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별 의미없는 것

퇴계·요수·갈천의 수승대 한시 살펴보기

김훤주 2013. 10. 9. 1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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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창에 있는 명승 수승대는 원래 이름이 수송대(愁送臺)였습니다. 이를 퇴계 이황이 수승대로 고쳤습니다. 퇴계는 기제수승대(寄題搜勝臺)라는 제목으로 시를 읊었습니다. 이로써 이름이 바뀌었습니다. 


고치기 전 이름인 수송은 근심을 보낸다거나 근심 속에 보낸다는 정도로 풀이됩니다. 고치고 나서 이름인 수승은 명승지를 찾는다는 뜻으로만 새겨집니다. 퇴계의 개명이 원래 이름을 어쩌면 단순하고 명백하게 해버려 뒷맛을 없애는 측면도 있는 듯합니다. 


수승대에 있는 요수정. 건너편 솔숲 언덕에 숨은 듯이 앉아 있다.


搜勝名新煥(수승으로 이름을 새로 바꾸니)

逢春景益佳(봄을 맞은 경치 더욱 좋으리)

遠林花欲動(먼 숲 꽃망울은 터지려 하고)

陰壑雪猶埋(그늘진 골짜기는 눈에 묻혔네)

未寓搜尋眼(좋은 경치와 사람 찾았으나 만나지 못해)

唯增想像懷(마음에 회포 쌓이네)

他年一尊酒(뒷날 한 동이 술에)

巨筆寫雲崖(큰 붓으로 벼랑에 구름 그리리). 


갈천 임훈이 거닐었다는 거창 갈계숲.


갈천 임훈의 화답시는 은근히 가시가 있다는 얘기를 듣는다고 합니다. 알려지기로는 요수 신권의 화답시가 먼저 쓰였고 임훈은 그 뒤에 시를 지었습니다. 마지막 행에서 근심 수(愁)자를 겹쳐 쓰고도 모자라서, 퇴계가 고쳤던 수송(愁送)까지 더했습니다. 살짝 비트는 맛이 여기에서 생겨났습니다. 


게다가 세 번째 행에서는 ‘君將去(그대도 장차 떠나니)’라고 해서 여기 수승대에 있지도 않은 사람이라는 사실까지 내비쳤습니다. 퇴계는 여기 사는 사람이 아니고, 요수와 갈천은 여기에 사는 사람이었습니다. 


花滿江皐酒滿樽(강가에 꽃이 가득하고 동이에 술도 가득한데)

遊人連袂謾粉紛(소맷자락 이어질 듯 노니는 사람들 분분하네)

春將暮處君將去(봄은 장차 저물고 그대도 장차 떠나니)

不獨愁春愁送君(그대 보내는 시름에 봄의 아쉬움을 비길까?). 


수승대 거북바위에 새겨져 있는 갖은 글자들.


반면 요수 신권의 화답시는 새로 이름을 지어준 퇴계에 대한 고마움을 담았습니다. 동갑내기인데도 퇴계에게 받은 바를 소중한 가르침이라 새기기까지 했습니다. 


임훈과 신권의 작품 가운데 누구 것이 더 좋은지는 판가름할 수 없는 노릇이지만, 어쨌거나 그이들 시에서 술과 술독이 빠지지 않았다는 점은 반갑습니다. 


요수 신권을 모시는 구연서원. 수승대에 있습니다. 들머리 관수루는 더욱 이름나 있습니다.


林壑皆增采(숲골짜기는 온갖 색깔 더하고) 

臺名肇錫佳(대의 이름을 아름답게 지어주네)

勝日樽前値(좋은 날 맞아 술동이 앞에 두고)

愁雲筆底埋(구름 같은 근심을 붓 끝에 묻네)

深荷珍重敎(중한 가르침을 마음깊이 느끼고)

殊絶恨望懷(서로 떨어져 그리움만 한스럽네)

行塵遙莫追(속세에 나아가 흔들리며 좇지 않고)

獨倚老松崖(홀로 벼랑의 노송에 기대네). 


그나저나 요수와 갈천의 퇴계에 대한 태도가 이렇게 다른 까닭이 무엇일까요? 신권의 집안이 퇴계 집안과 가까워서일까요? 그에 대한 반작용으로 갈천 임훈이 이른바 삐딱하게 나간 것일까요? 저는 알지 못하지만, 어쨌거나 퇴계의 영향력이 상당했다는 사실 만큼은 손쉽게 확인이 되는 장면입니다.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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