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헌섭 두류문화연구원 원장

 

최헌섭 두류문화연구원 원장은 경남에서 알아주는 고고학자입니다. 올해로 29년째이니 중견이라는 말로는 어쩌면 모자랄 수도 있겠습니다.

 

당장 소득이 돌아오지 않는데도 자기가 갖춘 지식과 경험을 지역 사회와 나누고 있습니다. 별다른 조건 없이 지역 사회가 요청하면 그대로 응하는 것입니다.

 

아울러 오늘날과 옛날의 지역 사회 모습을 찾아내어 기록하는 노력도 게을리 하지 않습니다. 갈수록 자취를 찾기 어려워지는 옛길과 4대강 사업으로 하루하루 원형이 무너지던 낙동강 물줄기를 따라 걷는 것이랍니다.

 

 

2009년까지와 2009년부터

 

최 원장에게는 2009년이 분기점이었습니다. 전에는 이런 일들을 하고 싶어도 실행에 옮길 수가 없었습니다. 경남도의 공식 도정 연구기관인 경남발전연구원 소속이었기 때문이지요.

 

“지금도 있는데, 경남발전연구원에는 역사문화센터가 있어요. 발굴 등 문화재 조사·연구를 하는데, 2000년 즈음 들어가 조사연구부장을 거쳐 마지막 3년은 센터장을 하다가 2009년 그만뒀습니다. 잘 나갔지요. 한 해 매출액이 60억원 수준에 이를 때도 있었으니까요.

 

 

왜 그만뒀느냐고요? 센터장이 되면 연구원 지침을 따라야 하거든요. 지침을 따르는 것은 좋은데 그게 자율성이 보장되지 않고 원장이 바뀔 때마다 틀도 바뀌었어요.

 

까닭은 원장 채용 방식에 있습니다. 김혁규 도지사 시절까지는 원장을 형식적이나마 공채로 뽑았는데, 2004년 김태호 도지사가 들어서면서 임명제로 바뀌었습니다. 이게 나쁜 전통이 돼 갖고 지금껏 이어지고 있습니다.

 

2010년 당선된, 그나마 민주적이라는 김두관 도지사가 아쉬운 것이, 임명제를 그대로 가져갔다는 점입니다. 지금이라도 누군가 나서 공채로 바꾸기 바랍니다. 임명제는 원장 임기도 보장이 안 됩니다.

 

게다가 사무국장은 도청 간부 공무원 가운데 은퇴를 1년 정도 앞둔 사람이 와서 합니다. 사무국이 흔들립니다. 원장 오고 사무국장 따로 오고 어긋나게 임명돼 들어오면 제대로 일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것만이 전부는 아니었다고 합니다. 임명돼 오는 원장 체제 아래에서 업무 말고 다른 요구를 하고 해서 불만이 있었던 데 더해 4대강 사업이 낙동강을 뒤집어 바꾸려 하고 있었습니다. 마침 같은 2009년이었습니다.

 

 

“4대강 사업이 진행될 때, 이런 걱정을 했어요. 4대강 사업 현장 문화재 조사 사업을 무슨무슨 문화(재)연구원 같은 민간 법인에서 아무도 하지 않으려 하면, 역사문화센터가 준정부 기관이니까 해야 할 텐데, 나는 하기 싫은데 어떻게 해야 하나 하고 말입니다. 신분이 준공무원이었으니까요. 그래서 아내 동의를 얻어 사표를 냈습니다.

 

그런데 다른 민간인 신분 연구원들이, 돈 되니까 다해 버렸어요. 정치권은 물론이고 환경·시민단체들이 그에 반대하는 목소리들을 격렬하게 내고 있었고, 그래서 연구원들이 절반 정도는 치열하게 싸우고 하는 사람이 있을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낙동강 유역권 연구원 가운데 거기 안 가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다들 발굴 조사를 연구가 아니라 돈으로, 사업으로 보는구나’ 싶었지요. 물론 이해는 됩니다. 먹고 살아야 하니까요. 하지만 그렇다 해도 그것만으로 모두 정당화되지는 않는 노릇이지요.

 

4대강 사업을 하면 ‘현상 변경’이 됩니다. 현재 이렇게 벌어지는 일을 기록하는 것이 바로 역사인데 이것을 아무도 기록할 사람이 없을 것 같았습니다. 낙동강 전역을 모두 하고 싶었지만, 능력에는 한계가 있잖아요? 경남만이라도 하자, 싶었지요.”

 

옛길과 낙동강에 대한 공부와 기록

 

최 원장은 이듬해인 2010년 3월 <자여도-세월을 거슬러 길을 걷다>라는 책을 펴냅니다. ‘자여도(自如道)’는, 창원 동읍에 있던 자여역을 중심에 두고 동서남북으로 뻗어나가는 조선 시대 옛길을 이릅니다.

 

자여역을 비롯해 근주·창인·대산·신풍·파수·춘곡·영포·금곡·덕산·생법·적포·안민·보평·남역 등 15개 역과 그런 역들을 잇는 길이 있었습니다.

 

 

<자여도> 첫머리는 당시 상황을 얘기하고 있습니다.

 

“이 책자는 지난해(2009년) 가을에는 세상에 나왔어야 했다. 책을 마무리해 갈 즈음에 한가위를 맞았고, 그 무렵 온 나라가 4대강 사업으로 들끓고 있었다. …… 몹쓸 사업으로 강의 경관이 시시각각 바뀌고 있기에 마음은 벌써 내 삶터 주변만이라도 기록하라고 종종대었다. 서둘러 나서지 않으면 물가의 경관은 원래의 모습을 잃을 터, 일을 덮고 강바람을 맞으러 나섰던 까닭에 이제야 출판의 기회를 갖게 된 것이다.”

 

현장에서 보고 들은 눈물겨운 장면들

 

최 원장은 처음에는 현장을 몸소 걸어다니며 보고 듣고 기록하려 했습니다. 하지만 4대강 사업이 보폭을 맞춰주지 않았습니다. 속도전이 붙어 도저히 걸어서는 따라갈 수 없었던 것입니다. 최원장은 결국 자전거를 타고 다니면서 했습니다.

 

“눈물 나는 장면도 많았습니다. 농사짓는 이들이었습니다. 아무 힘없는 개인 최헌섭일 뿐인데 제게 하소연을 했습니다. 4대강 사업으로 둔치 농지에서 쫓겨나게 됐다고요. 둔치에서 1만평 하던 사람이 제방 너머 농지는 1000평도 못 빌린다는 것입니다.

 

소유권이 국가 또는 지방자치단체에 있는 둔치를 빌려 농사를 지었는데, 조그만 보상을 받고 쫓겨나다 보니까 제방 너머 농지는 수요가 많아져 임대료가 엄청나게 올랐습니다. 그러니까 토지 소유자는 더욱 부자가 되고 임차농은 다시 가난해지는…….

 

김해시 대동면 매리에서 산딸기 농사를 하는 이를 만났는데, 심은 지 5년은 돼야 열매가 제대로 열리는데, 막 그렇게 될 즈음에 쫓겨나게 됐다고요. 싸구려 보상금을 갖고는 10분의1도 농지를 얻을 수 없으니까.

 

김해시 대동면 조눌리에서 만난 쌈채소를 하는 할머니는 제게 하소연을 했습니다. 뉴트리아를 수달로 착각하고 사진을 찍다가 그 할머니한테 물었더니 뉴트리아라고 했습니다. 저게 농토를 망치고 둔치를 망친다 했습니다.

 

그러더니, ‘진짜 망치는 사람은 이거(4대강 사업) 하는 사람이다, 제발 힘 있는 사람이 이걸 좀 말려달라’고 사정을 하더군요. 할머니 저 힘없습니다. 대신 본 것을 정확하게 전달하도록 애쓰겠습니다, 이리 말할 수밖에요.”

 

 

이런 답사와 기록은 최 원장이 2010년 3월부터 2011년 12월까지 경남도민일보에 ‘낙동강을 품는다’는 제목으로 26차례 글을 연재하는 바탕이 됐습니다. 최 원장은 첫 글에서 ‘저와 함께 낙동강을 따라 걸으며, 강이 가진 참 모습을 눈으로 보고 머리로 깨닫고 가슴으로 느끼시길 바란다’고 했습니다.

 

최 원장은 이렇게 안정된 직장과 넉넉한 보수를 포기했습니다. 대신 몸소 발품을 팔아 건져올린 소중한 기록들을 남기기 시작했습니다. 단행본 <자여도>가 그렇고 경남도민일보 연재물 ‘낙동강을 품는다’가 그렇습니다. 2011년 연재를 시작해 지금껏 56회까지 이어온 ‘통영로 옛길을 되살린다’도 있습니다.

 

최 원장은 <자여도>에서 “옛 역도와 각각의 역을 잇는 길에 대해 조사·정리하기 시작한 지 벌써 다섯 해가 더 지났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지금부터 10년 전에 이처럼 옛길을 찾아나서기 시작한 셈이 됩니다.

 

최 원장은 “앞으로 황산도-소촌도-사근도를 걸으며 조사”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지금 의창사회교육센터에서 그 구성원들과 함께 소촌도를 답사하고 있습니다.

 

두류재·두류문화연구원과 ‘두루두루’

 

연구원 2014년 시무식. 두류문화연구원 홈페이지에서.

 

대가는 치러야 했습니다. 아내한테 벌이가 있어서 살림을 책임져야 할 지경은 아니었지만, 1년 남짓을 수입이 없이 견뎌야 했습니다. 최 원장에게는 그 때가 가장 가난한 시절이었답니다. 물론 집에서 돈을 타서 생활하지는 않았다고 합니다.

 

“창원 북면 신촌마을에 허름한 사무실을 하나 얻었어요. 이따금씩 생기는 발굴·조사 관련 회의에 참석해 회의비나 수당 받아서 월세 내고 밥값 대고 기름값 쓰고 했지요. 당시 팔룡동에 집이 있었는데요, 자전거로 출퇴근했습니다.

 

용강검문소 있는 고개가 길고 가파르잖아요. 말은 건강에 좋으라고 자전거 탄다고 했지만 교통비 아끼려는 목적도 있었어요. 처음에는 단번에 넘을 수 없었어요. 나중에 허벅지 근육도 탄탄해지고 나서는 한 번도 쉬지 않고 넘을 수 있었습니다.

 

지금 바탕이 마련된 시기이기도 합니다. 평생 못 읽은 책을 그 때 다 읽었지요. 스스로 긴장을 늦추지 말자는 뜻도 있었는데, 무슨 일이 있어도 출근은 정시에 했고, 손님이 찾아오거나 다른 약속이 없는 이상은 저녁 8시나 9시까지 남아 있었습니다.”

 

 

최 원장은 당시 혼자서 외롭게 지키던 그 사무실에 두류재(頭流齋)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지리산의 다른 이름인 두류산, 그리고 그 지리산을 좋아했던 남명 조식을 뜻한답니다. 남명 선생은 최 원장이 사표(師表)로 삼고 있는 인물입니다.

 

“말장난 같지만 ‘두루두루’라는 뜻도 있어요. ‘소통’이지요. 학문을 하는 데서는 옹색하게 한쪽으로만 갖고 나가지 말자는 얘기지요. 깊이는 얕아질는지 모르지만 한국학 전반으로 넓히자는 취지입니다.

 

또 저마다 갖고 있는 바를 ‘두루두루’ 나누자는 것도 됩니다. 우리 집단에서 다른 집단과 두루두루 말입니다. 저희 연구원 건배사도 그래서 ‘두루두루!’입니다.”

 

지역 사회를 위하고자 하는 연구원

 

지금 그이가 운영 책임을 지고 있는 두류문화연구원의 두류는 뿌리가 두류재입니다. 2010년 9월 3일 만들어진 재단법인으로 김해에 있는데 이듬해 1월 15일 문화재청으로부터 발굴조사 전문 기관으로 인정받았답니다. 매장문화재 발굴·조사 자격이 생겨 돈벌이를 할 수 있게 됐다는 얘기입니다. 신생 기관이라 그런지 사정이 아직은 어렵습니다.

 

“그 친구들이 찾아왔어요. 다른 연구원에 있던 친구들이지요. 자기가 소속돼 있는 연구원의 대표들이 자기가 애써서 벌어놓은 돈을 다른 데 쓰는 것 같다고 여기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말하자면, 발굴을 해서 벌어들인 돈을 원장이 마음대로 처분한다고 말입니다.

 

벌어들인 돈을 자기네 생각하는 바대로도 고루 쓰이면 좋겠다는 그런 뜻으로 왔어요. 저말고 다른 사람도 찾아갔겠지요. 그런데 배짱이 맞지 않았던 것 같고, 또 자기네끼리만 해서는 될 것 같지 않은데다가, 적어도 최헌섭이는 혼자 뜻대로 억지로 끌고 가지는 않을 것 같다는 판단도 했겠지요.

 

단지 발굴해 돈만 버는 데서 벗어나, 지역 사회를 위하는 일이나 학술 연구를 주체적으로 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지요. 물론 저도 하나 만들어야겠다고 여기고는 있었어요. 한 집안의 경제를 책임지고 있었으니까, 그 때까지 가족들이 잘 참아줬습니다.”

 

답사·강의는 물론 감밭과 지하 공간 내놓기까지

 

최 원장은 이런 상황에서 지역 사회를 위해 자기를 내어놓고 있습니다. 2010년부터 경남정보사회연구소에서 답사를 이끌기도 하고 다양한 방법으로 역사 강의도 하고 있습니다. 충분한 보수를 받는 일이 아니고 때로 무료로도 한답니다.

 

지역 역사 등을 공부하는 주민 모임도 꾸리는 중입니다. 부친이 터잡고 사시는 창원시 동읍 용전마을 감나무밭이랑 논밭도 활용하라 내어놓고 나아가 가음동에 있는 자기 집 지하 공간도 지역 사회를 위해 거저 제공할 뜻이 있습니다.

 

“저 나름대로는 전략입니다. ‘최헌섭’ 하면 두류문화연구원 원장, 항상 이렇게 인식되도록 하는 것입니다. 큰 기업들처럼 광고를 하고 다닐 수 있겠어요? 이런 식으로 알리고 다니는 것입니다. 언젠가는 도움이 될 것입니다.

 

누구든지 이바지하고 살지 못하면 그게 사람이 할 일입니까? 알고는 싶은데 그 길을 몰라서 쩔쩔 매는 사람이 적지 않았습니다. 재능 기부라는 말을 쓰지는 않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게 그런 부분이니까요. 역사 수업 강의나 영화를 통해 역사를 읽어보는 일 같은 것 말입니다.

 

한편으로는 제가 많이 배웁니다. 가르치기 위해서는 더 많이 독서해야 합니다. 저도 공부 안 하면 모르거든요. 그리고 제가 먼저 나서서 하는 것도 아닙니다. 지역 사회에서 요구해 오면 그에 대응해 주는 정도라고 할까요?

 

감나무 한 그루당 일정 금액을 받고 한 해 동안 가꾸고 감을 수확하게 하고 있습니다. 손해는 아닙니다. 감나무도 좀 의미 있게 나누면 좋겠다 싶고, 논밭도 주말농장이나 체험공간으로 활용해 도시와 농촌이 함께 득보는 식으로 바꾸면 좋겠다는 생각입니다.

 

두류문화연구원 홈페이지에서.

 

가 경남정보사회연구소 이사를 맡은 지가 꽤 됐는데, 연구소가 금전에 엄청나게 구속을 당합니다. 한 달 회비 1만원씩 갖고는 안 됩니다. 분양한 감나무 한 그루에 1만원씩 기부를 합니다. 사람들 반응이 좋습니다. 앞으로 좀더 커질 수 있다고 봅니다.

 

저희 집 지하 공간도 지금 당장 식당으로 세를 놓으면 재산이 불어나는 보람은 있겠지요. 하지만 지역사회에서 의미 있는 공간으로 활용되면 좋겠습니다. 임대료는 나중에 수익이 생겼을 때 주면 됩니다. 그런데 그나마 엄두를 내는 사람이나 단체가 없네요.”

 

땅 위에 나 있는 길만 길이라고 하지는 않습니다. 학문을 하는 방향이나 인생을 사는 방향도 길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최 원장은 이렇게 길을 연구·조사하는 한편으로 이처럼 자기 삶과 학문에 새로운 길을 내고 있었습니다. 두루두루.~~~~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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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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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황규민 2014.03.04 20:3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멋있는 분이시네요.

  2. 임경남 2014.06.21 09:5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런 많은 분들이 알게 모르게 지역에서, 자기 삶터를 지키며 열심히 살고 있네요.
    존경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