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본 곳

단속사지·남사마을이 개울가에 있는 까닭

김훤주 2013. 5. 16. 17: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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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15일 올해 들어 세 번째 생태·역사기행은 물 좋고 산 높은 산청으로 떠났습니다. 형편이 어려운 아이가 있는 집에다 밑반찬을 대어주고 마찬가지 어르신들에게도 쌀을 드리는 등 봉사활동을 활발하게 하는 ‘꽃들에게 희망을’이 함께했습니다.

 

‘꽃들에게……’를 통해 할머니들이 대거 참여하신 것입니다. 봉사자까지 쳐서 모두 서른여섯 분이셨습니다. 덕분에 다르게 참여하신 이들에게는 조금 불편한 점이 없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다들 서로를 위하는 태도로 길을 나섰습니다.

 

3월과 4월에는 밀양 동천 둑길과 진주 남강 상류 둑길을 걸으면서 쑥 같은 나물도 더불어 캤습니다. 이번에는 그렇게 하지 않고 이리저리 둘러보기만 했습니다. 연세 높은 할머니들이 많으셔서 오래 걷기는 어려웠습니다.

 

먼저 들른 데는 겁외사였습니다. 아는 사람은 다 아는, 80년대와 90년대를 청년으로 살아낸 세대는 대부분 다 아는, 성철 스님 생가 자리에 들어선 절간입니다. 성철 스님을 기리려고 성철 스님 세상 떠난 뒤에 만든 새 절입니다.

 

다른 절간 같으면 일주문 자리에 들어서 있는 겁외사 정문. 기둥이 열여덟 개입니다.

 

절간 들머리에서 일행을 맞은 성순용 문화관광해설사는 성철 스님 생가 대청 마루로 이끌었습니다. 날씨가 갑자기 더워진 탓인지, 기와지붕 아래 그늘에 드니까 시원한 기운이 좋았습니다. 어르신들은 여기 앉아 편안하게 해설을 들었습니다. 성철 스님 일생에 대해섭니다.

 

율은고거(栗隱故居)라 적혀 있습니다. 율은은 성철 스님 아버지의 호 정도가 되겠습니다.

 

성철 스님 일생은 여기 대웅전 벽화로 그려져 있습니다. 머리를 깎고 스님이 되고 여러 사람들을 위해 법어를 베풀고 결국은 세상을 떠나 몸이 불태워지는 모습이 사실적으로 그려져 있습니다. 바깥 뜨락에는 성철 스님 전신상이 있습니다.

 

 

 

적혀 있기로 전신상이 아니라 탑입니다. 성철 스님 사리를 담은 사리탑입니다. 탑이란 원래 석가모니 진신사리를 모시는 물건이었습니다. 성철 스님은 대웅전에도 있습니다. 가운데 비로자나부처님이 있고 그 오른편(우리가 보기에는 왼쪽)에 성철 스님이 석장을 짚은 채 앉아 있습니다. 여기서는 가운데 부처님한테 절하는 사람보다 오른편 성철 스님한테 절하는 사람이 더 많습니다.

 

 

겁외사 건너편에는 이런 장터도 있습니다. 여기서 국산 칡을 산 사람도 있습니다.

 

이리저리 둘러보다 돌아나와 버스를 타고 남사마을로 갔습니다. 돌아다니시기 버거운 어르신들은 여기서 내리시고 나머지 일행은 단속사지로 갔습니다. 단속사지에는 유홍준 선수의 ‘구라’로 갑자기 이름이 높아졌던 대숲이 있습니다.

 

유홍준 선수는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에서, 여기 대숲에 들어가 드러누우면 일렁이는 댓잎도 좋고 대숲 사이로 갈라지면서 내려오는 햇살도 더없이 좋다, 대충 이런 식으로 적었더랬습니다. 이게 인기를 탔는데, 이제는 이 또한 20년이 다 된 옛날 얘기가 됐습니다.

 

 

단속사지에는 동·서삼층석탑과 당간지주, 그리고 정당매가 물건입니다. 동탑 서탑 모두 균형도 잘 잡혀 있고 미끈하게 오르내리는 태가 좋다는 얘기를 듣습니다만, 원형을 거의 그대로 간직한 동탑이 보기도 좋고 기상도 씩씩합니다.

 

가까이 동탑 멀리 서탑.

 

가까이 서탑 멀리 동탑.

 

정당매는 신라시대 만들어진 여기 단속사가 고려 시대까지는 멀쩡했음을 입증하는 나무입니다. 고려 말기 정당 벼슬을 했던 강 아무개 형제가 여기서 요즘으로 치면 고시 공부를 하던 때에 심은 매화나무가 지금까지 남았습니다. 몸통은 죽고 뿌리 가까운 데서 나온 곁가지가 새로 솟고 있습니다.

 

 

당간지주를 보면 절간 규모도 함께 보입니다. 여기 당간지주는 제 기억대로라면 영주 부석사 정도는 됩니다. 적어도 그쯤은 되는 규모를, 한 때 자랑했던 단속사입니다. 우리는 이날 당간지주 근처에서 머구(머위)를 땄다가 동네 젊은 할매한테 지청구를 듣기도 했습니다.

 

논이나 밭에 나 있지 않아서 그냥 주인이 없는 줄 알았는데, 머구는 원래 그렇게 기른다는 얘기를 했습니다. 겸연쩍은 마음이 들어서 한 움큼 되는 뜯은 머구를 드렸습니다. 이 할머니는 그랬더니 싱긋 웃으시면서 “뜯은 머구는 가져가시고……”라 했습니다.

 

당간지주 있는 데는 솔숲이 좋습니다. 물론 그다지 길지는 않습니다. 솔숲 가까운 바닥에는 꽃잎이 크고 하얀 녀석이 자라고 있습니다. 일행은 무슨무슨 꽃이라면서 카메라를 들이댔는데 지금 떠올려 보니 으아리라 한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합니다.

 

 

 

하지만 단속사지에 와서 이렇게만 둘러보고 가면 제대로 누렸다고 하기는 어렵습니다. 단속사지에서는 절터 자체가 얼마나 훌륭한 데 자리잡고 있는지를 느끼는 보람이 있습니다. 단속사지가 지금은 마을이 돼 있습니다.

 

 

동탑 서탑이 마주보고 있는 바로 앞쪽은 아마도 단속사 으뜸 법당이 있었을 것입니다.지금은 민가가 들어서 있는데, 그 앞에 서서 둘레를 둘러보면 무척 따뜻한 느낌이 듭니다. 완전히 복 받은 자리입니다.

 

으뜸 전각 자리에 들어선 민가의 속살. 콘크리트 장독대가 정겹습니다.

 

골짜기이면서도 움푹 꺼지지 않고 살짝 도드라져 있습니다. 마을 전체를 두 줄기 개울이 양쪽에서 감싸는 가운데 둔덕처럼 가만히 솟아오른 데가 절터입니다. 그리고 양쪽 개울 건너편으로는 높고 낮은 산악이 빙 둘러서 있습니다.

 

절터(마을)는 남쪽을 향해 앉아 있습니다. 이렇게 골짜기 한가운데 있으면서도 꺼지지 않은 데는 정말 찾기 어렵습니다. 이렇게 꺼지지 않고 솟아올랐기에 아침해는 일찍 뜨고 저녁 해는 늦게 집니다.

 

합천 모산재 아래 영암사지가 화려하고 환하고 장하고 씩씩하다면, 여기 단속사지는 따사롭고 밝고 정겨우면서도 점잖은 절터입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대숲은 마을을 세로질러 올라가다 보면 오른편에 있습니다. 유홍준 선수 ‘구라’만큼 멋지지는 않습니다. 크지도 않습니다. 하지만 안에 들어가면 아늑한 느낌은 대단합니다. 여기에는 단속사지에서 나온 여러 석재들도 써서 지은 민가가 있었습니다. 지금은 주추가 남았습니다.

 

 

일행 가운데 스스로는 ‘촌년’이라 이르는 한둘은 찔레순을 질러서는 껍질을 벗겨 먹습니다. ‘촌년’이 아닌 다른 사람이 묻습니다. ‘찔레순이 무슨 맛이냐?’고요. 아무 맛도 안 나고 비릿하기도 하고 하지만 그냥 풀맛으로 먹는다는 답이 돌아옵니다.

 

버스를 타고 나오는 길에 광제암문(廣濟嵓門)을 들렀습니다. 세상을 널리 구제하기 위해 드나드는 바위문쯤으로 보면 됩니다. 옛날 단속사가 제대로 서 있던 시절에는 여기가 출입문이었겠습니다. 광제암문으로 내려가는 옛길은 사라져가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누리다 남사마을로 돌아왔습니다. 일찍 자리를 잡은 어르신들은 여기 평상으로도 모자라 마을회관에 들어가 누우시기도 했다고 합니다. 이런 기행 보기 드뭅니다. 걷다가 쉬고, 쉬다가 눕고, 누웠다가 일어나 점심 먹고…….

 

 

 

예담원이라는 밥집에 들어가 점심을 먹습니다. 돼지고기도 나오고 뜰깨죽도 나오고 토종 쌈장도 나오고 상추쌈도 나오고 갖은 나물 반찬 절임 반찬들이 나왔습니다. 막걸리도 나왔는데 뒷맛이 무척 개운했습니다.

 

단체 손님을 위한 1만원짜리 맞춤 밥상이라는데, 이래 갖고는 남는 이윤이 거의 없겠습니다. 게다가 우리 일행은 너나없이 모두들 쌈이라들을 몇 차례 더 날아다 먹었습니다. 특히 어르신들 입맛에는 더없이 맞았던 것 같습니다.

 

점심을 먹고는 1시간 남짓 남사마을 여기저기를 거닐었습니다. 남사마을은 돌담과 돌담장, 그리고 오래 된 기와집으로 이름높은 동네입니다. 담장 높이가 좀 높아서 둘러보는 이에게는 좀 걸리적거리기는 하지만 그냥 둘러보기만 해도 썩 멋집니다.

 

 

 

그리고 여기 이 남사마을은, 다른 모든 오래된 마을이 다 그렇듯이, 남사천 흘러내리는 물줄기가 U자 모양으로 휘감은 그런 자리에 있습니다. 개울 따라 거니는 걸음은 시원하기만 합니다. 물길 좋은 데라야 좋은 마을이 들어설 수 있음을 일러주고 있습니다.

70년대에는 꽤나 잘 살았을 것 같은 집 대문에 붙어 있는 표준농가 표지. 70년대 시골 마을에 이렇게 초인종을 해달 정도면 상당한 집안입니다.

여기는 이순신 장군이 백의종군 당시 하룻밤 머물렀던 집도 있습니다. 1597년 모습 그대로는 당연히 있지 않고 지금은 무슨 니사재(尼泗齋)라는 재실이 돼 있습니다. 당시는 박호원인가 하는 이의 노비 노릇을 하는 이의 집이었다고 합니다.

 

장암과 니사재 사이에 있는 나무. 감나무가 아니라 뽕나무입니다. 오디가 맺히고 있었습니다.

니사재.

 

바위 위쪽에 丈岩(장암)이라 적혀 있습니다.

 

 

돌담 위에 놓인 화분들. 가꾸는 이의 손길이 느껴집니다.

 

골목에 피었다가 진 민들레들. 바람이 불지 않는지 그 홀씨가 날리지 않고 그대로입니다.

 

어르신들 때문에 예정보다 조금 일찍 출발했습니다. 창원으로 돌아오는 길에는 목화시배지에 들렀습니다. 간단하게 볼일도 보고 전시관도 둘러보고 기념 단체 사진도 찍는 겸사겸사였습니다.

 

목화씨를 중국서 가져온 문익점에게 내려진 호칭이 부민후(富民候)임을 저는 오늘 여기서 알았습니다. 여기 ‘부민’은 ‘부유한 백성’이 아닙니다. ‘백성을 부유하게 했다’는 뜻입니다. 목화로 만든 솜이 상민·천민에게까지 골고루 미치지는 않았지만, 그 공로는 대단하게 인정된 모양입니다.

 

현판이 부민각입니다.

 

 

이날 동행하신 어르신들께, 그리고 이런 자리를 마련해 준 ‘꽃들에게 희망을’에게 고맙다는 말씀을 올립니다. 그리고 그보다 더 큰 고마움을, 불편함을 참고 기꺼이 함께해 주시고 때로는 도우미 구실까지 해 주신 다른 참가자 여러분께 올립니다.

 

경상남도람사르환경재단이 지원하고 경남풀뿌리환경교육센터와 갱상도 문화공동체 해딴에가 공동 주관·주최하는 생태역사기행은 6월 19일로 이어집니다. 남해 바래길, 풍경이 가장 아름답고 시원한 대량마을 일대를 걷습니다. 상주해수욕장과 그 시원한 솔 그늘도 누립니다.

 

대량마을은 아니지만, 남해 풍경. 홍현마을 전경입니다.

푸짐한 점심은 당연히 준비합니다. 자연 생태가 우리 인간에게 어떤 보람과 즐거움을 주는지를 잘 알 수 있는 루트입니다. 참가비는 3만원이고요 문의·상담·신청은 055-250-0125나 010-8481-0126으로 하시면 되겠습니다.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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