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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오는 날 안개 속에 걸은 남해 바래길

김훤주 2013. 6. 23. 1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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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19일에는 아침까지 비가 세게 내렸습니다. 남해로 생태역사기행을 떠나기로 돼 있는 날이었습니다. 삼천포대교를 거쳐 금산 보리암을 들른 다음 멸치쌈밥을 맛나게 먹고 대량마을에서 상주해수욕장까지 이어지는 바래길을 걸을 예정이었습니다.

 

떠나기 앞서 실은 걱정이 두 가지 있었습니다. 하나는 비가 계속 내리면 어쩌나였고 다른 하나는 날씨가 무더우면 어쩌나였습니다. 그래서 일어나자마자 날씨를 확인하니 비는 10시 전후해서 걷히고 더위는 그다지 심하지 않으리라는 예보를 확인했습니다.

 

1. 비 오는 날의 좋은 점과 안 좋은 점

 

하지만 실은 걱정을 크게 하지는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여행은 어떤 상황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고 그 상황은 사람이 결정하고 구성할 수 있는 여지가 그리 많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행하는 사람은 여행하는 여정에서 거기에 주어진 조건과 상황을 그대로 받아안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가운데서 그럴 듯한 대목을 찾아내어 즐기거나 누리거나 하면 되기 때문이었습니다. 비가 오면 비가 오는대로 좋은 구석을 찾아 누리면 됩니다. 게다가 이 날 같은 경우는 비가 내리면 여름답지 않게 걷는 길이 선선할 수 있다는 장점도 있습니다.

 

 

하나가 좋지 않으면 다른 하나는 좋아지게 돼 있는 것은 사람살이 아니라 이런 조그만 여행에서도 마찬가지인가 봅니다. 그래서 새옹지마(塞翁之馬)라는 말이 생겨났는지도 모릅니다.

 

2. 아련한 안개에 둘러싸인 금산과 보리암

 

어쨌거나 아침 8시 30분 창원시청 앞으로 떠난 일행은 이런저런 일로 조금 늦어지는 바람에 11시 남짓 보리암 아래 복곡주차장에 닿았습니다. 차삯이 왕복 2000원 하는 마을버스를 타고 보리암 턱 밑에까지 갔습니다. 턱 밑이라 해도 입장료 1000원씩을 다시 낸 다음 500m 이상은 족히 더 걸어야 합니다.

 

일기예보대로 빗줄기는 이미 가늘어져 있었고 내리는 정도도 듬성듬성했습니다. 덕분에 안개가 잔뜩 끼어 있었는데 금산 아래 상주해수욕장을 지나 바다와 섬으로 이어지는 전망이 전혀 보이지 않았습니다.

 

 

대신 안개는 시야를 흐리게 함으로써 사람들에게 아련함을 안겨 줬습니다. 눈앞이 늘 이렇다면 갑갑할 수밖에 없겠지만 어쩌다 한 번씩 이러면 그 또한 작으나마 새로움과 즐거움으로 다가올 수 있는 법이겠지요.

 

사람들은 무리를 지어서 걷습니다. 이런저런 얘기를 두런두런 나누고요, 또 저처럼 혼자 떨어져서 걷는 이도 없지 않습니다. 또 원래는 서로 모르는 사이였는데 이렇게 길을 같이 걸으면서 얘기를 주고받을 수 있게 된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보리암 경내에 들어섰습니다. 왼편으로 고개를 돌려 금산 줄기가 출렁출렁 뻗어내려 바다에 발을 담그고 섬을 점점이 띄워놓은 쪽을 봅니다. 하지만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안개 때문입니다. 심지어 바로 마주하는 건너편 산자락조차도 어렴풋하게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6월 19일사진. 2011년 6월 17일 사진.

 

옛적 해가 쨍쨍한 날에 와서 눈에 담았던 풍경을 머리에서 끄집어내 봅니다. 안개가 안겨준 백지에다가 그 풍경을 쓱쓱 그려봅니다. 푸른 솔숲과 하얀 모래밭과 울렁울렁 곡선으로 내려가는 산줄기 등날과 거뭇거뭇하게 박혀 있는 섬들입니다.

 

금산 꼭대기 가는 길.

 

해수관음상과 삼층석탑이 있는 쪽으로 가다말고 금산 마루 있는 쪽으로 방향을 틀었습니다. 금산과 보리암을 자주 찾기는 했지만, 거기 산마루에 오른지는 벌써 10년도 넘었구나 하는 생각이 문득 퍼뜩 들었기 때문입니다.

 

3. 오랜만에 올라본 금산 꼭대기

 

제 기억에는 산마루 둘레에 커다랗고 보기 좋은 바위들이 우뚝 있습니다. 거기 서면 푸르른 초록뿐 아니라 가뭇없이 멀어 보이는 하늘도 눈에 눈에 담기 좋았습니다. 거기서 200m 봉화대가 있는 꼭대기까지 신나게 올랐습니다. 얼마 걸리지 않아 산마루에 도달했습니다.

 

바위는 예전 그대로였습니다. 다만 산길이 조금 달라져 있는 듯해서, 예전처럼 집채만한 바위와 바위 사이로 걸어들어가지는 못했습니다. 봉화대는 완전 새롭게 쌓여져 있었습니다. 제 기억으로, 예전에는 여기에 그런 자취만 조금 있을 뿐이었는데 말씀입니다.

 

 

바위에는 유홍문상금산(由虹門 上錦山)이라고, 한자가 적혀 있습니다. 그 옆에는 주세붕을 비롯해 여러 사람의 이름이 같은 한자로 새겨져 있습니다. 홍문은 무지개문을 뜻합니다. 여기 두 바위를 일러 무지개문이라 했나 봅니다. 이 ‘홍문으로 말미암아 그 위에 금산이 있다’는 정도로 뜻을 새겨봅니다.

 

 

주세붕 일행이 놀러 왔다 새겼을 수도 있겠습니다만, 그러지 않을 개연성도 아주 많습니다. 오랜 세월 여러 사람들이 드나든 장소이기 때문입니다.

 

지금이야 이렇게 자동차를 타고 턱 밑에까지 와서 손쉽게 오를 수 있지만 그렇지 않은 예전에 이렇게 오르면 무엇 하나라도 자기 자취를 남기고 싶었을 수도 있기는 하겠다는 생각을 얼핏 해봅니다. 그렇다고 이런 데 글자를 새기는 일이 마음에 썩 들지는 않습니다만.

 

4. 나오는 길에는 눈길을 멀리 던지지 않고

 

도로 내려옵니다. 해수관음상과 삼층석탑 있는 데로 가서 봅니다. 오늘 같은 날은 부러 자연경관을 눈에 담으려 하지 않습니다. 그냥 사람들 노닐거나 움직이는 모습이 좋습니다. 이리 비가 오고 날씨가 흐린데도 보리암이 내뿜는 ‘기도빨’은 전혀 조금도 가시지 않나 봅니다.

 

바다를 등지고 해수관음상을 향해 절하는 이들이 끊이지 않습니다. 삼층석탑을 둘러싸고 시계 방향으로 탑돌이를 하는 그림자들도 적지 않습니다. 여기 기도빨은 우리나라에서 세 손가락 안에 꼽힌다고 합니다. 절실한 마음으로 기도하면 한 가지 소원은 꼭 이뤄준다고 합니다.

 

돌아나오는 길에는 굳이 눈길을 멀리 두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안개가 자욱한 날 그 너머에 있는 무엇을 보려고 하면 오히려 갑갑하기만 하고 보이지 않는 데 대한 불만만 쌓이기 십상입니다. 자연이 보여주지 않을 때는 보지 않으면 그만입니다.

 

서어나무 줄기.

 

대신 보여주는 만큼을 눈에 담는 것입니다. 나무줄기랑 이파리를 봅니다. 제가 공부가 얕아 이름 따위는 잘 모릅니다. 어쩌다 서어나무 노각나무 따위 이름을 아는 녀석들이 보이기도 합니다. 나무줄기 생김새랑 껍질이 저마다 다릅니다.

 

비를 맞아 거뭇거뭇해진 것도 있고 오히려 밝게 빛나는 것도 있습니다. 이파리 또한 종류마다 다른데요, 색깔조차도 사람이 말할 때는 다 같은 초록이지만 그 초록의 구체적인 현상은 나무마다 가지마다 죄다 다릅니다. 그 모습이 새삼스러워 한 번 더 눈길을 던집니다.

 

 

5. 밥집 사랑채에서 먹은 맛난 멸치쌈밥

 

이제는 점심을 먹을 차례입니다. 복곡주차장에서 내려와 상주해수욕장으로 가는 왼쪽 도로를 따라가다가 보면 오른편에 나오는 밥집 사랑채가 오늘 멸치쌈밥을 먹을 장소입니다. 멸치쌈밥은 거나했습니다.

 

내린 비로 물이 불어나 있습니다. 산골짜기여서 흙탕물이 아니었습니다.

 

고추는 매웠습니다. 김치는 깔끔했습니다. 멸치젓은 짭쪼롬했고 멸치무침은 고소했습니다. 쌈장은 부드러웠으며 호박나물·가지나물은 사르르 녹았습니다. 그밖에 몇몇 나물은 씹히는 느낌이 좋았습니다.

 

 

찌개에 들어 있는 멸치들은 그 싱싱함 덕분에 부스러지지 않았습니다. 입에 들어가 씹힐 때까지 흐트러지지 않았던 것입니다. 몇몇은 취향에 맞게 막걸리나 소주를 곁들였고 밥맛이 댕기는 이들이 많았던 모양인지 하얀 쌀밥을 더 달라는 소리도 곳곳에서 나왔습니다.

 

무엇보다 사랑채는 인심이 푸짐했습니다. 주인 되는 이는 더 달라고 먼저 말하지 않아도 반찬을 잔뜩 들고 밥상 사이를 돌아다니며 빈 접시를 채워줬습니다. 더 먹은 밥은 그릇 숫자가 많았는데도 돈을 더 받지 않았습니다. 모두들 표정이 벙글어졌습니다. 몸도 덩달아 푸근해진 느낌이 들었습니다.

 

어쩌면 이 날 일정에서 가장 좋았던 것이 점심 멸치쌈밥이었다고 여길 사람이 가장 많을 것 같다는 생각이 설핏 들었을 정도였습니다. 대량마을로 갑니다. 일행을 실은 버스가 제대로 들어가지 못합니다.

 

대량마을 지나 오르막길에서 바라본 노도.

 

6. 송홍주 바래길사람들 회장님 도움이 없었다면

 

앞서 답사를 자가용 자동차로 하면서 동네 사람들에게 버스가 들어올 수 있는지 물어보지 못한, 세밀하게 점검하지 못한 대목이었습니다. 원래 목적했던 데까지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30분 남짓 오르막길을 걸어올라야 하는 예상하지 않은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하지만 다행이었습니다. 아침에 행여나 싶어 ‘바래길 사람들’의 송홍주 회장께 전화를 드린 일이 좋은 결과를 안겨줬습니다. 송 회장께서 몸소 일행을 맞으러 오신 것입니다. 송 회장은 짐차를 몰고 오셨습니다. 짐칸에는 가빠가 둘러쳐져 있었습니다.

 

바래길 사람들 송홍주 회장 짐차 짐칸을 타는 모습.

 

송 회장께서는 짐칸에 우리 일행을 태우고 두 번 걸음을 해 주셨습니다. 사람들은 덕분에 어디서나 쉽게 할 수 없는 색다른 경험을 하게 됐다고 좋아했습니다. 자드락길 들머리까지 손쉽게 와 닿은 일행은 송 회장께 고맙다는 말씀을 드리고 기념으로 사진을 찍은 다음 숲속길로 들어가 걸었습니다.

 

뒷줄 오른쪽에서 네 번째 흰옷 입은 분이 송홍주 회장님.

일행을 태워주신 짐차로 돌아가고 있는 송홍주 회장.

 

 

7. 대부분이 흙길인 대량~상주 바래길

 

길은 그다지 험하지 않았지만 땀이 많이 났습니다. 오르막과 내리막이 되풀이됐습니다. 해가 쨍 났어도 그늘로 덮였을 오솔길을 걷는 즐거움이 있었습니다. 여기저기 잘 익은 산딸기를 따먹는 즐거움도 있었습니다. 금난초 삿갓나무 우산나물 원추리 같은 꽃과 풀을 눈에 담는 즐거움도 있었습니다.

 

 

 

요즘 드물게 흙길을 밟는 보람은 기본이었습니다. 옛날에는 이리 좁은 길을 사람들이 일삼아 다녔다고 합니다. ‘바래길’에서 ‘바래’는 ‘물일이나 갯일’을 뜻하는 남해 지역말입니다. 그러니까 바래길은 바래를 하러 다니는 길이 되겠습니다. 지금은 걸으려고 다니는 길이지만 옛날에는 일하러 다니는 길이었습니다.

 

 

대량마을에서 상주해수욕장까지 5km 남짓은 남해 바래길 3코스의 가운데 한 부분입니다. 3코스는 사포 김만중이 귀양 살던 섬 노도 맞은편 벽련마을에서 시작해 우리가 이 날 걸은 길을 지난 다음 유람선선착장과 금포마을을 거쳐 천하몽돌해수욕장까지 15km 이어집니다.

 

이름은 김만중이 노도에서 어머니를 위해 지었다는 소설 제목인 ‘구운몽’길입니다. 가다 보면 두 군데 전망대가 나옵니다. 전망대가 원래부터 전망대는 아니었습니다. 옛날에는 군인들 경계 초소였습니다. 지금은 그 부스러기가 남았고 거기서 사람들은 바다와 섬과 하늘과 숲을 눈에 담습니다.

 

노도.

 

8. 숲길도 좋고 바다 풍경도 좋은 여기 바래길

 

길은 산 속으로 들어갔다가 바다가 보이는 데로 나왔다가를 되풀이합니다. 멀리 바다에는 안개가 깔려 있습니다. 저 아래 갯바위에서는 물결치는 소리가 철썩댑니다. 갯바위나 바다는 보이지 않는데도 파도 소리가 씩씩하게 들려오는 때도 적지 않습니다.

 

 

멀리 풍경을 눈에 담을 수 있도록 허용하지 않는 날씨는 가까운 바위나 파도로 눈길을 돌리게 합니다. 걷는 길에서 내려다보이는 갯바위들은 모습이 다들 그럴 듯합니다. 비스듬히 드러누운 채 세로로 갈라진 주상절리는 더욱 그럴 듯합니다.

 

 

 

이렇게 해서 걷는 동안 숲길이 끝이 납니다. 이제부터는 아스팔트길이 이어집니다. 사람들이 적당하게 지친 시점이었습니다. 이날 앞선 대열이 잠깐 길을 잃는 바람에 조금 더 지친 측면이 있었습니다. 나름 까닭이야 없을 리 없는 일이지만, 그래도 앞으로 다시 하지 않아야 좋을 실수였습니다.

 

상주해수욕장 솔숲은 색깔이 짙어져 있었습니다. 바닷가 모래밭은 물을 머금어 불그스레했습니다. 그 모래밭에서는 중학교 운동부 소속쯤으로 보이는 아이들이 훈련 비슷한 것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 위로 한가로이 노니는 청년들의 걸음도 포개져 있었습니다.

 

멀리서 본 상주해수욕장. 

 

9. 9월엔 거제 서이말 일대. 10월엔 지리산

 

일행들 가운데 지친 기색이 있는 이도 있었는데요, 그래도 나름 다들 낯빛은 밝았습니다. 낮 4시 조금 넘어서 버스를 타고 떠난 데로 돌아왔습니다. 맛있게 먹고 즐겁게 보고 함께하며 걷는 보리암 탐방과 바래길 걷기였습니다.

 

마산용마고 학생과 선생님이 함께했습니다.

 

일상에서 벗어나 지역의 자연 문화 역사 생태를 느긋하게 둘러보는 생태역사기행은 7월과 8월 두 달을 쉰 다음 9월과 10월로 이어집니다. 9월에는 25일 넷째 수요일에 거제 서이말등대 들머리에서 공곶이까지 이어지는 4.5km 자드락길을 걷습니다. 와현(臥峴=누우래재)해수욕장도 함께 누립니다.

 

10월에도 넷째 수요일인 23일에 길을 나서서 동강~방곡~쌍재~수철 지리산 굴레길 가운데 일부를 떼어내어 걸어갑니다. 참가비는 3만원입니다. 경상남도람사르환경재단이 후원하고 경남풀뿌리환경교육센터와 갱상도 문화공동체 해딴에가 공동 주관합니다.

 

문의·상담·신청 055-250-0125, 010-8481-0126, haettane@gmail.com.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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