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본 곳

경부선에 하나 남은 삼랑진역 급수탑

김훤주 2014. 2. 18. 16: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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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방 루트 

영남루→17.5km 삼랑진역 급수탑→2.8km 작원관지→13km 가야진사(원동면 용당리)→2.9km 원동습지(원동면 소재지)→임경대→13.3km 물금취수장 물문화 전시관→0.5km 양산용화사 석조여래좌상→34.2km 낙동강 철새 도래지→15.3km 구포 시장

 

물길 따라 사람 사는 자취를 더듬어보는

 

물은 생명의 근원이라고들 합니다. 세상 모든 문명은 물로부터 비롯되었습니다. 물이 있는 곳에 사람이 모여들어 삶의 터전으로 삼았고 문화가 꽃을 피웠습니다. 물길을 따라 사람들의 삶이 이어지고 흩어졌습니다.

 

물을 따라 사람살이의 자취를 더듬어 보는 여행길은 밀양 영남루(보물 제147호)에서 시작됩니다. 예로부터 산수 풍치 좋은 자리를 골라 정자와 누각이 들어섰습니다. 진주에서는 촉석루 앞으로 남강이 흐르고 평양에서는 대동강을 내려다보며 부벽루가 서 있습니다.

 

 

낙동강 지류인 밀양강 적벽 위 영남루에 서면 밀양시내와 막힘없이 흐르는 물줄기가 한 눈에 들어온답니다. 영남루의 매력은 첫째 그 웅장함에 있습니다. 기둥은 높고 기둥 사이 공간은 널러서 시원시원하답니다.

 

양 옆으로 능파당과 침류각을 거느림으로써 화려함과 웅장함을 더하고, 계단형 통로인 월랑으로 연결해 통일을 꾀했다고들 하지요. 당당하면서도 회화적 아름다움의 진수를 보여주는 조선 후기 목조 건축물의 걸작이라는 평가도 있고요.

 

영남루 이쪽저쪽 걸려 있는 현판들과 딸려 있는 건물들, 여기서 시문을 읊었던 이름 높은 옛적 사람들의 자취들, 아득한 시절부터 이곳에서 그들이 바라보았을 강물은 지금도 끊임없이 흐르고 있습니다.

 

영남루 뒤편으로 단군을 비롯해 역대 왕조의 영정과 위패를 모시는 천진궁(경상남도유형문화재 제117호)이 있습니다. 천진궁에 갔다가 돌아나서면 석화(石花)가 화사하게 피어 있는데 무심히 즈려 밟고 지나가면 꽃인지 돌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천진궁 만덕문

석화, 돌꽃입니다.

 

영남루에서 내려와 오른쪽으로 돌아나가면 밀양 아리랑비가 보인답니다. 세월이 지나면서 아랑각(阿娘閣:문화재 자료 제26호)에 서려 있는 아랑의 슬픈 전설도 이제 관광 상품이 되었습니다. 어디선가 커다란 봉황새가 날아와 춤을 추었던 자리 무봉사는 밀양강이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자리 잡았는데, 석조여래좌상(보물 제493호)이 모셔져 있답니다.

 

지금은 퇴락한 교통 요충 삼랑진 일대

 

삼랑진(三浪津)에서 삼랑은 밀양강과 낙동강이 만나서 이루는 세 물결이라는 뜻입니다. 삼랑진에는 밀양·동래·창녕·통영을 비롯해 일곱 곳 조세를 거두어들이는 조창이 있었답니다. 삼랑진읍은 영남에서 가장 큰 상업·교통 중심지이기도 했습니다.

 

삼랑진역은 경부선이 개통된 1905년에 문을 열어 여지껏 우리나라 철도 역사의 한 부분을 차지해 왔습니다. 그 세월만큼 숱한 이별의 사연들이 켜켜이 쌓였었겠지요. 아직도 구내에 남아 있는 증기기관차, 그것이 다니던 1920년대의 자취처럼 ‘이별의 삼랑진역’ 대중가요 가사 속 사연도 이제는 아련한 옛 이야기일 따름입니다.

 

궂은 비가 하염없이 쏟아지는 삼랑진역

니는 경부선 나는 경전선

울면서 헤어지던 날

얌새가 풀을 뜯는 언덕배기서

너랑 나랑 니캉 내캉 맺은 그 약속

아쉬움에 가슴을 치며

나는 마 통곡했다 아이가.

 

모래바람 몰아치는 안개 짙은 삼랑진역

니는 경부선 나는 경전선

운명이 엇갈리던 날

두 손을 흔들며 헤어지면서

잊지 않고 돌아온다 약속했지만

소식 한 장 없는 그 사람

니는 마 더욱 야속한기라.

 

삼랑진역 급수탑.

 

규모가 크고 중요한 역에는 증기기관차에 물을 채워주기 위해 급수탑이 들어서 있었는데, 삼랑진역도 그 하나였답니다. 이제는 온통 덩굴식물로 뒤덮이는 바람에 멀리서 보면 전설 속의 무슨 성처럼 덩그러니 서 있답니다.

 

경부선에서 유일하게 남은 이 삼랑진역 급수탑(등록문화재 제51호)은 1923년에 세워져 1950년대 디젤기관차가 나올 때까지 자기 구실을 다하다가 지금은 삼랑진역 명물로 거듭났습니다. 이와 함께 열차를 타려면 건너가야 하는 지하통로에는 옛 삼랑진역 흑백사진들이 걸려서 교통 요지 역할을 하던 호시절을 떠올리게 한답니다.

 

영남루에서 꽤 시간을 보냈다면 삼랑진 일대에서 하룻밤 묵는 편이 낫겠지요. 고급스런 숙박시설은 없어도 그럭저럭 지낼 만은 한 데가 요즘 시골 읍내 형편이라 하지요.

 

임진왜란 격전지 작원관 자리에서

 

작원관과 위령탑.

 

작원관지(경상남도문화재자료 제73호)는 관리가 머무는 원(院) 구실, 외적을 막는 관(關) 구실, 교역하는 나루로서 진(津) 구실을 두루 했던 곳이라 합니다. 지금은 인적조차 드물지만 한 때 한양에서 동래까지 이어지는 동래로의 요충지로 문전성시였습니다.

 

작원잔도는 문 하나로도 길을 막을 수 있을 만치 지세가 험해 한남문(捍南門)을 두고 남쪽의 적을 막았는데 지리(地利)를 살려 임진왜란 때 왜군의 진격을 막으려는 격전이 벌어진 장소랍니다.

 

위령탑에서 본 작원관과 낙동강. 작원관 임란용사위령탑.

 

임진왜란 당시 작원관 전투는 유명합니다. 밀양부사 박진을 비롯해 300군졸과 지역민 등 700명이 방어진을 치고 항쟁했으나 중과부적으로 400명이 숨지거나 다치고 밀양으로 후퇴했던 아픈 역사의 현장으로 작원관임란순절용사위령비가 높다랗게 세워져 있습니다.

 

작원관과 한남문은 임진왜란이 끝난 뒤에 세워졌다 합니다. 한남문은 일제강점기 원래 자리에서 조금 옮겨졌다가 1936년 7월 대홍수에 쓸려나갔다지요. 지금 여기 작원관은 원래보다 1.2km 정도 북서쪽으로 옮겨왔는데 1995년 밀양시가 만들었습니다.

 

비각 안 빗돌들.

 

작원관 옆 비각에는 가운데에 대홍수로 쓸려간 자리에 세웠던 작원관문기지비(鵲院關門基址碑)가 있고 왼쪽과 오른쪽에 작원진석교비(鵲院津石橋碑)·작원대교비(鵲院大橋碑)가 서 있습니다. 작원진석교는 2012년 발굴이 됐고 작원대교는 아직 찾기지 않았답니다.

 

한편 일제가 기찻길을 닦으면서 덮어쓰는 바람에 끊어진 줄 알려졌던 작원잔도가 최근 새로 발견됐다는 소식이 들려옵니다. 양산 원동의 가야진사 부근 황산잔도와 함께 이제 옛 모습을 찾을 수 있는 근거는 마련된 셈이랍니다.

 

한남문과 공운루.

 

잔도(棧道)는 강 따위를 따라 이어지는, 다니기 어려운 험한 곳에 만들어내는 길을 이릅니다. 때로는 비리(=벼랑을 뜻하는 경상도 지역말)길이라고도 하는데요, 작원 비리길이 얼마나 험했는지는 <동국여지승람> 기록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작원의 남쪽으로 5~6리를 가면, 낭떠러지를 따라 잔도가 있어 매우 위험한데, 그 한 굽이는 돌을 깨고 길을 만들었으므로 내려다보면 천 길 연못인데 물빛이 푸르고, 사람들이 모두 마음을 졸이고 두려운 걸음으로 지나간다. 예전에 한 수령이 떨어져 물에 빠진 까닭에 지금까지 원추암(員墜岩)이라 한다.”

 

목숨을 걸고 오갔던 이런 비리길에는 한 시절을 힘들게 살아냈을 민초들의 고단함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해야겠지요.

 

가야진사 있는 원동습지와 임경대

 

원동습지 가운데쯤을 가로지르는 콘크리트길을 따라 낙동강쪽으로 들어가면 가야진사(伽倻津祠:경상남도 민속자료 제7호)가 있지요. 뒤쪽 천태산과 강 건너 용산 사이 중간 지점으로 풍수지리상으로 땅의 기운이 모이는 곳이라 합니다.

 

가야진사 앞 용당나루와 맞은편 용산.

 

여기 나루는 이름이 용당인데, 가야시대부터 김해와 양산을 이어주는 통로였답니다. 기록을 따르면 신라와 가야가 세력 다툼을 하던 시절 이 나루를 거쳐 군사들이 오갔습니다. 낙동강 너비가 바다처럼 넓어져 버린 이곳이 옛날에는 주요한 수운(水運) 거점이었다는 것입니다.

 

한강·금강·곡천강(포항)과 더불어 철따라 국가 차원에서 제사를 지낸 네 곳(四瀆·사독)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범람을 막아주고 항해를 순조롭게 해주기 바라며 산 돼지를 희생 제물로 바쳤습니다. 원동의 좋은 물길과 풍요로운 범람이 이 같은 의식의 모태인 셈이랍니다.

 

가야진사 옆 모습.

 

원동습지는 경부선 철도 제방과 1022번 지방도로 둘러싸여 있습니다. 넓이는 20만평 가량이고요. 옛날에는 습지에서 논농사도 많이 했습니다. 홍수가 심했지만 3년에 한 번만 거둬도 소출이 많고 일손이 많이 가지 않아서였습니다. 요즘은 겨울 한 철 딸기나 채소 농사가 많습니다. 민물과 짠물의 범람이 잦은데도 생태계가 풍성하답니다.

 

낙동강 물길을 따라가는 어귀에 임경대(臨鏡臺)가 있습니다. 임경대는 최치원이 정자를 짓고 둘레 풍경의 아름다움을 누린 장소입니다. 밀양 삼랑진에서 1022번 지방도를 따라가다 보면 물금과 원동의 경계 지점 오른편에 육각 정자가 있습니다. 양산시에서 만든 것이지요.

 

임경대에서 보는 낙동강.

 

임경대는 여기서 200m 정도 떨어진 황산강(낙동강의 옛 이름) 동쪽 벼랑에 있습니다. 고운대 최공대(崔公臺)라고도 하는데 바위벽에 최치원의 시가 새겨져 있었으나 오래되어 살펴보기 어렵습니다. 물줄기를 내려다보면 풍경이 고고한 자리랍니다.

 

소설가 김정한 선생과 용화사

 

양산 용화사는 임경대 가까이에 있습니다. 여기 석조여래좌상(보물 제491호)은 대체로 온전한 편이며 광배에는 비천상이 새겨져 있답니다. 근방 불상 중 가장 오래된 양식으로 호분(胡粉)을 발랐다가 지워낸 자죽이 남아 있습니다. 

 

용화사 석조여래좌상.

 

용화사는 부산에서 활동한 소설가 요산 김정한의 소설 ‘수라도(修羅道)’의 배경지로 더 잘 알려져 있습니다. ‘수라도’는 일제강점기부터 광복까지 일대 민중들이 겪은 고초를 실감나게 표현한 작품으로, 소설 속 배경이 실제 이 지역과 맞아떨어지게 그려져 있답니다.

 

부산에 수돗물을 대어주던 물금취수장 물문화전시관도 둘러볼 수 있습니다. 물문화전시관 바로 아래 굴다리를 지나면 용화사인 것입니다. 1969년부터 2001년까지 운영하던 취수장을 수돗물이 만들어지는 과정과 물의 순환을 알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들었습니다. 늘 가까이 있는 것이라 오히려 둔감해져 버린 수돗물에 대해 제대로 알게 된답니다.

 

용화사 전경. 조그맣습니다. 옛 한글와 한자로 새긴 오래된 빗돌.

 

만약 밀양 영남루에서 발길을 서둘러 한 달음에 여기까지 왔다면 부산에 들어가 잘 곳을 찾으면 딱 맞겠습니다. 그러려면 아무래도 발품을 좀더 팔아야 하겠지요.

 

을숙도, 그리고 낙동강 하구둑

 

낙동강 끝자락 을숙도를 비롯한 낙동강 철새 도래지(천연기념물 제179호)는 다들 새들의 낙원이라 합니다. 새들은 모래언덕을 중심으로 둘레 갯벌을 따라 먹이를 찾아다닌답니다. 낙동강 철새 도래지는 부산과 김해평야 사이 넓은 하구 지역으로 수많은 삼각주와 모래언덕이 있습니다.

 

대표 철새 고니를 새겼습니다. 에코센터에서 보이는 풍경.

 

아직 개간하지 않은 갈대밭이 너르고 물 속에 사는 생물들도 풍성해 물새들에게는 이보다 더한 안성맞춤이 없습니다. 봄·가을에는 도요새와 물떼새 따위들이 거쳐가고 겨울에도 거의 얼지 않아 11월부터 3월까지 겨울철새가 많이 모여든답니다.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재두루미·저어새·고니 등이 보이며, 제비물떼새, 넙적부리도요 같은 보기 드문 새들도 눈에 띕니다. 일본과 러시아를 잇는 지역으로 철새들의 국제적인 이동에 매우 중요한 구실을 한답니다.

 

낙동강하구에코센터에서는 바라본 철새도래지 풍경.

 

그러나 철새들의 종류나 규모가 예전만 못하답니다. 환경이 오염됐음은 물론이고 하굿둑 공사로 짠물과 민물이 뒤섞이는 기수역이 사라졌습니다. 하굿둑 아래는 바닷물이 넘실거리지만 하굿둑에 막혀 위로 오르지 못합니다. 그래서 하굿둑 위는 민물 호수가 되고 말았습니다.

 

낙동강 하구 에코센터 탐방로.

 

인간은 좀 더 안락하고 편리한 삶을 향해 끝없이 나아가고 있습니다. 철새들이 자꾸 줄어들고 있는 낙동강 여기 이 끄트머리에서, 잘 산다는 것에 대한 제대로 된 이해와 자연과 인간의 공존 필요성에 대한 인식이 절실함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 낙동강 하구 에코센터가 있는데 1월 1일과 월요일(월요일이 공휴일이면 그 다음날) 쉰답니다.

 

400년 역사 품은 구포시장에서

 

낙동강 따라 가는 마지막 여정은 구포시장이랍니다. 이를 두고 뜻밖이라고 여기는 이가 많을 듯한데요, 하지만 물과 연관해 조금 생각해보면 전혀 뜻밖이 아님을 알 수 있답니다. 지금은 아니지만, 구포가 옛적에는 국수로 널리 이름을 알렸거든요. 국수 공장은 물이 풍부하고 좋은 곳에 들어섭니다. 옛날 구포는 물이 아주 좋기로 유명했답니다.

 

 

400년 전부터 감동나루와 감동창이 있던 강가에 장이 섰기 때문에 이름도 감동장이었습니다. 감동(甘東)은 구포의 옛 이름이라 합니다. 부산의 감동나루는 경남 합천 밤마리나루 경북 상주 낙동나루와 더불어 낙동강 3대 나루로 꼽혔습니다. 1920년대까지는 구포나루로 양산·김해·밀양에서 사람들이 많이 오갔으나, 구포역이 생기면서 시장도 줄었습니다.

 

1919년에는 여기 구포장터에서 3·1독립 만세 시위가 일어났습니다. 청년들 주도 아래 장날에 모인 사람 1000명 남짓이 함께 외친 만세소리가 천지를 울렸다고 합니다. 전통시장 다듬기로 현대화된 구포시장은 옛 명성에 걸맞게 화려하게 되살아났습니다.

 

 

다양한 물건과 사람 냄새 나는 생생한 모습을 구경하는 재미는 백화점이나 대형마트에서 찾을 수는 없는 노릇이랍니다. 그러니까 구포시장에 들러 구포국수 한 그릇은 먹어야지 제대로 장터 구경을 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김훤주

 

※ 2012년 문화재청에서 발행한 비매품 <이야기가 있는 문화유산 여행길 경상권>에 실은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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