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에서 본 세상

고영주가 진술의 임의성을 입에 올렸다고?

김훤주 2014. 2. 15. 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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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림 사건 재심에서 무죄가 선고된 데 대해 1981년 당시 부산지검 공안부에서 사건을 맡았던 고영주 변호사가 "좌경화된 사법부의 판단"이라며 "법원이 '검찰 수사 과정에서 학생들이 한 진술의 임의성이 의심된다'고 판단한 것은 말이 안 된다"고 말했답니다. 진술의 임의성이라……, 강제로 시키지 않았는데도 알아서 술술 다 말했다는 것입니다.

 

그게 사실일까요? 저도 고영주 검사한테서 수사를 받은 적이 있습니다. 1985년 7월입니다. 담당 검사는 고영주였고 주임 검사는 김원치였습니다. 고영주 검사가 쓰던 사무실 번호도 아직 잊지 않고 있는데, 서울지검 405호였습니다.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를 받고 있었습니다. 한 대학 언론출판연합체 회장을 맡고 있으면서 <일보전진>이라는 단행본을 2000권 펴냈는데 거기에 민중민주주의를 실현해야 한다는 내용이 실려 있었기 때문입니다. 1986년 1월 징역 2년6개월, 자격정지 3년 집행유예 4년을 선고받고 풀려날 때까지 180일 넘게 감방살이를 했습니다.

 

서울 미국문화원 점거농성사건을 패러디한 영화 <강철대오 : 구국의 철가방>

 

당시 상황은 이랬습니다. 1985년 5월 대학생들이 서울 미국문화원을 점거하고 농성을 벌였습니다. 이른바 삼민투입니다. 전국 단위 대학 총학생회 연합 조직 전학련도 만들어졌습니다. 민생투 자민투 민민투 반민투 같은 조직들이 갖은 대학에서 활발하게 투쟁에 나섰습니다.

 

급박해진 전두환 정권은 6월 몇 개 대학 캠퍼스를 군사작전하듯이 덮쳤습니다. 이런 과정에서 <일보전진>을 경찰이 압수해 갔고 곧바로 제게도 수배령이 떨어졌습니다. 저는 수배 하루만에 붙잡혔습니다. 앞으로 언제 다시 뵙게 될는지 모른다는 생각으로 시골 계신 어머니 아버지한테 갔는데 바로 이튿날 아침 들이닥친 경찰에게 끌려가야 했습니다.

 

저는 경찰 수사 단계에서는 맞는 것 말고는 아무 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게 고개를 숙인 채 차를 타고 가서는 처음부터 구둣발로 맞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고문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제 경우는 이미 증거가 갖춰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조작해야 할 필요가 없었던 것입니다. 조직 사건도 아니어서 배후를 캘 까닭도 없었습니다.

 

보통 경찰에서 수사받는 기간이 열흘인데요, 저는 엿새만인가 이레만인가에 경찰을 떠나 검찰로 넘겨졌습니다. 서둘러서 사건을 키울 필요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신문 보도를 보면 아시겠지만, 전학련을 가장 위에 놓고 그 아래 투쟁 조직은 삼민투로 하고 선전 조직은 제가 회장을 맡고 있었던 학교 단위 학생언론으로 해서 전체 얼개를 짰던 것입니다.

 

사실 언론출판연합체는 삼민투와도 총학생회와도 관련이 없었습니다. 언론은 언제나 독립성을 지켜야 했기에 그렇게 했습니다. 물론 총학생회와 써클연합회 그리고 갖은 매체(학생신문사·교지·영자신문사·방송국), 단과대학 학생회 등의 대표성은 인정했습니다. 그런 데서부터 한 사람씩 파견을 받아 모두 다섯 명으로 꾸려진 모임이었습니다.

 

검찰로 넘어가 처음 만난 검사가 바로 고영주였습니다. 물론 고영주 검사가 저를 때리지는 않았습니다. 이미 세상이 조금은 바뀌어 만약 검찰이 때리거나 하면 바로 문제가 될 수 있는 그런 사회 분위기였습니다. 게다가 전두환 정권은 수세에 놓여 있었습니다.

 

고영주 변호사. 법무법인 케이씨엘 홈페이지에서.


그러나 진술의 임의성, 임의로운 진술은 보장되지 않았습니다. 국가보안법 위반 사건에서 쟁점은 딱 하나입니다. '북한을 이롭게 한다는 정(情)을 알면서도'입니다. 이런 목적이 있어야 성립되는 범죄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입증도 어렵고 반증도 어렵습니다. 사람 마음 속에 들어 있는 생각을 어떻게 끄집어내 보여줄 수 있겠습니까?

 

저는 그 때나 지금이나 다 마찬가지로 북한=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좋지 않게 생각합니다. 박정희=전두환과 김일성을 쌍생아처럼 여겼습니다. 한 쪽이 다른 한 쪽에 기대어 권력을 생성하고 유지하고 있다고 봤기 때문입니다.

 

설령 제가 북한을 좋게 봤다고 해도, 제가 발 딛고 사는 데가 대한민국이기 때문에, 대한민국 구성원의 이익을 먼저 생각하고 그에 맞춰 실행했습니다. 제가 당시 민중민주주의를 주장했다고 하는데, 그 민중은 어디 다른 데 있는 민중이 아니고 저랑 같은 국토에 몸 담고 사는 민중이었던 것입니다.

 

고영주 검사는 제게 북한을 이롭게 한다는 정을 알고 있었다고 말하라고 강요했습니다. 오랜 동안 말이 오갔습니다. 저는 인정하지 않았고 고영주 검사는 을러댔습니다. 하루에 끝나지 않았습니다. 20일인지 30일인지 정확하게 기억나지는 않는데, 공소 제기 마감 시일까지 지루하게 끌었습니다.

 

어떤 때는 아무 하는 일 없이 하루종일 또는 밤 늦게까지 검사실 한 쪽 구석에 쳐박아 놓기도 했습니다. 빨간색 포승줄로 온 몸을 꽁꽁 묶은 채, 손목에는 벨기에제 후진 방지 장치가 돼 있는 철제 수갑을 채운 채였습니다. 그렇게 한참을 뒀다가 불러서는 회유와 협박을 일삼았습니다.

 

어떤 때는 '비둘기장'이라고, 법정이나 검사실 가기 전에 머무는 검찰청 대기실인데 일어서서 몸도 제대로 돌리지 못할 만큼 아주 좁고 어둡습니다. 그런 데다 하루종일 또는 밤늦게까지 가둬뒀습니다. 아침에 서울구치소에서 나와 종일 비둘기장에 갇혀 있다가 그대로 밤늦게 돌아가곤 했습니다.

 

만약 인정하지 않으면 실형을 받고 감옥에서 썩으리라 했습니다. 그러나 인정을 하면 어쩌면 석방돼 나갈 수도 있다고 했습니다. 아버지를 통한 회유도 있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헛되고 또 헛되지만, 저는 고영주 검사의 회유에 한 가닥 희망을 걸었던 모양입니다. 결국 인정하고 말았습니다.

 

그러고 나서는 조서가 일사천리로 꾸며졌습니다. 풀려날 수도 있다는 한 가닥 희망, 헛되고 또 헛된 그 희망이 제 마음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고영주 검사가 제게로 다가왔습니다. 빙긋이 웃으며, 낮은 목소리로 "김훤주, 너 구속이야." 이랬습니다. 순간, 제 눈에서 물방울이 몇 낱 떨어졌습니다.

 

고영주 검사가 이런 일을 두고 어떻게 말할까요? 제가 고영주 검사 앞에서 한 진술에서 임의성이 인정될 수 있을까요? 제가 임의롭게 제 뜻대로 진술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저는 모르겠습니다.(물론 여섯 달 동안 이른바 빵살이를 하면서 너무나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지금은 오히려 그 때 구속됐던 것을 고맙게 여깁니다.)

 

부림 사건을 다룬 영화 <변호인>

 

하물며 부림 사건은 1981년에 있었습니다. 그야말로 무인지경으로 살벌한 시기였습니다. 저는 한 해 뒤인 1982년 대학에 들어갔는데, 경찰 2개 중대가 날마다 학교서 학생들을 감시했습니다. 쥐도 새도 모르게 학생들이 사라지는 일이 비일비재했습니다. 그런 시절 검찰에서 한 진술에 임의성이 보장됐을 리가 있을까요? 분명 저보다 훨씬 험한 꼴을 당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고영주 변호사는 이번 무죄 판결을 두고 "좌경의식화 학습을 받은 사람들이 현재 중견 법관까지 됐다는 의미"라고 했다지요. 한 번 공안은 영원한 공안인가 봅니다. 고영주 변호사 같은 공안 검사 출신은 자기가 가장 중립이라고 착각합니다. 실제로는 가장 우익, 수구이면서 말입니다. 그러니까 세상 모든 사람이 좌익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10년 넘게 지난 1999년 고영주 검사를 만난 적이 있습니다. 법조계 취재를 맡아 창원지방검찰청에 드나들게 됐는데 고영주 검사가 검사장 다음 2인자인 차장검사로 와 있었습니다. 제가 한 번 슬쩍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당신한테 수사를 받았었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그랬더니, "김 선생이, 그랬어요?" 하고는 그만이었습니다.

 

피해자는 잘 잊지 못하지만 가해자는 금세 잊어버리는 법입니다. 검사 생활 대부분을 공안 쪽에서 보냈으니, 저처럼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수사한 사람이 좀 많겠습니까? 고영주 검사는 자기가 수사한 이들에게도 부림 사건이나 제 사건처럼, '진술의 임의성'이 보장돼 있었다고 착각하겠지요.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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