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에서 본 세상

촛불의 진짜 배후는 '진보의 무능'

기록하는 사람 2008. 6. 25. 1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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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지난 4·9총선 직후 '국민도 식겁 먹어봐야 한다'(http://2kim.idomin.com/127)는 칼럼을 쓴 적이 있다. 건강보험 당연지정제 폐지 등 공공부문 사영화와 대운하 파뒤집기, 무한경쟁 교육정책, 혁신도시 축소 등 이명박 정부의 무작스런 정책이 드러났음에도 한나라당에 몰표를 준 선거 결과를 개탄하며 쓴 글이었다.

아무리 그 상황이 개탄스러웠다 하더라도 '식겁' 운운 표현은 지나쳤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걸로 우리 지면평가위원회에서도 '국민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는 지적을 받았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니 표현이나 예의의 문제에 앞서 상황설정 자체가 틀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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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선관위 이미지 캡처.


10명 중 7~8명은 찍지 않았다

대선 당시 이명박 후보의 득표율은 48.7%였지만, 투표율(63%)을 감안한 전체 유권자 대비 실질득표율은 30%에 불과했다. 10명 중 7명이 이명박 후보를 찍지 않았던 셈이다. 또한 18대 총선에서도 한나라당 정당득표율은 37.48%였지만, 투표율 46.1%를 감안하면 10명 중 2명도 찍지 않았다는 계산이 나온다. (이건 역대 대통령 지지율 중 최저기록이다.)

따라서 10명 중 2~3명에 불과한 지지자를 '국민'이라 칭하며 '식겁' 운운한 것은 분명한 잘못이었던 것이다.

문제는 국민이 아니라 이명박 대통령과 한나라당을 대신할 대안세력의 부재였다. 이 정부를 찍진 않았지만, 취임 100일도 안 돼 '식겁'을 볼대로 봐버린 국민이 직접 촛불을 들고 거리로 나설 수밖에 없었던 것도 다른 대안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촛불집회 현장에서 정당은 물론 '진보'를 내건 수많은 단체들이 힘을 쓰지 못하는 것도 그런 이유 때문으로 보인다. 정권과 조중동이 진보세력을 촛불의 배후로 지목하면서 좌-우 대결로 몰아가려 하고 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진보의 무능이 촛불의 진짜 배후였던 것이다.

한겨레 정치선임기자 성한용은 이번 <창작과 비평> 여름호에서 이렇게 분석했다. "통합민주당은 폭풍우가 멈춘 뒤 바다에 떠 있는 난파선에 비유할 수 있다. 여기가 어디쯤일까? 지지기반이 떨어져 나갔다는데, 왼쪽이 떨어져나간 것일까, 오른쪽이 떨어져나간 것일까? 잘 모르고 있다."

그러면서 그는 "통합민주당의 몰락은 정당이나 국회의원들의 잘못뿐만 아니라 '진보·개혁세력' 전체의 퇴조와 관련이 있다"면서 "'좌'나 '우'의 문제가 아니라, '실력'과 '신뢰' '깊이'의 문제다"라고 진단했다.

실력과 신뢰, 깊이. 바로 이거였다. 나는 작년 대선 직후 <절망사회에서 길찾기>라는 무크지에 ''잡탕' 개혁세력과 선을 긋고 '실력'을 키우자'는 제목의 글을 썼다. 거기서 나는 "대선은 끝났고, 진보세력의 '실력 없음'은 국민에게 들통 났다. 시민단체는 '신관변화'되었고, 소위 개혁세력은 '얼치기'였으며, 그들이 모인 집단은 '잡탕'이라는 것도 드러났다"고 감히 진단한 바 있다. 이 생각은 지금도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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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노동당이 6월 10일 청계천 소라광장 옆에서 '08년 촛불대항쟁의 교훈과 과제'를 주제로 토론회를 열었다. 진보세력이 촛불집회에서 깨달아야 할 진짜 교훈은 자신들의 무능이다. /김주완


쇠고기에 집중하느냐, 정권 퇴진으로 가느냐는 논란은 한물 간 먹물들의 말장난에 불과하다. (나는 유창선이라는 시사평론가가 정색을 하고 정권퇴진투쟁론은 안된다고 쓴 글 을 보고 진짜 황당했다. http://yuchangseon.com/entry/촛불의-성취-훼손할-정권퇴진투쟁론) 이미 촛불은 어떤 세력의 '지도' 없이도 자연스럽게 진화하고 있다. 정권의 방송장악과 조중동의 여론왜곡 문제가 그것이다. 이건 언론을 통해 구축되는 프레임을 둘러싼 전쟁이다.

프레임이 최후의 승부를 결정한다는 것을 대중은 본능적으로 알고 있다. 조중동과 정권도 마침내 불특정 시민과의 전쟁을 선포했다. 나는 이거야말로 이번 촛불이 얻은 최대의 성과라 본다. 이명박 정부와 친정부 언론을 한 축으로 하고, 시민과 친시민언론을 상대 축으로 하는 이 싸움은 5년 내내 계속될 것이다. 그런 와중에서도 이 정권은 단기간에 경제성장률을 끌어올리기 위해 별의별 무리수를 쓸 것이다.

먼저 '실력없음'을 인정하자

이 틈에서 진보·개혁세력은 뭘 해야 할까. 성한용은 새로운 리더, 스타 정치인을 키워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2010년 6월 지방선거, 2012년 4월 총선, 2012년 12월 대선이라는 정치 일정을 제시한다.

나는 여기에 앞서 스스로 '실력없음'을 깨닫는 게 먼저라고 생각한다. 그게 전제되지 않으면 그들은 또다시 5년 내내 "한나라당과 이명박 정권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저리 많은데, 왜 자신들을 대변해주려는 우리를 찍지 않는거지?"라는 물음만 되풀이할 것이다.

"보수주의자들이 올바른 방향을 택했고, 진보주의자들은 배를 놓쳤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는 단순히 미디어를 통제하는 데 성공했느냐 실패했느냐 하는 문제를 넘어선 것입니다. … 그들의 성공과 우리의 실패를 인정합시다."

조지 레이코프가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에서 제시한 '진보주의자들이 실천해야 할 11가지' 중 제1번으로 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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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완 지음 | 커뮤니케이션북스 펴냄
지역신문 기자의 고민과 삶을 담은 책. 20여 년간 지역신문기자로 살아온 저자가 지역신문에 대한 뜨거운 애정과 자부심을 갖고 기자생활을 하면서 겪은 일들을 풀어낸다. 이를 통해 서로 비슷한 고민을 가진 지역신문끼리 정보를 공유하는 장을 마련하고자 했다. 아직도 사라지지 않은 촌지, 살롱이 되어버린 기자실, 왜곡보도, 선거보도 등 대한민국 언론의 잘못된 취재관행을 비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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