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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창녕 당일치기 명품 나들이길은?

김훤주 2014. 4. 2. 1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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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이웃 고을 마실가자 ① 경남 창녕

 

경남도민일보와 갱상도문화공동체의 '이웃 고을 마실가자'는, 영남권과 호남권의 자치단체와 경남 지역 주민 모두를 위해 마련했습니다. 자치단체는 자기 관광 명소와 먹을거리를 비롯해 특산물을 알리 경남 주민들은 여행을 통해 삶을 좀더 풍요롭고 빛나게 하는 기회가 될 것입니다.

 

자치단체와 협의가 되면 경남도민일보는 지역민과 더불어 해당 지역 역사·문화·생태·인물을 탐방하고 거기 볼거리 들을거리 먹을거리 누릴거리들을 알려줍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더욱 가까워질 수 있고 서로에게 도움과 보탬이 되는 존재가 될 것입니다.

 

1. 어른도 신나게 하는 산토끼노래동산

 

창녕 장날은 3일 8일이랍니다. 장날에 맞춰 창녕을 3월 28일 찾았습니다. 일행 마흔 명과 함께 가장 먼저 들른 데는 '산토끼노래동산'이지요. 이방초등학교 위에 있습니다. 작사·작곡가 이일래(1979년 타계)씨가 일제강점기 이 동요를 이방보통학교 교사로 있으면서 만든 사실을 바탕해 조성했습니다.

 

 

2013년 11월 문을 열었는데 무려 110억원을 들였다고 합니다. 그런 만큼 아이들이 와서 즐겁게 배우고 놀 수 있도록 많은 체험장·쉼터·학습장·동요관·놀이터 따위가 제대로 들어서 있습니다.

 

유치원과 초·중학생들은 당연히 여기 와서 즐겁게 시간을 보낸답니다. 지난 일요일에는 오후에만 4000명 넘는 인파가 몰렸다고 하지요. 하지만 즐겁게 노니는 것은 아이들만이 아니었습니다.

 

 

사진 찍기 싫어하는 이들은 빠졌습니다.

 

이번에 찾아간 일행은 대부분 40대 이상이었는데요, 이들 또한 여기서 아주 즐거워했거든요. 여러 가지 토끼들 귀여운 모습에 곳곳에서 웃음이 터졌고 해설을 맡은 직원의 얘기에 귀를 쫑긋 기울였습니다. 여태껏 잘못 알았거나 몰랐던 토끼 생태에 대해 들을 때는 감탄이 터져나오기까지 했습니다.

 

산토끼 노래를 넋 놓고 따라 부르는 사람도 적지 않았고요 어떤 이는 노래 곡조를 따라 지휘하는 시늉까지 내면서 즐거워했습니다. 어른들에게도 '산토끼 동요 감성'이 내장돼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다 유치원 아이들이 쏟아져오자 어른들은 더욱 신이 났습니다. 토끼들도 귀엽지만, 어른들은 사람 아이들을 더욱 귀여워하면서 웃음을 멈추지 못했던 것입니다.

 

2. 전환기 여러 양식이 함께하는 성씨 고가

 

석동 성씨 고가에서는 그 크기에도 감탄했지만 잘 가꿔진 모습에서 한 번 더 감탄했습니다. 1850년대부터 일제 강점기에 이르기까지 차례차례 지어진 집으로 모두 더하면 서른 채가 넘고 한 칸 두 칸 따져도 130칸을 웃돌거든요.

 

경근당. 마루에 바깥창이 있고 오른쪽 뒤편에는 측간을 뒀습니다.

 

아석헌·구연정·석운재·경근당·일신당 등 다섯으로 구분되는데요, 전체 규모도 커지만 남다른 특징이 있기 때문에 더욱 눈길을 끈다고 합니다. 전통 한옥 양식에 더해 일본식·서양식 건축 기법이 더해진 전환기의 모습을 보인다는 점이랍니다.

 

측간(화장실)이 안채에 들어앉아 있다든지, 추녀 끝에 빗물받이를 해달았다든지, 대청마루에 바깥창을 덧대었다든지……. 안마당에 자리잡은 곳간도 전통 양반 가옥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모습입니다. 실용을 중시하는 가풍 또는 시대 정신이 반영됐지 싶습니다.

 

일행들은 이런 특징이나 규모에도 관심을 보였지만 손색없고 흠결없이 잘 가꿔져 있다는 사실에 더욱 눈길을 두었습니다. 어떻게 이렇게 깔끔하게 관리할 수 있는지 모르겠다는 얘기를 나눈 것입니다. 국가나 자치단체만이 아니라 성씨 집안의 애씀이 틀림없이 있다고 봐야겠지요.

 

그러고 보니 이 남향인 집에 내려앉는 볕발이 더욱 따스하고 고왔답니다. 뒤쪽 대숲 사이를 걸을 때는 머리가 청신해졌고요 일신당 앞 연못 둘레에서는 모두들 사진을 찍느라 바빴답니다. 그러고는 모두들 대청마루에 앉아 일어날 줄을 몰랐습니다.

 

뒷동산 대숲.

 

사진 오른쪽으로 연못이 있는 일신당을 지나는 모습.

 

3. 석빙고·동탑·하병수초가 어우러진 장터

 

화왕산 장마을 밥집에서 막걸리·파전·청국장을 맛나게 먹고는 창녕석빙고를 거쳐 장터로 향했습니다. 석빙고는 뒤로는 시내를 끼고 앞으로는 높아지도록 기울어져 있습니다. 옛날 겨울철 한 데서 얼음을 얻기 쉬워야 했고 여름철 얼음이 녹으면 물이 빠지기 쉽도록 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창녕석빙고는 우람한 편입니다. 같은 고을 영산석빙고는 물론 경북 청도나 대구 현풍의 석빙고와 견줘도 그렇습니다. 그만큼 창녕 물산이 예로부터 풍성했다는 증거로 여겨도 좋을 것 같습니다.

 

장터 구경은 즐거웠습니다. 들머리부터 새끼오리·병아리·강아지 따위가 그런 느낌을 준답니다. 일행 가운데 일부는 석빙고 따위 문화재 구경은 뒷전으로 하고 장터로 바로 스며들었습니다.

 

나중에 보니 까만 비닐 봉지를 다들 두엇씩 들고 있었고요. 대부분 나물이었고 어떤 이는 쑥떡 같은 것을 장만하기도 했습니다.

 

장터 끄트머리에는 술정리동삼층석탑과 하병수초가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동탑을 멀리서 가까이서 바라보고 커다란 통돌로 만들어진 석재 크기를 가늠해보기도 했습니다.

 

술정리동삼층석탑.

 

거기 기단석에 나 있는 우물구멍, 40년 50년 전에 그리고 그 이전 조선 시대 고려 시대까지 동네 아이들이 소꿉놀이하면서 내었던 자취에다도 눈길을 던집니다.

 

하병수초가 안채 마루에 앉아서.

 

하병수 초가도 그 집 인자한 어르신 허락을 받아 한 바퀴 둘렀습니다. 디딜방아도 좋고 길게 튀어나온 추녀가 만든 짙은 그늘도 누리고 뒤뜰 꽃밭 파릇한 새싹까지 느낌에 담았답니다.

 

4. 관룡사·용선대, 신돈이 나고 자란 옥천사지

 

관룡사와 용선대는 따로 설명이 필요없을 정도로 이름난 곳이지요. 크지는 않지만 스스로도 둘레 풍경도 아름다운 관룡사, 무척 많은 보물 문화재를 품은 관룡사, 요즘 들어 대웅전 후불탱화까지 보물로 지정된 관룡사를 느긋하게 둘러보고 일행들은 용선대로 올라갔습니다.

 

관룡사 법고. 괴수(怪獸)가 웃고 있나요? 화내고 있나요?

 

물론, 여기저기 솟아난 쑥·냉이·달래 따위에 마음을 빼앗긴 이들은 가지 않고 주저앉아서, 갖고 온 보자기 배를 불렸고요. 용선대에서 멋진 석가여래가 바라보는 동짓날 해뜨는 데를 함께 눈길 맞추며 탁 트인 픙경을 누린 다음에는 아래 옥천사지로 향했습니다.

 

옥천사는 신돈(?~1371) 때문에 망했습니다. 이렇게 처절하게 망한 절터는 천하에 다시 없을지 모릅니다. 제대로 놓인 돌조각이 석탑·석등은 말할 것도 없고 다른 것도 전혀 없습니다. 옛날 살림살이로 썼음직한 연자멧돌조차 뒤집어진 채 처박혔습니다.

 

옥천사지. 보이는 돌 대부분이 옥천사를 구성했던 석재들입니다.

토지를 차지하고 양민을 노비로 삼았던 당시 권문세족들이 신돈으로부터 공민왕의 신임을 물리고 목숨을 날린 다음 태어나 자란 여기 옥천사까지 깡그리 뒤집어버렸던 것입니다.

 

법명이 편조(遍照), 그러니까 골고루 비춘다고 했던 신돈. 700년 가까이 세월이 흐른 지금 사람들은 조금은 무심한 채 '너무 했네', '나쁜 사람들'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러는 사이에 무심한 해는 조금씩 서산 너머로 기울고 있었습니다.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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