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에서 본 세상

대통령을 임금으로 둔갑시킨 못난 유권자

김훤주 2014. 11. 26.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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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이 끝난 뒤 조선 조정은 논공행상을 했습니다. 서울을 벗어나 개성 평양을 거쳐 의주까지 임금을 따라다니며 모신 사람은 호성공신으로, 왜적을 무찌른 여러 장수들과 군사·양곡을 보내달라고 명나라에 아뢴 사람은 선무공신으로, 1596년 일어난 이몽학의 반란을 토벌한 사람은 청난공신으로 삼았습니다.

 

앞자리가 호성, 그 다음이 선무, 가장 아래가 청난이었습니다. 1604년 6월 25일치 <선조실록>을 보면 호성공신은 1등 3명 2등 31명 3등 53명으로 모두 86명입니다. 선무공신은 1등 3명 2등 5명 3등 10명으로 18명입니다. 청난공신은 1등 1명 2등 2명 3등 2명으로 5명이었습니다.

 

연합뉴스 사진.

 

이를 보면 왕조 시대 임금의 생각을 있는 그대로 읽을 수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나라도 백성도 아니었고 자기자신의 목숨과 신체였습니다. 임금을 말에 태워 모셔 가고 등에 업고 사나운 물을 건너면서 '먼지를 뒤집어 쓰는' 몽진(蒙塵)을 함께한 공신들이 가장 앞에 나서 있고 숫자도 가장 많습니다.

 

반면 조선 강토를 들어먹으려는 왜적과 맞서 목숨을 내어놓고 싸운 사람, 그리고 명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갖은 치욕도 마다하지 않고(어리석은 임금의 신하 된 탓에) 입에 풀칠할 양식과 나라를 되찾아줄 병력을 빌려오는 데 힘쓴 선무공신은 모두 더해도 호성공신의 20%밖에 되지 않습니다.

 

연합뉴스 사진.

 

이몽학의 반란 토벌은 어떤가요. 실제 가담한 병력이 얼마 되지도 않았을 뿐더러 미친 영향도 작았으므로 이를 두고 공신 운운하는 자체가 말이 되지 않는다고들 합니다. 그런데도 선조는 공신을 다섯이나 삼았습니다.

 

자기 임금 자리를 위협한 사건이다 보니 그랬던 모양이겠습니다.(선조는 이 사건을 빌미로 호남 의병장으로 신망이 높았던 김덕령을 터무니없이 고문해 죽음에 이르게 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공신 책봉에 대해 당대에도 비판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세 가지로 정리됩니다. 호성공신이 너무 많다는 지적이 처음이고요 선무공신을 호성공신 뒤에 둔 데 대한 공론이 두 번째였으며 이몽학의 난을 두고서는 따로 책봉할 필요조차 없다는 얘기가 세 번째였습니다.

 

연합뉴스 사진.

 

하지만 선조는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선조실록> 1601년 3월 17일 기사에서 이항복은 이렇게 아룁니다. "우리나라가 비록 중국 군대에 기대어 오늘날이 있지만 여러 장수들 노고도 적지 않습니다. 만일 호종공신의 말석에다 부친다면 반드시 불만스러워할 것입니다."

 

이에 선조는 자기가 사실에 근거해 있다면서 이렇게 답합니다. "중국 군대가 아니었으면 왜적을 어떻게 물리쳤겠는가. 강토 회복은 모두 중국 군대의 공이다. 우리나라 사람은 한 일이 없다. (다만) 여러 해 방어한 공이야 전혀 없다고 할 수는 없지만……."

 

연합뉴스 사진.

 

호성공신이 너무 많다는 논란, 임금을 가까이에서 모시는 직분인 내시가 24명이나 되고 임금 심부름꾼도 그 비슷한 숫자가 된다는 공론은 여러 차례 제기된 모양이지만 고쳐지지 않았습니다. 이몽학의 반란을 토벌한 공신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래서인지 <선조실록>을 기록한 이는 이렇게 한탄했습니다. '호성공신은 분수에 지나치고 청난공신은 그것이 무슨 공훈이 될 일인가. 공신록이 참으로 구차한 데 쓰이고 말았구나.'

 

이처럼 선조 임금과 조선 왕조에게 강토와 백성은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잘라 말하자면, 임금 자리와 왕조가 유지될 수만 있다면 그런 따위는 없어도 그만인 존재였습니다.

 

그런데 저는 지금도 그런 세상이 아닌가 싶어 깜짝깜짝 놀라고 두려워질 때가 적지 않습니다. 대한민국 대통령이 조선 왕조 임금처럼 굴기 때문입니다. 대한민국 고위 공무원이 조선 시대 임금을 호종하던 대신들과 같기 굴기 때문입니다.

 

하기야, 그래도 탓만 할 수는 없는 노릇인 것이, 2012년 12월 대통령 선거 직후 지금 대통령이 된 이를 두고 일부에서는 '신라 선덕여왕 이래 세 번째 여왕'이라 자랑스레 일컫기도 했으니까 말입니다. 같은 유권자로서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기는 한 것입니다.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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