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본 곳

경주 출신 동학 최제우 도 닦으러 가는 길

김훤주 2014. 7. 8.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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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방 루트

 

남사리 사지 삼층석탑(현곡면 남사리 234-2)→0.9km 남사리북삼층석탑(남사리 313-4)→0.2km 남사저수지(불세출의 가수 배호의 마지막 잎새 노래비)→0.3km 수운최제우 태묘→1.6km 수운 최제우 유허비(탄생지)→2.3km 용담정→3.9km 나원리 오층석탑→0.8km 손순유허비→2.2km 오류리 등나무→1.1km 진덕여왕릉→8.4km 태종무열왕릉→3.1km 김유신장군묘→4.7km →국립경주박물관

 

신라 석탑과 배호 노래비가 어우러지는 경주 남사리

 

경북 경주시 현곡면 남사리에는 유래를 알 수 없는 돌탑이 둘 있습니다. 하나는 사지 삼층석탑(보물 제907호)이고 또 하나는 북삼층석탑(경주시 문화재자료 제7호)입니다.

 

그런데 지금 놓여진 처지는 서로 다릅니다. 북삼층석탑은 있던 자리에서 옮겨와 길가에 서 있는 모습이 조금 산만합니다. 지붕돌은 네 귀퉁이가 많이 망가졌지만 밑면에 새긴 5단의 받침은 비교적 선명한 편입니다.

 

남사리북삼층석탑.

 

사지 삼층석탑은 처지가 한결 낫습니다. 산중 절터에 남아 있어 자태가 훨씬 돋보입니다. 저 혼자로써만 잘나기가 힘든 사정은 사람이나 탑이나 매한가지인 모양이지요. 하하. 두 탑을 돌아보면서 그런 느낌을 비교하는 것도 재미가 있습니다.

 

 

사지 삼층석탑은 2단 기단(基壇) 위에 3층 탑신(塔身)을 올린 모양인데요, 지붕돌의 추녀가 살짝 들려 있어 날렵한 느낌을 주고요, 전체적으로 간략함을 추구하는 형식이라 9세기말 작품으로 짐작된다고 합니다.

 

남사저수지에서 만나는 ‘배호의 마지막 잎새 노래비’는 수운 최제우의 탄생과 득도 현장을 찾아가는 여행길에 생각지 않은 재미와 즐거움을 안겨줍니다. 배호는 요즘 표현으로는 ‘국민가수’가 되겠습니다. 5060세대들은 다들 배호에 열광하며 한 시절을 보냈다지요.

 

 

가슴을 울리는 중저음으로 대중의 감성을 요동치게 만들었던 배호는, 당시로서는 불치병인 신장염에 걸려 1971년 29살로 아깝게 요절했습니다. 활동하는 5년 동안 ‘누가 울어’, ‘파도’, ‘울고 싶어’, ‘안녕’, ‘0시의 이별’ 등 300곡 남짓을 남겼는데요 이 가운데 ‘0시의 이별’은 통행금지 시작 시각에 이별한다는 노랫말 때문에 금지곡이 됐던 끔찍한 에피소드까지 있는 노래랍니다.

 

배호 노래비가 여기 들어선 까닭은, 그이가 부른 노래 ‘마지막 잎새’ 노랫말을 쓴 정귀문씨가 여기 출신이라는 데 있습니다. ‘마지막 잎새’는 배호가 숨을 거두기 넉 달 전인 1971년 7월에 음반으로 담겨 나와 아쉬움과 안타까움을 더했다고 합니다.

 

이 빗돌도 세월이 흐른 뒤에는 언젠가 문화재가 될 수도 있을 텐데, 여기 빗돌에 새겨진 노랫말은 배호의 당시 처지를 뜻하는 듯 무척 애절합니다.

 

“그 시절 푸르던 잎 어느덧 낙엽지고/ 달빛만 싸늘히 허전한 가지/ 바람도 살며시 비켜가건만/ 그 얼마나 참았던 사무친 상처길래/ 흐느끼며 떨어지는 마지막 잎새.// 싸늘히 부는 바람 가슴을 파고들어/ 오가는 발길도 끊어진 거리/ 애타게 부르며 서로 찾을 걸/ 어이해 보내고 참았던 눈물일래/ 흐느끼며 길 떠나는 마지막 잎새.”

 

경주 구미산 지구의 중심은 수운의 득도처

 

용담정 노래비에서 경주로 가는 방향 200m 지점 오른쪽에 조그만 도로가 있습니다. 도로를 따라 올라가면 그 끝에 태묘(太墓)가 있습니다. 36살 득도하고 그 뒤 동학을 포교하다가 마흔 나이에 사도난정(邪道亂正) 죄목으로 죽임을 당한 수운 최제우(1824~1864)가 묻힌 곳이지요. 둘레에는 그이와 고락을 함께했던 수운의 아내와 큰아들·둘째아들의 무덤이 함께 있습니다.

 

둘째아들 무덤. 맏아들 무덤.

 

아내 무덤.

 

수운 최제우 태묘는 천도교조 대신사 수운 최재우 유허비가 서 있는 탄생지, 그리고 득도를 했던 용담정(龍潭亭)과 더불어 동학농민혁명과 3·1독립운동의 정신적 지주가 된 사상의 발상지가 되고 있습니다.

 

 

 

태묘를 들른 다음에는 탄생지를 먼저 가도 되고 득도처를 먼저 가도 좋습니다. 탄생지는 오른쪽에 있고 득도처는 왼편에 있습니다. 태묘에서 거리는 비슷하답니다.

 

현곡면 가정리 탄생지는 유허비만 우뚝해서 밋밋한 편입니다. 천도교 중앙총부에서 만든 안내판에는 “포덕(布德) 전 36년 후천 천황씨인 수운대신사께서 탄생하신 곳”이라 적혀 있고 “포덕 1년 저 앞 구미산 계곡의 용담정에서 만고없는 무극대도를 득도하시었으니, 이 겨레와 억조창생을 살리실 다시 개벽(開闢)의 천도(天道)를 밝히시었다”고 덧붙여 놓았습니다.

 

천도교조 대신사 수운 최제우 유허비.

 

그리고 “포덕 112년(1971) 8월에 빈 터만 남아 있던 이 곳에 정부의 도움과 교단의 정성으로 유허비를 세우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탄생지, 그러니까 생가터는 2012년 11월 현재 한창 발굴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수운이 태어나 살던 당시 집터를 짐작할 수 있는 자리들이 수북하게 나타나 있습니다. 유허비 앞에서 만난 할아버지 한 분은 “이 동네 출신이고 지금은 경주시내 살면서 밭일을 하러 왔는데 (수운 최제우와) 같은 경주 최가”라며 “지금 발굴하고 있는데 얼마 안가 (생가) 복원이 된다”고 말했습니다.

 

 

멀지 않은 용담정으로 갑니다. 용담정은 그야말로 천도교의 성지입니다. 경주국립공원의 구미산지구의 중심에 해당되는데 여기에 드러나 있는 신라 관련 유적은 별로 없습니다. 들머리에서 용담정까지는 편안한 산길이랍니다.

 

여러 건물들이 있지만 먼저 눈으로 새길 것은 수운의 동상입니다. 도포를 입고 관모를 쓴 채 왼손에 책을 말아 들고 오른손을 높이 들었습니다. 절박한 무엇인가를 외치는 듯한 역동성이 썩 뛰어나 보이는 작품입니다.

 

 

 

다음으로는 용담정, 안에서 절을 하고 있던 젊은이가 나오더니 물이 졸졸 흐르는 바로 옆 골짜기로 향합니다. 그이는 한 바퀴 다 둘러볼 때까지 올라오지 않았습니다. 수행을 하고 있었나 보나 짐작할 뿐입니다. 용담정에는 수운의 영정이 모셔져 있습니다.

 

수운 최제우는 보국안민을 고민하는 가운데 젊은 한 시절을 떠돌아다니며 유람을 했습니다. 용담정은 아버지 근암 최옥이 학사(學舍)로 쓰던 곳으로, 오랜 방랑을 끝내고 돌아와 1860년 4월 5일 사람이 곧 한울이라는 시천주(侍天主) 계시를 받고 득도한 곳이라 합니다.

 

 

최제우가 이 해 포덕을 시작한 동학은 양반 지배집단의 부패와 세도정치가 더없이 심해지고 크고 작은 민란이 끊이지 않았던 당대를 배경으로 탄생했습니다.

 

 

동학 하면 바로 인내천(人乃天

용담정에 있는 수운 영정.

)이지요. 사람을 한울 같이 섬기는 사인여천(事人如天)을 실행하면 세상은 평화롭고 사람과 자연이 공생하게 된다는 내용입니다. 사람이 동등하지 못하고 사람을 귀하게 여기지 못함으로써 생겨난 당대의 어지러운 사회상을 극복하려는 굳은 의지가 담겨 있습니다.

 

교세를 넓혀가던 최제우는 이단사교(異端私敎)로 좌도난정(左道亂政)과 요언혹민(妖言惑民)을 했다는 죄명으로 조정에 붙잡혀 1864년 대구성 남문 밖 관덕정에서 효수형(梟首刑)을 당합니다. 앞서 수운은 1863년 탄압을 예상하고 도통(道統)을 최시형(崔時亨)에게 넘기는데요, 최시형은 ‘동학농민혁명’을 통해 최제우의 보국안민 사상을 이어갔습니다.

 

동학농민혁명은 물론 3·1독립운동에까지 정신적으로 버팀목이 되어 간 동학의 발상지인 용담정 등등은 그에 어린 역사적 의미와 상징성은 크지만 느낌이 조금 밋밋합니다. 그럼에도 의의는 100년 넘게 흐른 지금도 여전히 유효하답니다.

 

 

최제우에 이어 최시형이 이끈 동학은 벼슬아치(官) 위주 정치에서 백성(民) 위주 정치로 바꾸기 위한 운동이었으며, 민주주의를 심고자 하는 의지의 발로이기도 했습니다. 최제우는 우리나라에서 전통시대를 뛰어넘고 민주주의에 대한 단초를 자체 개발 제기한 우리나라 최초 근대인인 셈입니다.

 

그에게서 비롯된 동학과 천도교의 역사는 올해(2012년)로 포덕(布德) 153년, 인내천과 사인여천은 얼마나 이뤄지고 있는가, 우리는 도대체 얼마나 사람 중심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는가, 그이 유적을 이렇게 돌아보면, 이런 물음을 스스로에게 절로 던지게 된답니다.

 

구미산지구에서 만나는 색다른 경주

 

이제는 경주 신라 나들이입니다. 그렇다고 경주 오면 다들 보는 그런 풍경은 사절이랍니다. 구미산 지구에 경주 나원리 오층석탑(국보 제39호)이 있는 것입니다. 경주에서는 보기 드문 높이 8.8m 매우 큰 돌탑으로 짜임새가 있고 비례 또한 아름답습니다.

 

 

통일신라시대인 8세기 세웠을 것으로 짐작되는데요 1000년이 넘게 지났음에도 이끼가 끼지 않고 순백색을 잘 간직하고 있어 청신한 기운이 느껴집니다. 그래서 ‘나원백탑’이라고도 한다는데요, 이런 돌탑이 있었던 절에 대해서는 제대로 전해지는 것이 없으니 그 또한 오히려 신기한 노릇입니다.

 

 

여러 사람한테서 칭송을 받아온 감은사지삼층석탑보다 덜 알려지기는 했지만, 이 돌탑에게서 받는 느낌은 그 힘이 감은사지석탑을 훌쩍 뛰어넘는다고 할 수 있습니다. 바로 이런 때문에 별다른 기대 없이 찾아갔다가 큰 감흥을 받고 오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그리고, 오히려 그 기대 없음이 감흥을 키워 주는지도 모르는 노릇입니다. 문화재와 역사 유물이 넘쳐나는 경주지만, 여기서도 전혀 밀리지 않는 그런 보배랍니다. 이제는 손순유허비(경상북도 기념물 제115호)입니다.

 

신라 흥덕왕 때 효자로 칭송이 높았던 손순의 효행을 기리는 빗돌이라는데, <삼국유사>에 나오는 전설 같은 내용을 현실에서 확인하니 참 느낌이 새롭습니다.

 

손순유허비각.

 

손순은 늙은 어머니를 봉양했습니다. 손순의 자식이 어머니의 음식을 빼앗아 먹었습니다. 손순은 아이는 또 얻을 수 있지만 부모는 다시 얻을 수 없다는 생각으로 자식을 산에 묻으러 갔습니다. 묻으려고 땅을 파니 거기서 돌종이 나와 집에 가지고 와 울렸습니다. 소리는 당연지사 대궐에까지 크게 들렸겠지요. 임금이 사정을 알아보고는 집과 쌀을 내리고 아이를 묻지 못하게 했습니다. 그 뒤로 이어지는 사연까지 궁금해하는 사람은 사실 별로 없을 것입니다.

 

손순유허비각 옆 문효사.

 

세상의 근본이 효라는 말이 격세지감인 시대입니다. 윗물이 아래로 흐르는 것보다 아랫물이 거슬러 올라가는 일이 몇 백 배 힘들지요. 좋은 부모가 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은 많지만 좋은 자식이 되기 위해 애를 쓰는 사람은 왜 거의 보이지 않을까요?

 

어버이는 돌덩이 취급을 하면서도 자식만큼은 금덩이보다 더 소중하게 여기는 세태에 우리 모습을 한 번쯤 돌아보게 만드는 유허비입니다.

 

경주 오류리 등나무(천연기념물 제89호)은 나이가 450살이라 합니다. 한 남자를 사이에 두고 벌어진 자매의 이루지 못한, 그래서 슬프고 애달픈 사랑 이야기가 얽혀 있는 나무입니다. 자매가 죽은 자리에는 등나무가 생겼고요 청년이 죽은 자리에는 팽나무가 나왔습니다.

 

오류리 팽나무 한그루와 등나무 두 그루.

 

등나무 줄기.

등나무 두 그루는 팽나무 한 그루를 휘감고 오릅니다. 이 등나무의 꽃잎을 말려 신혼부부의 베개에 넣어주면 부부의 애정이 두터워진다고 하며, 사랑이 식어 버린 부부가 잎을 삶아 먹으면 사랑이 되살아난다고도 합니다. 전설이나 설화가 비현실적이기는 하지만 사람이 지향해야 할 가치를 담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함께 놓고 견줘보는 무덤 세 자리 

 

이번 여행에서는 그럴 듯한 무덤 세 곳을 돌아보게 됩니다. 진덕여왕릉과 태종무열왕릉, 김유신장군 무덤입니다. 무심히 보면 별로 다르지 않고 같은 무덤입니다. 그렇지만 저마다에서 어떤 느낌을 받는지 생각하면서 돌아보면 재미가 더할 것입니다.

 

진덕여왕릉은 입장료가 없지만 태종무열왕릉과 김유신장군묘는 입장료를 받습니다. 어른 500원, 청소년 300원, 어린이 200원이랍니다. 진덕여왕릉은 구미산지구에 들고 나머지는 그렇지 않습니다.

 

진덕여왕릉.

 

먼저 찾아가는 경주 진덕여왕릉(사적 제24호). 진덕여왕은 선덕여왕에 뒤이은 신라 두 번째 여왕으로 본명은 승만(勝曼)이며 마지막 성골 출신 임금이지요. <삼국사기>는 “타고난 자질이 풍만하고 고우며, 키가 일곱 자나 되고 손을 내리면 무릎 아래까지 내려갔다”고 했습니다.

 

진덕여왕은 김춘추와 김유신의 보좌를 받으면서 나라를 다스리는 7년 동안 반란을 진압하고 백제의 공격을 막아내고 안으로 힘을 기르는 한편 대당 외교를 통해 고구려와 백제를 적절하게 견제했습니다. 진덕여왕은 삼국통일의 기초를 닦은 임금이라는 평가를 받지요.

 

진덕여왕릉에는 꾸밈, 장식이 별로 없습니다. <삼국사기>는 임금이 죽자 ‘진덕(眞德)’이라 하고 사량부에 장사지냈다고 합니다. 사량부는 경주 서남쪽 일대로 짐작되는데요, 지금 있는 무덤과는 정반대 방향입니다.

 

진덕여왕릉 호석.

 

무덤 형식도 제33대 성덕왕 이후에 발달한 그런 양식이고요, 12지신상의 조각수법도 신라왕릉의 12지신상 중 가장 뒤늦은 것이라 합니다. 이를 들어 진덕여왕의 무덤이 아니라는 주장도 있습니다. 경주에 있는 수많은 능들 가운데 주인을 정확하게 아는 경우보다 그렇지 않은 경우가 더 많다고 하지요. 진덕여왕릉도 그렇답니다.

 

여기 왕릉은 경주 다른 왕릉과 마찬가지로 느낌이 좋습니다. 걸어 들어가는 둘레 솔숲도 멋지고 가로세로 지르며 이어지는 오솔길은 오히려 다른 어떤 왕릉보다 걷는 사람 기분을 좋게 해준답니다.

 

진덕여왕릉 가는 길 솔숲.

 

맑은 하늘 아래 내려쬐는 햇살, 어둑어둑한 솔숲 그늘에서 바라보니 무덤 자리가 더없이 환합니다. 한참 머물다 내려와도 좋은 자리였습니다.

 

진덕여왕릉에서 바라보는 솔숲.

 

진덕여왕릉을 떠나 경주시내로 들어오는 어귀에 태종무열왕릉이 있습니다. 첫날 일정은 이쯤에서 마무리하고 저녁과 잠자리는 경주시내에서 마련하면 적당하겠다 싶었습니다.

 

진덕여왕에 이어 등극한 태종무열왕 김춘추는 진골 최초 임금으로 백제는 멸했으나 삼국통일을 보지는 못했습니다. 김유신 장군과 더불어 삼국통일의 주인공으로 꼽힙니다.

 

또 우리 역사상 조종(祖宗)법 묘호를 받은 첫 임금입니다. 임금이 세상을 떠난 뒤에 붙이는 이름인 묘호(廟號)에, 조(祖)나 종(宗)이 들어간 첫 보기라는 얘기이고, 이는 아주 대단하게 대접을 받았던 것입니다.

 

태종무열왕릉과 오른쪽 왕릉비각.

 

그런데도 그이가 묻힌 태종무열왕릉(사적 제20호)은 다른 무덤들보다 장식이 소박해 아랫도리를 두르는 호석(護石)조차 없답니다. 덕분에 왕릉을 둘러싼 울창한 솔숲이 한층 선명하게 다가옵니다. 밑둘레 114m, 높이 8.7m로 크기는 한데 아래쪽은 자연석을 쌓고 드문드문 큰 돌로 받쳤다고 합니다.

 

 

 

이런 자연스러움이 오히려 사람을 편하게 하는 구석도 있는 것 같습니다. 들머리 국도 4호선은 무열왕릉과 형산강 쪽으로 붙어 있는 후손들 무덤을 나눠주는데 사람들은 대부분 여기만 둘러보지 거기까지 걸음하지는 않습니다.

 

태종무열왕릉은 신라 경주에서 주인공이 뚜렷하게 확인되는 유일한 왕릉이라 합니다. 바로 앞에 있는 태종무열왕릉비(국보 제25호) 이수에 ‘태종무열대왕지비(太宗武烈大王之碑)’가 새겨져 있는 덕분입니다.

 

이 빗돌은 맏아들 법민(=문무왕)이 왕위에 오른 해(661)에 아버지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세웠고 글씨는 둘째 아들 인문이 썼습니다. 귀부는 조각이 섬세하고 군더더기가 없습니다. 여섯 마리 용이 새겨져 있는 이수는 화려하고 웅장하며 사실적이고 역동적입니다.

 

살아 움직이는 생동감에서 사람들은 삼국통일을 이룩한 신라인들의 진취적 기상을 느낄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태종무열왕릉을 돌아보고 나서 가까이 있는 김유신 장군묘까지 둘러보면 어쩔 수 없이 고개를 갸웃거리게 됩니다.

 

신하인 장군의 무덤이 어째서 임금인 왕릉보다 화려할까 하는 것입니다. 김유신장군묘(사적 제21호)는 밑둘레가 50m, 높이가 5.3m로 무열왕릉보다 규모는 작지만 장식이 대단합니다. 왜 그럴까요? 두 무덤을 한 데 놓고 이리저리 견줘보면 또 다른 상상력이 이렇게 발동됩니다.

 

삼국통일의 주인공 김유신은 진평왕부터 문무왕까지 신라 임금 다섯을 섬긴 인물입니다. <삼국사기> 김유신 열전을 보면 “(문무왕은 김유신의) 부고를 듣고 몹시 슬퍼했으며 채색 비단 1000필 벼 2000섬을 주어 장사 비용에 쓰게 하고 군악대 100명을 보내어 주악하게 했으며 금산 언덕에 장사지내게 하고 맡은 관원에게 비석을 세워 공적과 명성을 기록하게 했다. 또 민호(民戶)를 정해 보내서 무덤을 지키게 했다.”고 적혀 있습니다.

 

과연 이러했으니 무덤이 왕릉보다 더 꾸며졌다 해도 이상한 노릇은 아닙니다. 하지만 이런 측면은 있지 않았을까요? 태종무열왕과 김유신의 영향력은 대단했을 것입니다.

 

김춘추와 아들 법민(=문무왕) 그리고 김유신이 적대 관계는 아니지만 김춘추의 영향력은 죽고 나서 자연스럽게 아들인 문무왕에게로 수렴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이것이 문무왕으로 하여금 아버지의 무덤을 크게만 짓고 장식은 하지 않은 까닭이 되지 않았을까요?

 

반면 김유신의 영향력은 문무왕에게 바로 수렴되기는 어려웠을 것입니다. 김유신의 영향력은 바로 여러 자손과 신하들에게로 미쳤을 테고요 그이들을 추슬러 임금에게로 향하게 하는 데 김유신 무덤 화려한 꾸밈이 소용되지 않았을까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하는 것입니다.

 

물론 전쟁을 하고 있느냐 아니냐도 조금은 영향을 미쳤겠습니다. 태종무열왕릉을 만든 661년은 겨우 한 해 전 백제가 멸망했을 뿐이었고요 김유신이 죽은 673년은 백제에 이어 고구려까지 멸망(668년)한 뒤였습니다. 물론 당나라를 상대로 한 전쟁은 끝나지 않고 있었습니다. 대동강 이북으로 당군을 축출하는 일은 676년 마무리됩니다.

 

 

신하인 장군 무덤이 지나치게 화려하다 보니 해 보는 생각들이랍니다. 김유신은 후대에 임금으로 추존된 하나뿐인 신하입니다. 사후 150년 즈음인 흥덕왕 때 흥무대왕(興武大王)으로 올렸습니다.

 

김유신 무덤은 십이지신상 호석(護石)이 가장 눈에 띈답니다. 머리는 짐승이고 몸은 사람인데, 모두 문관 차림에 무기를 들고는 오른쪽을 향해 몸을 살짝 비틀었습니다. 얕게 새겼지만 솜씨는 매우 세련돼 있다는 평을 받습니다.

 

 

경주에는 여기 말고 앞서 들른 진덕왕릉을 비롯한 다른 여러 왕릉에도 지신상이 있지만 어느 것도 김유신 장군 묘의 그것을 넘어서지는 못한답니다.

 

마지막 들르는 데는 국립경주박물관입니다. 국립중앙박물관 다음으로 규모가 크고 또 잘 알려져 있는 박물관입니다. 사철 내내 수학여행이나 체험학습을 온 학생들도 발 디딜 틈이 없습니다.

 

 

학생 아닌 사람들도 많이 오고 외국 사람들도 많이 들릅니다. 박물관의 대중화에 이바지한 공이 크다고 하지 않을 수 없겠습니다. 어쩌면 여기 있는 유적·유물을 살펴보는 것만 해도 하루이틀 갖고는 모자랄 것입니다. 입장료는 받지 않으며 월요일은 쉽니다.

 

김훤주

 

※ 2012년 문화재청 비매품 단행본 <이야기가 있는 문화유산 여행길 경상권>에 실은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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