지 밝힌다고 합니다. ‘몇 년’만 말하는 경우는 몇 달과 몇 일이 생략돼 있다고 합니다. 람은 우리 식으로 스물세 살입니다.

 

스물세 살이면 우리나라에서는 보통 대학 4학년입니다. 우리나라 대학 4학년은 알바도 많이 하겠지만 어쨌거나 부모한테 기대어 사는 시절입니다. 자기 밥벌이 또는 어쩌면 집안 생계를 책임지는 노동을 하기에는 아직 어린 나이입니다.

 

네팔에서 스물한 살짜리 람은 트레커들 짐을 대신 짊어지는 짐꾼 노릇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 먹을거리가 람의 짐이었습니다. 람이 지고 온 것을 우리는 먹고 마셨습니다. 하기야, 이렇게 짐을 갔고 오지 않았으면 우리하고 람이 일당 10달러를 매개 삼아 만날 일 자체가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트레킹 도중에 돌 깨는 작업을 하던 사람들과 만나 얘기를 나누는 장면. 서 있는 사람이 영주형이고 람은 앞에 의자에 앉았습니다.

 

우리가 한국에서 갖고 간 짐은 한국에서 온 다른 트레커들에 견주면 무거운 편이 아니었습니다. 고추장·된장·김치나 다른 밑반찬 따위는 물론 컵라면도 쌀도 가져가지 않았습니다. 현지에서 나고 만들어진 음식만 먹었습니다.

 

짐은 그래도 짐이었습니다. 250ml 소주 페트병 10개 정도, 엿·초콜릿·건빵·커피·코코아·김, 이밖에 지금은 기억 못하는 여러 먹을거리들이 람이 매는 배낭에 들어갔습니다. 추위에 대비한 내복과 두툼한 옷들도 들어 있었습니다.

 

3. 람은 하루 일당이 10달러

 

영주형은 포터 한 명을 쓰는 데 네팔 현지 여행업체에 주는 돈이 하루 16달러라 했습니다. 6달러는 업체가 챙기고 짐꾼한테는 10달러가 간답니다. 1달러를 1000원으로 치면 10달러는 1만원입니다. 네팔에 대해 아는 것이 많은 영주형은 그나마도 네팔서는 일당 10달러가 많은 편이라 했습니다.

 

람은 단순한 짐꾼 이상이었습니다.(람뿐 아니라 다른 모든 포터도 마찬가지라고 합니다.) 람은 트레킹 지역에 들어갈 때 우리 대신 허가증도 갖다주고 행정업무도 처리했습니다.(나올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점심이나 저녁 때 게스트하우스에 들어가면 우리 의사를 물어 주문을 대신해줬습니다. 가게에서 바나나 같은 물건을 살 때는 통역도 해줬습니다. 우리가 마을 사람들과 얘기하고 놀 때도 서로 말이 통하도록 작으나마 도움을 줬습니다.(네팔 사람들과 얘기가 좀 통하는 영주형이 있을 때는 빼고요.)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영주형한테 그날 일정을 들었고 때때로 자기 의견을 말했습니다. 올라갈 때는 뒤에서 처지지 않도록 보살폈습니다. 갈림길에서는 어느 쪽으로 가야 하는지 알려줬습니다. 자기가 모를 때는 현지 사람들한테 물어보고 일러줬습니다.

 

오르기가 힘들어 처지면 앞에서 끌거나 뒤에서 밀어줬습니다. 지쳐서 쉬고 있으면 옆에 서서 우리가 일어날 때까지 기다려줬습니다. 내려가는 길이 험하고 미끄러워 어쩔 줄 모르고 있을 때는 땅을 알맞게 다져서 디딜 수 있도록 만들어줬습니다.

 

그러나 미끄러져 넘어졌을 때는 일으켜 세워주지 않았습니다. 스스로 일어날 때까지 기다렸습니다. 줄곧 뒤에서 보살폈지만 때로는 앞서가기도 했습니다. 게스트하우스가 가까워졌을 때입니다. 먼저 가서 자기 배낭을 갖다 놓고는 도로 내려와 우리한테 지고 있는 배낭을 달라고 했습니다.

 

고마웠습니다만, 배낭을 더 맡기지는 않았습니다. 배낭을 못 질 정도로까지는 힘들지 않았던 때문도 있었고 벼룩도 낯짝이 있기 때문도 있었습니다. 네팔에서는 포터 한 사람당 무게가 20kg으로 정해져 있다고 합니다. 람이 졌던 배낭은 10~13kg이었으니까 무거운 편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우리 일행 가운데서는 람의 배낭이 가장 무거운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람의 어깨와 등짝과 발걸음에 기댔습니다. 람의 어깨와 등짝은 크지 않았고 그 보폭 또한 넓지 않았습니다. 그 배낭이 람에게는 일당 10달러를 버는 일거리였을 따름이겠지만요.

 

4. 권하는 술을 람이 마다한 까닭

 

우리는 저녁을 먹은 뒤 대체로 술자리를 마련했습니다. 가져간 소주도 마셨고, 맥주도 마셨으며 네팔 민간에서 담그는 토속주도 사서 마셨습니다.

 

트레킹 도중 게스트하우스에서 어린애와 더불어 즐거워하는 람.

술이 말개서 우리나라 소주와 비슷한데, 도수가 높지는 않았습니다. 이 술을 영주형은 ‘럿시’라고 발음했습니다. 거칠게 담근 럿시는 흙냄새가 났지만 제대로 담근 럿시는 냄새도 맛도 더없이 깔끔했습니다.

 

트레킹 내내 람은 술을 마시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권해도 두 손으로 가위 표시를 하고는 그만이었습니다. 나중에 알았지만 람이 체질이나 종교적 이유로 술을 꺼린 것이 아니었습니다. 포터로서 자기 소임을 다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이렇게 3박4일 일정을 마치고 1월 30일 포카라로 돌아왔습니다. 영주형은 트레킹을 마치면 포터를 위해 밥을 산다고 했습니다. 영주형은 이번 네팔행이 열 번째입니다.

 

게스트하우스까지 짐을 옮겨준 람은 고기를 먹고 싶다고 했습니다. 게스트하우스는 포카라의 명물 페와(Fewa) 호수 근처였습니다. 저녁 무렵 우리는 가까운 한국식당으로 갔습니다. 람을 위해 주문한 음식은 돼지고기 관련이었습니다.

 

5. 장래 희망이 '코리안 가이드'인 람

 

어디 사느냐고 물었더니 람은 포카라에 산다고 했습니다. 포터는 언제부터 했느냐고 물었더니 3년 됐다고 했습니다. 우리로 치자면 고등학교 졸업하고 바로 생업에 나선 셈입니다. 고향이 머냐고 물었더니 버스를 타고 사흘 걸린다 했습니다. 포카라를 우리나라 부산에 비긴다면 강원도 화천이나 양구쯤이 되겠습니다.

 

람은 이날 처음으로 우리와 더불어 술을 술답게 몇 잔 마셨습니다. 람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Now I am porter. Next I am korean guide.(내가 지금은 포터지만 다음에는 한국인 가이드가 되겠다.)”

 

푼힐에 올랐다가 내려오는 길에 들른 게스트하우스 뜨락에서 설산을 배경 삼아 같이 찍었습니다. 가운데 람, 오른쪽 영주형, 왼쪽 빵모자가 저, 이렇습니다.

 

영주형은 포터보다 가이드가 일당이 세다고 했습니다. 가이드 가운데서도 한국인 가이드를 더 쳐준다고 했습니다. 한국말이 배우기 어렵고 그래서 희소가치가 높다는 것입니다. 그냥 포터는 일당 10달러지만 한국인 가이드는 일당이 적어도 25달러는 된다고 합니다.

 

람은 이렇게 말하고는 입술을 굳게 다물었습니다. 살짝 보니까 무릎 위에 올려져 있는 두 주먹도 불끈 쥐고 있었습니다. 한편으로는 대견하고 한편으로는 안쓰러웠습니다. 50대에 들어선 우리한테 비친 람은, 부모의 무거운 짐을 대신 짊어진 자식이었습니다.

 

영주형은 트레킹을 마치면 포터한테 하루 일당을 팁으로 주는 관행이 있다고 했습니다. 저는 좀더 주자고 했습니다. 영주형은 특정 개인한테 그렇게 더 주는 것은 별 뜻도 보람도 없다고 했습니다. 저는 영주형을 이기지 못합니다. 영주형에게서 람이 받은 팁은 하루 일당 10달러를 넘지 않았습니다.

 

다만 저는 영주형이 카운터에서 셈을 치르는 동안 람한테 다가가 우리 돈 3만원을 손에다 슬며시 쥐여줬습니다. 람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이었고 제 표정은 아마 다른 누가 봤다면 웃도 울도 못하는 그런 꼴이었을 것입니다.

 

식당 앞에서 서로 껴안고 웃으며 손을 맞잡았습니다. 람은 오던 방향으로 몸을 돌려 걸어갔고 우리는 왔던 길을 되짚어 걸었습니다. 게스트하우스 앞 작은 가게에 들러 람에 대해 얘기하며 술을 한 잔 더 마셨습니다. 나중에 나올 때 보니 저 혼자만 술에 취한 것은 아니었았습니다.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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