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에서 본 세상/사람이야기

송정문, 한 여성장애인의 좌절과 도전

기록하는 사람 2012. 11. 28. 1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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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예전부터 그가 궁금했다. 2000~2001년 무렵 혜성처럼 나타나 ‘경남여성장애인연대’를 창립하고, 진보적 장애인·여성 인권운동의 핵심 인물로 떠오른 여자. 금기로 여겨온 장애인의 성(性) 문제를 공론의 장에 올리고, 매년 관변장애인단체를 통해 시혜와 동정으로 치러져온 ‘장애인의 날’ 행사를 처음으로 거부했던 사람, 송정문(1972년생) 씨 이야기다.

※글이 좀 길어 스크롤 압박이 심할 겁니다. 미리 각오하고 읽으시기 바랍니다. 200자 원고지 100매에 달하는 글입니다. 월간 피플파워 10월호에 실린 글보다 더 깁니다. 
 
2002년에는 당시 베니스영화제에서 감독상을 받아 극찬이 쏟아지던 영화 <오아시스>를 정면 비판하는 글을 발표, 전국적인 논쟁을 촉발시킨 장본인이 바로 그였다. 이 일로 그는 장애인 문제를 장애인 입장에서 가장 확실히 짚어내는 논객으로 떠올랐다.

이후 경남도민일보 칼럼위원으로, 경남여성장애인연대 대표 자격으로 장애인 인권문제에 대한 많은 글을 썼고, 2004년에는 MBC경남의 시사풍자 프로그램 ‘아구할매’ 작가로 발탁돼 3년간 ‘갱상도 표준말(토박이말)’로 방송 제작에 참여했다. 이 기간 동안 경남대 대학원 사회복지학과에 진학한 그는 또 한 차례 싸움을 시작한다. 대학이 장애인 시설을 제대로 갖추지 않아 정상적인 교육을 받을 권리를 침해했다며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한 것. 석사 과정의 재학생이 학교를 상대로 이런 싸움을 벌이는 것은 그로 인해 초래될 지도 모를 불이익을 감수하겠다는 각오가 아니면 어렵다. 그는 끝내 ‘일부 승소’ 판결을 받아냈고, 판결 2년 후에는 석사학위도 받았다.


그런 그가 요즘은 ‘장애인 거주시설’을 상대로 또 한 번의 힘겨운 싸움을 벌이고 있다. 이 또한 시설 운영자들의 눈치와 입김으로 인해 아무도 달려들지 않는 싸움이다. 

세 살 때 사고로 하반신 마비가 된 후, 학교는 문 앞에도 가보지 못했다는 그가 오랜 ‘은둔형 외톨이’ 세월을 극복하고 인권운동의 투사로 변신할 수 있었던 계기는 뭐였을까?

인터뷰 요청을 했더니 그는 창원에 있는 장애인자립생활센터협의회 사무실에서 보자고 했다. 하지만 그가 사는 집을 보고 싶었다. 집이 어디냐 했더니 마산 양덕동 한일타운 3차 아파트란다. 거기서 보기로 하고 약속시간에 맞춰 아파트로 갔다. 마침 퇴근길 교통정체로 그가 좀 늦게 도착하는 덕분에 그가 혼자 차에서 내리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빨간색 포르테 승용차를 몰고 온 그는 주차 후 운전석을 뒤로 젖혀 뒷좌석에 놓인 휠체어를 한 손으로 들어올렸다. 족히 10kg는 넘는 휠체어를 운전석 옆에 내려놓더니 능숙하게 옮겨 탄 후 차문을 닫았다. 이 과정을 김구연 기자가 계속 촬영하는 게 쑥스러웠던지 “아유, 이럴 줄 알았으면 좀 예쁘게 하고 올 걸…”하며 환하게 웃었다.

13층, 열네 살 딸과 둘이 사는 24평 아파트 식탁에 마주 앉은 그는 기자에게 홍삼주스를 권했다. 집에서 직접 홍삼제조기로 만든 거라고 했다. 그래서인지 진한 맛이 느껴졌다.


세 살 때 넘어져 장애인이 되다

-지금 맡고 있는 현직이 뭐죠?
“경남장애인자립생활센터협의회 대표예요. 이름이 좀 길죠?”

-맡은 지 오래 되셨죠?
“네 2007년도부터….”

-지난 총선과 2008년 총선 출마할 때는?
“그 땐 휴직을 했죠.”

-요즘 거주시설 장애인 인권문제를 홀로 제기하고 계시던데. 사실 그 문제를 제기하기가 쉽지 않을 텐데. 그 시설들의 반발이라든지 압력이 만만찮을 것 같아요.
“네. 그래서 제가 계속 문제제기를 하고, 저 혼자 (블로그와 페이스북 등에) 글을 올리는 이유도 다른 분들이 다칠까봐. 저 하나만 희생을 하더라도 하자고 작정하고 나선 거죠. 하지만 뒤에서 표 나지 않게 돕는 분들도 있어요.”

-일단 시설 장애인 문제는 놔두고, 원래 고향이 어디시죠?
“마산 월영동에서 태어나서 죽 자랐고, 산호동에서도 좀 살다가 결혼해서 내서읍으로 갔다가 이혼하고 양덕동으로 와서 살고 있죠. 마산 토박이예요.”

-부모님은 뭐 하시는 분인가요?
“장사하셨어요. 방앗간을 하셨는데, 고춧가루, 참기름 이런 거 팔고….”

-시장에서요?
“산호동에서, 마산상고 근처에서 하셨어요. 원래 거기도 시장이 있었는데 길이 나면서 골목처럼 되었죠.”

-두 분 다 살아 계신가요?
“네. 지금은 신포동에 계신데 어머니가 몸이 좀 아프셔서 장사는 이제 안하시고….”

-연세는?
“아버지가 44년생, 어머니는 46년생이죠.”

-형제는 남동생이 있죠?
“네. 남동생 하나뿐이예요. 지금 서울에서 직장생활하는데, 워낙 공부벌레였던데다 지금은 일벌레라 서른아홉에 아직 노총각으로 살고 있어요. 그 때문에 부모님이 애를 많이 태우고 있죠.”

-명절에는 가족이 부모님 집에 모이나요?
“네. 그런데 부모님 집이 계단이 있는 곳이라서 보통 저희 집으로 오죠.”

돐 사진. 이 때까진 장애인이 아니었다. @송정문

-세 살 때 장애가 되었다고요? 넘어져서 그랬다는 게 무슨 말이예요?
“월영동 거기에 조그만 시장이 있었어요. 청과물 시장이었는데, 그 뒤편 골목에 우리 집이 있었어요. 세 살 때 막 걷기 시작하면서 청과물 시장 쪽으로 걸어 나왔나 봐요. 흙바닥에 주저앉았는데, 그 길로 그렇게 되었어요.”

-어떻게 주저앉았기에 그렇게 되죠?
“그러니까 어릴 땐 모든 신경들이 엉덩이뼈 쪽으로 모이는데, 거기가 약하대요. 잘못 주저앉게 되면 신경을 다치게 된다더군요.”

-그 당시 병원에서도 고칠 수가 없었나요?
“그 당시엔 병명도 잘 몰랐으니까, 그 땐 병명이 소아마비로 나왔었어요. 그런데 소아마비는 세균성 감염이거든요. 열나고 이런 것도 아니었는데, 진단이 잘못되어가지고…. 한참동안 약도 엉뚱한 약을 먹고….”

-그럼 정확한 병명은 뭐였나요?
“제가 그 병이라는 걸 열여덟 살 때 알았는데, 그러니까 요추에 신경을 다쳐서 그리 됐다는 진단이 열여덟 살 때 나왔어요. 요추 신경마비.”

-세 살 때 같으면 너무 어려서 잘 모를 땐데, 스스로 장애를 인식한 것은 언제쯤이었나요?
“정확히는 기억 못하는데, 열 살 때쯤이었던 것 같아요. 제 어머니가 방앗간을 하시는데, 그 앞에 의자 하나가 있었어요. 거기 앉아 지나가는 사람들 구경하고 있었는데, 동네 아이들이 물총으로 저를 쏘는 거예요. 그러면서 잡아보라는 거죠. 너무 화가 나서 보니까 바닥에 요만한 나무 작대기가 있더라고요. 그걸 주워서 집어 던졌어요.(웃음) 그래도 아이들이 거의 가까이 와서 제 몸이 다 젖을 때까지 물총을 쏘는 거예요. 그 날 엄청 충격을 받은 것 같아요. 아. 내가 대항할 수 없구나. 그런 걸 그 때 처음 알았죠.”

-그러면 그 때도 어리긴 했지만, 사는 게 힘들다는 걸 많이 느꼈겠네요.
“그렇죠. 저는 정확한 기억이 안 나지만, 어머니 말씀으로는 그 때부터 (내가) 교회도 안 가려고 하고, 외출도 안 하고 집안에만 있으려 하고 그랬다더라고요.”

-원래 크리스찬 집안이었나요?
“아뇨. 제가 다치고 나서부터, 옛날에 기복신앙이라고 해서 열심히 기도하면 나을 것이다, 그런 기대로 일곱 살 때부턴가? 부모님하고 전부 다 교회생활하신 걸로 알고 있어요. 정말 다들 열심히 교회 다녔어요.”

-어느 교회였나요?
“동광교회. 마산 창동 코아제과에서 육호광장 쪽 가는 길에 있는….”

-지금도 동광교회 다니시나요?
“아뇨. 지금은 이쪽으로 이사 오고 나서 성은교회라고.”

-예수교장로회 쪽인가요?
“네.”

-예장이 대체로 보면 좀 보수적이지 않나요?
“그렇긴 하죠.(웃음)”

-그런 보수적인 교회 분위기가 현재 본인의 가치관과 맞나요?
“제가 이사를 자주 다니다 보니 워낙 많은 교회를 옮겨 다녔는데, 그런데 고신이다 뭐다, 진보다 해서 가도 목사님 따라 다르더라고요. 여긴 목사님이 너무 좋으셔요. 외국인노동자도 오시고 이주민들도 많이 오시는데, 되게 많이 챙기시고…. 그리고 조그만 교횐데 엘리베이터가 있어요. 그런 게 좋은 것 같아요.”

-성장 과정에서 초․중․고등학교도 가보지 못하고, 나중 검정고시를 거쳐 대학 가려 할 때도 아버지가 ‘가지마라. 너도 힘들고 주위 사람들도 힘든다’며 반대하셨다던데….
“어떻게 아셨어요?”

-다 조사를 해보고 왔죠.(웃음) 어쨌든 그 때 상처를 많이 받으셨겠네요.
“저희 아버지가 워낙 한국사회의 보수적인 남성상인데요. 그렇게 자라시기도 했고, 그러니까 딸이라고 있는데, 아픈 딸이 밖에 나가서 그러면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준다는 걱정을 하신 거죠. 저희 아버지가 피해주는 걸 엄청 싫어하셨거든요. 초등, 중고등학교도 안 가본 딸이 어느 날 검정고시를 치더니 대학 가겠다고 하니까, 적잖이 당황하시고…. 그런데다 또 남동생이 워낙 공부를 잘해서 거기에 모든 투자를 하고 있는데, 딸내미가 대학을 가겠다고 하니 아버지 입장에선….”



열여덟 살까지 ‘은둔형 외톨이’의 삶

-그러니까 초․중․고등학교를 다닐 시기에는 학교에 갈 엄두도 못냈고, 검정고시도 생각을 못했나요?
“그런 게 있는 줄도 몰랐습니다. 한참 뒤에, 열네 살인가 열다섯인가 그쯤 되었을 때 동네 이웃분이 검정고시라는 게 있다고 해서…. 그 때부터 공부를 했죠.”

-그러면 그 전에는 성장기에 뭘 하고 지냈나요?
“어머니께서, 바보가 되면 나중에 사기당한다고, 어머니 아버지 돌아가시면 어떻게 하냐 해서 글을 배워줬어요. 그리고 남동생이 학교에 다니니까 동생 숙제해주라고 그랬었어요. 그래서 자연히 이것저것…. 졸업을 위해서는 아니었지만 책도 보고….”

-어떤 책을 주로 읽었습니까?
“소설을 좋아해가지고 세계명작 이런 걸 많이 봤고, 시집도 읽었고….”

-그 때 읽었던 소설 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건?
“음…. 제인에어. 그 사람의 삶이…. 비슷한 장애도 나오고….”

-저는 가물가물한데요. 제인에어가 어떤 내용이었죠?
“한 소녀가 고아원에서 자라서 자기 스스로 삶을 개척해나가는 그런 내용이었죠. 가정교사로 가게 된 집에서 한 남자와 사랑에 빠지게 되고, 그 남자가 화재로 인해 시각장애인이 되죠. 참, 여성으로서 대단하다. 어릴 땐 전혀 상상도 못하던 여성상을 보게 된 거죠.”

-그걸 보고 뭔가 해봐야 겠다 하는 어떤 깨달음을 얻으신 건가요?
“그것보다는 부러움이었죠. 아, 저 사람은 두 다리라도 성하니까 저렇게라도 할 수 있구나. 아~ 나도 저렇게 좀 살아봤으면 하는….”

-어머니는 어떤 분이셨나요?
“저희 어머니는 정이 많으신 분이세요. 또 옳다고 하는 일은 하시는 분이고, 그 시절에 또 워낙에 시어머니 밑에서 사시면서 눈물도 많으셨어요. 특히나 장녀가 장애가 되었으니, 저희 아버지가 외아들이시거든요. 외아들에 며느리를 맞았는데 첫딸이 장애가 되었으니 오죽했겠어요? 그래서 어릴 때 어머니의 기억은 많이 우셨던 것 같아요. 저 때문에 할머니에게 혼나는 모습, 말다툼하는 모습, 참 속상할 때가 많았죠.”

-하긴 그 시절 같으면 손녀가 잘못된 것도 모두 며느리 탓으로 돌리는 세상이었죠.
“네, 그래서….”

-아버지는?
“완고하시고, 말수가 적은 분이예요. 그래도 가끔 가슴 아픈 말씀을 하셨지만, 절대 매는 들지 않으셨어요. 그래서 제가 나중에 좀 커서 아버지에게 ‘참 서운하다. 왜 그렇게 딸내미에게 정 있는 말 한 마디 안하셨냐고’ 얘기를 했어요. 그래서 아버지 하시는 말씀이 ‘어차피 사회는 너무 척박하고 장애인이 살아가기 힘든데, 집에서 고이고이 기르면 니가 어떻게 버텨나갈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더 강하게 했다’고 하시더라고요.(웃음)”

-사실 옛날 어르신들이 다 그랬던 것 같아요.
“그런데 제 남동생은 워낙 똑똑하고 공부도 잘해서 동생에 대한 기대는 컸는데, 저에게는 아예 아무런 기대가 없었죠. 그냥 민폐 끼치지 말고 집에 조용히 있다가 나중 엄마가 돈 벌어서 조그만 가게라도 내주면 거기서 계산이나 하고 그래라. 그런 생각이셨죠.”

-열네 살 때 검정고시라는 게 있다는 걸 알게 됐고, 이후 대학을 가서 뭘 하겠다, 이런 장래에 대한 계획을 갖게 된 것은 언제 어떤 계기가 있었던 건가요?
“열여덟 살 때였는데요. 그 때까지는 그냥 고등학교 졸업장이나 따자는 생각에 준비를 했다가 그 때 정말 사춘기의 절정에 다다라 가지고, 어머니에게 왜 날 낳았느냐 뭐 이런 막말도 하고, 어머니 마음에 못도 많이 박고 이럴 때였는데, 중학교 검정고시를 친 뒤에 고등학교 검정고시를 쳐야 하는데, 전혀 공부를 안 하고 그냥 계속 놀며 방황했던 것 같아요. 반항의 절정에 달해가지고 죽을 작정을 했었어요. 약국에서 수면제를 조금씩 사다 모았다가 먹었는데, 그게 좀 약했는지 안 죽더라고요. 며칠 동안 비몽사몽으로 있다가 한 두어 달 고생했나? 그래서 죽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구나 하면서 뭘 해야 할까 하던 중 텔레비전을 봤는데, 휠체어 타고 다니는 미국사람이 학교도 가고 직장생활도 하고 하는 모습이 나오더라고요. 그 때 꿈이 생겼죠. 아, 미국으로 이민 가야겠다. 이민 가려면 영어를 해야겠고, 그러면 공부를 해야 되겠다, 이렇게 생각한 거죠.”

-미국의 무슨 프로그램이었죠?
“무슨 프로그램인지는 모르겠는데, 여러 장애인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었어요. 휠체어 장애인도 나오고 심지어 산소호흡기를 낀 사람도 나오는 거예요. 학교를 가는데 차가 와서 데리고 가고, 보조교사가 붙고, 너무 부러운 거예요. 아, 저기 가서 살면 되겠다 생각했죠. 그 때 어머니에게 휠체어를 사 달라고 졸랐죠.”

-아, 그 때까진 휠체어도 없었나요?
“네. 없었어요.”

-그러면 어떻게 생활했나요?
“집에만 있었죠. 어릴 때 물총 사건 이후로 밖에도 안 나가고, 친구가 집에 찾아오면 함께 놀고…. 집에만 있었어요. 그러다가 열여덟 살 때 드디어 나갈 생각을 한 거죠.(웃음)”

-그래서 휠체어를 사신 거군요.
“약 3개월을 조르고 졸라 결국 샀죠. 그런데 아버지가 ‘휠체어 사서 니가 갈 데가 어딨냐?’고 한 말에 오기가 생겼어요. 갈 데 있다, 만들면 된다 막 이랬는데, 막상 사고 나니 정말 갈 데가 없는 거예요. 그런데 그 때 집 주변에 교회가 하나 있었는데, 제가 운이 좋았는지 그 교회에 계단이 하나도 없는 거예요. 만일 계단이 있었으면 대인관계에 서툰 제가 갈 생각을 못했을 거예요. 거기서 친구들을 만났는데, 그 때가 열아홉이었잖아요. 그 때 친구들의 고민이 모두들 대학에 가느냐, 대학 안 가고 바로 취직하느냐 이런 거였어요. 그런 말들을 하는데 저는 아무 할 얘기가 없더라고요. 그 때부터 고민을 하면서 나도 대학을 가보자 이렇게 결심을 한 거죠.”

-그 때 어디에 살고 있었죠?
“산호동 살 때였어요.”

-그래서 대학을 가겠다고 하니 부모님 반응은?
“당연히 반대였죠. 그런데 어머니는 당시 제가 그토록 강하게 자기 주장을 한 게 처음이었으니까, 몰래 딸내미가 다닐 수 있는 대학을 알아보셨던 것 같아요. 어느 날 대학 팸플릿을 하나 구해다 주더라고요. 아버지는 완강하게 반대하던 시기였고. 그 팸플릿이 마산대학이었어요. 안경광학과라는 곳이 있었는데, 어머니 생각은 여기 나오면 뭘 해도 먹고 살 거라고 봤던 것 같아요. 하지만 제 생각은 이걸 해서 돈을 벌면 미국에 갈 수 있겠다는 거였어요. 어머니에게 말은 안 했지만…. 사실은 영어영문학과를 가서 영어를 배우고 싶었지만, 4년제는 안 된다고 하니까….”

-왜 영어영문과를?
“미국 가야 하니까. 하하하.”(함께 웃음)

-그래서 고졸 검정고시를 치고 대학 시험을?
“예. 스물한 살 때 둘 다 했죠.”

-마산대학 합격 후 대학의 반응은?
“그 땐 대학에 가서 시험을 쳤거든요? 그 후 학과장님이 보자고 연락이 왔어요. 택시를 타고 갔더니 하시는 말씀이 ‘우리 학교는 산에 있고, 장애인 시설도 잘 안 되어 있는데, 학교를 다 바꿀 수도 없고 그런데 어떻게 학교를 다니려고 하느냐’고 묻더라고요. 그 때 만약, 지금의 저라면 항의를 하거나 했겠지만 그 때만 해도 워낙 민폐를 끼친다는 말을 많이 들었고 학교 가고 싶은 열망이 워낙 커서 ‘합격만 시켜주시면 제가 어떻게 하더라도 알아서 다니겠다’고 말했죠. 그 때 교수님이 저를 잘 보신 것 같아요. 그 시절만 해도 장애인 입학거부가 만연할 때였거든요. 다행히 그렇게 해서 면접을 패스했죠.”

-그렇게 해서 2년 동안 어떻게 학교에 다니셨나요?
“집이 산호동이고 학교는 내서에 있는데, 택시밖에 이동수단이 없었어요. 택시도 시 외곽지역이라고 돈을 많이 받았어요. 두당 1만 원. 그 때 제가 수업 받는 학과가 4층에 있었는데, 도와줄 사람이 필요했어요. 다행히 다니는 교회에 재수생이 있었는데, 제 도서관증을 대여해주고 함께 학교에 다녔어요. 두당 1만 원씩이니까 택시비만 2만 원인데, 그것만 받는 택시기사는 정말 좋은 분이었고요. 휠체어비 5000원을 더 보태서 보통 2만 5000원, 3만 원을 내는 경우도 있었어요.”

-지금보다 훨씬 비싸네요.
“그 땐 시 외곽이라고 한 번 택시를 타면 왕복 차비를 요구했어요. 그래도 태워주는 기사님이 고마웠죠. 보통은 태워주지도 않아요. 택시 잡으려면 적어도 스무 대는 지나가야 한 대쯤 세워줬죠. 아침에 장애인이 타면 재수 없다고….”

악착같이 우수한 성적으로 대학을 졸업했지만

-매일 아침 그런 일을 겪으면 자괴감을 느꼈을 수도 있겠네요.
“그런데 그거보다는 더 컸던 게, 그런다고 내가 항의를 하거나 성질을 내거나 하면 나 말고 다른 장애인들에게도 안 태워줄 거라는 생각에 우선 예쁘게 보이려고 노력했어요. 그러다가 태워주면 ‘감사합니다’는 말을 수십 번은 했죠. 그것밖에 생각할 수가 없었죠. 어떻게든 학교는 다니고 싶었고…. 그렇게 한 학기를 지내고 나니 도저히 안 되겠더라고요. 그래서 방학 때 운전면허를 땄고, 차를 샀죠.”

-어쨌든 그렇게 해서 공부는 잘 하셨나요?
“음, 제가 휠체어를 타다 보니 강의실 뒷좌석으로 갈 수가 없어요. 강의실 문이 강단 바로 옆이었어요. 그래서 중간 사잇길로 휠체어가 지나갈 수도 없고 해서 맨 앞자리에 늘 앉았거든요. 졸 수도 없고 뭐. 하하하. 그리고 공부가 워낙 재미있었어요. 이렇게 쉬운 줄 몰랐어요. 집에서 혼자 공부할 땐, 사촌 언니가 가끔 도와주고 할 땐 너무 힘들었어요. 그런데 누가 앞에서 설명해주는데 너무 쉽고 재밌었어요. 그래서 열심히 했던 것 같아요. 장학생으로 졸업했었고, 재밌어서 그랬죠.”

-장학금을 받고 다녔나요? 4학기 모두?
“네. 전 학년 학점이 4.2인가 4.3인가 그랬으니까. 하여튼 졸업할 땐 1등으로 졸업했어요.”

-수재였군요.
“전 학년 평균은 2등이었어요. 그 당시엔 안경이 열풍이었거든요. 한 학년에 80명이나 되었어요. 그 중에는 서울대나 성심여대 졸업생 이런 분들이 취업이 안 되니까 안경점하려고 다시 마산대학 안경학과에 왔어요. 그런 분들은 정말 이기기 힘들더라고요. 그러다 졸업할 때 딱 한 번 1등을 했죠.(웃음)”

-93년에 입학해서 95년에 졸업한 거죠? 학교생활 중 특별히 힘든 건 없었나요?
“그 땐 학교에 장애인 화장실이 없었어요. 양변기도 없었죠. 그래서 화장실에 갈 땐 제가 만든 매트를 갖고 가서 바닥에 주저앉아서 용변을 해결했어요. 그래서 화장실 한 번 가면 30분 걸리고 이렇게 너무 힘드니까 화장실에 안 가려고 제가 물을 안 마셨어요. 그래서 그 때 만성방광염이 걸렸어요. 지금도 그 후유증이 있어요. 하지만 그 땐 그게 나에게 주어진 첫 시험관문이라고 생각했으니까 정말 악착같이 했어요. 이걸 이겨내지 못하면 내가 원하는 삶을 살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 때 부모님은 응원을 해주셨나요? 처음엔 반대했지만?
“네. 그랬어요. 얘가 좀 적응을 하고 성적도 좋게 나오고 하니까 되게 좋아하셨어요. 어머니가 매일 도시락도 싸주시고…. 식당이 2층에 있어서 거기도 가기 힘들었거든요.”

나 아닌 다른 장애인들의 아픔을 느끼고

-그토록 힘들게 졸업을 했는데, 취업은 했나요?
“안 되더라고요. 안경사 시험도 합격했는데…. 그 땐 안경사가 워낙 모자랄 때라 안경사 자격증 못 딴 친구들도 취업이 되었는데, 장애인이라 안 되더군요. 저 혼자 취업을 못했죠. 그래서 안경점을 차려보려 했는데 돈이 너무 많이 들더라고요. 가게 전세금과 기계, 인테리어 등 합쳐서 계산해보니 1억 5000, 좀 괜찮은 자리는 2억은 잡아야겠더라고요. 그걸 감당할 돈이 없었죠. 결국 그 때부터 또 집에 있어야 했어요.”

-집에서 뭐하셨어요?
“할 일이 뭐 있겠습니까? 그냥 어머니 일 도와드리고 있었죠.”

-그 때 나이가?
“스물 넷, 스물 다섯 올라갈 때였죠. 나가서 학교 다니다가 졸업하고 다시 집에만 있으려니 정말 미치겠더라고요.(쓸쓸한 웃음) 난 정말 아빠 말마따나 아무 것도 안 되는 건가? 좌절감에 빠져 있었는데, 마침 교회 분 소개로 장애인밀알선교단이라고 있었는데 목사님을 만났죠. 거기에 간사로 들어가게 됐어요. 행정과 회계를 맡아 했는데, 2000년까지 약 5년 정도를 일했어요.”

-그 때 60만 원 받았다고요? 5년 동안 한 번도 오르지 않고요?
“예. 올려달라고 할 만한 상황이 아니었어요. 후원금으로 운영되는 곳인데, 목사님도 아내와 자식들 있고 그런데 100만 원밖에 못 받아 갔거든요. 그래서 다른 사람을 구하기 힘든 자리였는데, 저는 오히려 그래서 좋았어요. 경쟁자가 없으니까. 나가란 소리 안하는 곳이잖아요.(웃음) 그 직장이라도 있어서 집을 나설 수 있다는 게 행복했었죠.”

-그 때 밀알선교단에 계시는 동안 나 아닌 다른 장애인들을 만나는 계기가 되신 거죠?
“네. 그것도 그렇고, 나 혼자 겪는 아픔이 아니구나 하는 걸 느낀 계기도 됐죠.” 

-그 때 장애인 인권 문제에 눈을 뜨게 되신 건가요?
“그 때는 인권까진 아니었고, 아 정말 이렇게 비참하게 사는 사람이 정말 많구나. 나는 도전이라도 해서 이렇게 (직장에) 나오지만, 이 사람들은 도전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무기력해 있구나. 그래서 도와줘야 겠다는 생각만 들었어요. 어쨌든 그 땐 솔직히 평범하게 사는 게 꿈이었거든요. 어딜 가나 이목이 집중되는 장애인이었기 때문에 그냥 평범한 사람처럼 살고 싶었어요. 언젠가 좋은 사람 만나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고 그렇게 살고 싶었죠.”

-그 때 남편을 만나게 된 건가요?
“스물일곱 때, 만나긴 스물두 살 때 교회에서 만났죠.”

-어떻게 만나게 된 건가요?
“교회에 찬양단 활동을 했는데, 거기서 기타 치는 사람이 남편이었어요. 저는 피아노를 쳤고….”


-피아노는 언제 배웠나요?
“어릴 때, 할 일 없이 집에 있으니까. 그 때 마침 골목 안에 피아노학원이 있었어요. 당시 어머니에게 제가 이런 말을 했대요. ‘왜 나는 학교에 안가?’ 또는 ‘왜 나는 소풍을 안가?’ 이런 말을 했대요. 그래서 그 때 어머니가 저를 업어서 피아노학원을 보내줬는데, 또 하나의 어머니 바램은, 피아노를 잘 치다 보면 페달을 밟고 싶어질 거고, 페달을 밟으려 하다 보면 다리에 힘이 생길 수도 있다는 마음으로 보내셨다고 해요. 그런데 저에겐 오히려 그게 상처가 됐죠. 아, 내가 아무리 피아노를 잘 쳐도 페달을 못 밟으니 잘할 수 없는 것이구나 하는 걸 알게 했던 첫 물건이 피아노였어요. 그래서 좀 하다가 피아노를 그만뒀는데, 교회에 피아노 반주자가 없었어요. 그래서 조금 칠 줄 안다는 이유로 제가 하게 됐죠.”

-사귀자고 한 건 누구였나요?
“(쑥스러운 웃음) 남편이었죠. 그런데 처음엔 ‘저 사람이 장난하나? 나 같은 사람을 누가 좋아하나? 저건 분명히 나를 희롱하는 거다’ 이렇게 생각했어요. 되게 불쾌했고 교회도 안 나가고 했는데, 나중에 진심이구나 하는 걸 알게 되고, 그래서 한 번 사귀어나 보자, 이러다가 98년에 결혼하게 됐죠.”

-남편은 당시 뭘 하던 분이었죠?
“신학공부를 하던 사람이었어요. 목사가 되려고 준비하던 사람….”

-그런데 왜 이혼하셨나요?
“결혼할 때만 해도 그 분이 저를 좋아했고, 저도 좋아했지만 서로 맞는 사람인지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을 안 했던 것 같아요. 살다 보니 안 맞는 게 너무 많이 발견되고 성격 차이가 컸고, 그 외 여러 가지 현실적인 문제도 있었고…. 서로 좋게 헤어졌어요.”

-그런데 98년에 결혼하고, 2000년 들어와 경남여성장애인연대를 만들어 인권운동을 시작하셨는데요. 그 2년 사이에 어떤 특별한 계기가 있었던 겁니까?
“저는 결혼할 때까지만 해도 현모양처가 꿈이어서 임신하고도 너무 좋았어요. 난 임신을 못할 줄 알았거든요. 부모님도 결혼을 반대했던 이유가 ‘남의 집 대 끊는다’는 거였거든요. 그런데 임신을 했고, 병원도 의사 시키는 대로 충실히 다녔어요. 그런데, 어머니가 아이를 지우자고 했어요. 그 땐 충격이었는데, 애라도 생기면 어떻게 감당할까 걱정하셨던 것 같아요. 저도 임신하고 고민을 많이 했는데, 장애인으로서 제 삶을 되돌아봤어요. 그런데 장애인으로서 제가 살아 있는 게 좋았어요. 그래서 혹여나 애가 장애인으로 태어난다 해도 오히려 내 경험으로 잘 키울 수 있겠다 싶었어요. 엄마도 잘 산다, 너도 잘 할 수 있을 거다 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았죠. 그래서 낳겠다고 했죠.”

-그런데 후천 장애잖아요. 그런 경우에도 아이가 장애인으로 태어날 가능성이 높은 건가요?
“실제론 그렇지 않죠. 그런 사회적 편견이 쌓여있고, 그런데다가 제가 어릴 적 장애다 보니 골반이나 하체가 약한 상태예요. 그러니까 애 낳다가 잘못될 수도 있다는 걱정이었죠. 하지만 제왕절개가 있으니까 그럴 위험도 없는 거죠.”

아이를 출산하고 장애인 인권에 눈을 뜨다

-그런데 그게 인권운동에 뛰어든 것과 어떤?
“아, 그래서 아이를 낳고 나서 저는 밀알선교단에서 휴직을 했고, 남편은 신학대에서 생활하고 주말에만 집에 오는데, 생활이 어려워 빨리 젖을 떼려고 분유를 먹일 때였는데, 어느날 분유가 떨어졌어요. 집이 내서 상곡이라고 처음 들어선 임대아파트였는데, 집에서 슈퍼마켓까지 가는데 경사진 길이었어요. 당시만 해도 휠체어를 1층에 두고 저도 집에선 기어서 생활할 때였는데, 모든 생활도구를 낮춰둔 상태라 아이를 혼자 두고 나가긴 너무 위험했어요. 애가 배고파서 자지러지는데, 요즘처럼 휴대폰이 있는 것도 아니고 정말 난감하더라고요. 한참 생각 끝에 쌀을 갈아서 먹였어요. 그러고 나서 정말 많이 울었어요. 아이에게 죄를 짓는 것 같아서…. 그날 밤 잠을 못자고 고민했어요. 그러다 ‘아, 나 같은 여성장애인을 도와주는 제도가 있을 것이다’라는 생각이 들었죠. 동사무소에 전화를 했죠. 생활보호대상자이냐고 묻더라고요. 그런데 남편이 비장애인이라 생활보호대상자가 안 됐어요. 아니라고 하니 ‘그러면 도와줄 방법이 없다’더라고요. 그러면서 시청에 전화해보라더군요. 시청에 전화해보니 오히려 저를 이상하게 생각하는 거예요. ‘중증이라면서요. 그런데 어떻게 애를 낳았어요?’하며 되묻는 거였어요. 중증장애인은 애를 못 낳는 거라고 생각하는 공무원이 사회복지과에 앉아 있더라고요. 경남도청에도 전화를 했는데 역시 그런 제도는 없다더군요. 이건 뭔가 문제가 있다는 생각을 했죠. 언론에는 장애인에게 각종 혜택이 있다고 광고하면서 삶에 절실히 필요한 여성장애인의 출산과 육아를 위한 아무런 지원제도가 없다는 게 이해할 수 없었어요. 그 때부터 여성장애인들의 모임이나 단체가 있는지 알아보기 시작했죠. 그 때 서울에 ‘빗장을 여는 사람들’이라고 장애여성들의 모임이 있더군요. 거기서 나온 책들을 구해 읽기 시작했어요. 여성장애인들이 자기 이야기를 써놓은 책이었는데 다들 나랑 비슷한 거예요. 결혼할 때 고민, 애 낳으면서 고민, 학교 가면서 고민, 아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똑같은 고민을 하고 있다는 것은 뭔가 문제가 있다는 생각을 했죠. 그러고 나서 저도 이런저런 문제의식을 이야기했더니 인권에 관한 책들을 읽어보라고 하더라고요. 그 때부터 마구잡이로 막 주는 대로 읽기 시작했죠. 메일로 보내주는 각종 토론회 발제문이나 그런 것도 닥치는 대로 읽었어요. 그러는 과정에서 ‘여성의 전화’라는 단체에 찾아가 이경희 대표를 만났고, 그렇게 하여 여성장애인연대라는 단체를 만드는 걸로 이어졌죠.”

-그런데 지금까지 송 대표님이 쓰신 글을 보면 단순히 장애인 문제뿐 아니라 사회구조적인 모순이라든지 그런 전반적인 지식의 바탕이 없으면 쓸 수 없는 글들을 많이 쓰셨잖아요? 어떻게 그런 공부를 하신 거죠?
“그런 글을 어디서 보셨어요?”

-우리 경남도민일보에도 많이 쓰셨잖아요. (그는 2002년부터 몇 년간 경남도민일보에 칼럼을 썼다.)
“아, 칼럼 쓸 때요? 사실 어릴 땐 텔레비전과 라디오뿐이었고요. 이후 토론문이나 자료집 같은 걸 보면 많은 사람들이 사회구조적 문제를 압축적으로 쓴 글들이 많더라고요. 또 그런 글에서 추천한 참고서적도 찾아보고 그런 거죠. 그 때가 2000년 즈음이었는데 정신없이 책을 읽었던 것 같아요.”

-그 때쯤 이경희 대표를 만났고, 그게 여성장애인연대 결성 계기가 된 건가요?
“그건 아니고, 제가 읽던 책 중에 ‘여성학’ 책이 있었는데, 그 내용을 보니 여성을 장애인으로 바꾸면 처지가 똑 같은 거예요. 그래서 제가 여성의 전화에 찾아갔었죠. 이런 일을 해보려고 하는데 좀 도와주십시오 했죠. 그 때 몇몇 여성장애인들 모임을 하고 있었어요. 그 모임에 강의를 해달라고 부탁했고, 그 때 이경희 대표께서 흔쾌히 우리 모임에 와서 강의를 해주셨죠. 그리고 그 때 또 많이 도와주셨던 분이 MBC 임나혜숙 국장이었어요. 이분은 진짜 우리 단체가 똑바로 설 수 있게 물심양면으로 다 도와주셨죠.”

-초창기에 모였던 몇몇 분들은 어떻게 알게 되신 거죠?
“밀알선교단을 통해 알게 됐던 분들, 그리고 다리 건너 이런 문제에 고민하고 있는 분들을 소개받기도 하고, 또 저 외에 이런 모임을 준비하고 있는 분들이 이미 있었어요. 다섯 명인가 되는 분들인데, 어떻게 해야 할 지 몰라서 3년째 준비모임만 하고 있었다더라고요. 그 팀을 만나게 되고….”

영화 비평을 쓴 후 ‘논객’으로 등극하다

-임나혜숙 국장은 어떻게 만나게 된 건가요?
“우리가 여성장애인연대 창립과 관련해 방송국에 홍보를 좀 하려고 안내지를 보냈어요. 그런데 전화가 왔더라고요. 그 분이 임나혜숙 국장이었어요. 사무실이 어디 있냐? 보고 싶다. 그래서 만났는데 무슨 일을 하려느냐고 물었어요. 그래서 취지를 이야기했더니 홍보도 해주시고 여러 가지로 도움을 주셨죠.”

-그래서 경남여성장애인연대가 출범하게 된 거로군요. 제가 송정문 회장을 확실히 기억하게 된 건 2002년 9월 10일자 경남도민일보에 기고한 ‘영화 <오아시스>에 담긴 장애인 편견’이라는 글이었는데요. 공개적으로 언론매체에 글을 쓴 것은 그게 아마 처음이었죠?
“네. 사실 저도 그 글이 신문에 실리고 사회적인 반응이 워낙 커서 부담이 될 정도로 깜짝 놀랐어요. 난리가 났었죠. 글이라는 게 이렇게 무섭구나 하는 걸 알았어요. 이창동 감독도 어떤 자리에서 제 글을 거론했다고 하더라고요. 그 글을 도민일보에 보내라고 추천한 사람도 임나혜숙 국장이었어요. 도민일보는 실어줄 것이라고 했죠. 그 때 우리가 급여도 없을 때여서 임 국장이 밥 사주러 왔는데, 영화를 보고 와서 흥분해가지고 막 이야기를 하니까 그걸 정리해서 글을 써오래요. 그래서 글을 써서 가져갔는데, 기고를 하라고 해서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도민일보에 보낸 거죠.”(당시 그 글은 파격적으로 1면에 실렸다.)

-그 글 이후 자연스럽게 경남도민일보 칼럼위원이 됐잖아요.
“네, 그게 저에겐 너무 귀한 행운이었어요. 글을 체계적으로 쓰게 된 첫 번째 계기가 도민일보 칼럼이었죠. 처음엔 칼럼 부탁을 할 땐 두 달에 한 번 쓰라고 하더니 나중엔 3주에 한 번씩 쓰라고 하여 부담이 좀 되었지만, 1년 정도 쓰면서 많은 생각과 공부를 하게 됐고, 제가 성장하는데 많은 역할을 했었죠. 요즘도 글을 좀 써보려 하는데 그게 잘 안 되네요. 그 때처럼 강제적이지 않으니까.(웃음)”

-여성장애인연대 초대회장을 맡았는데, 몇 년 하신 건가요?
“임기가 3년이예요. 준비기간 1년까지 합쳐서 총 4년을 했는데, 너무 지쳤어요. 단체 하나를 만들어서 꾸려간다는 게 예삿일이 아니더라고요. 그래서 임기 마치고 그만뒀죠.”

-그러고 나서 당시 마산MBC에 ‘아구할매’ 작가로 들어가셨죠?
“네. 그 때 임나혜숙 국장이 우리 단체 이사님이었는데, 총회 직전에 임기 마치고 좀 쉬려 한다고 했더니 ‘뭘 해서 먹고 사려고 하느냐’고 묻더군요. 그래서 아무 생각 없이 좀 쉬고 싶다고 했죠. 그랬더니 ‘본인이 몰라서 그러는데 갑자기 쉬면 심리적으로 자괴감에 빠질 거다’ 하시더니, 며칠 후에 전화가 왔어요. ‘아구할매’ 작가로 일해 보면 어떻겠느냐. 그래서 자연스럽게 그 일을 하게 된 거죠.”

-여성장애인연대 활동에서 특별히 기억에 남는 것은?
“여성장애인들, 아니 남자 여자 할 것 없이 장애인들이 거리로 나와 시위를 한 것은 2003년 여장연 시위가 처음이었어요. 그 때 요구안들이 장애인 이동권이었죠. 저상버스 도입, 장애인 콜택시 도입, 여성장애인 출산비 지원, 여성장애인 운전면허 비용지원, 산후도우미 제도 도입 등이었어요.”

-그게 다 관철이 되었나요?
“산후도우미는 국가적 차원에서 다음해 해결됐고요. 김혁규 도지사 말기였는데 모두 다 해주겠다는 약속을 받아냈어요. 그 다음 도지사가 김태호였는데, 약속 지키겠다 했는데, 여성장애인 관련 약속만 해주고 나머진 안 해줬어요. 저상버스는 5년 안에 100대 도입하겠다고 해놓고선 네 대인가 밖에 안 해줬죠.”

-여성장애인연대 회장은 월급이 있나요?
“네 있어요. 처음에는 없었는데, 나중에 성폭력상담소를 하면서 후원회가 생기고 후원금이 좀 들어오면서 그 때 돈으로 60만 원을 월급으로 책정했죠.”

-그것 갖고 아이 키우면서 어떻게 생활했나요?
“정말 하고 싶은 일이었으니까요. 우리 딸이 어느 날 사고가 생기면 여성장애인이 되는 거잖아요. 나처럼 살아선 안 되겠다 싶어 60만 원을 받고도 정말 밤이고 낮이고 열심히 일했던 것 같아요. 그러고 나서 임기 마치고 나니까 1000만 원 빚이 남더라고요.”

-그 빚은 어떻게 했나요?
“방송작가하면서 다 갚았죠. 그 때 임나혜숙 국장님이 배려해줘서 ‘아구할매’뿐 아니라 다른 프로그램도 맡고 하면서 제법 많이 벌었죠. 갑자기 많은 돈을 벌게 되니까 웬 횡재인가 싶더라고요.(웃음)”

-아마도 임 국장이 <오아시스> 영화평부터, 그 후 써온 칼럼까지 죽 보시면서 작가로서 자질 같은 걸 관찰해오다 발탁한 것 아니었을까요?
“그건 모르겠는데요. 방송작가로 들어가서 제가 가장 많이 들었던 게 ‘너 성명서 쓰니?’라는 말이었어요. 여장연 활동하면서 계속 강력한 글만 쓰다 보니 그렇게 굳어졌나 봐요. 들어가서 3개월 정도는 작가수업만 받았어요. 그런데 그 때도 임 국장님이 개인적으로 챙겨줬는지는 모르겠지만 돈이 들어왔어요. 그건 지금도 말을 안 하시니 몰라요.(웃음)”

-방송작가 하면서도 많은 공부가 되었겠군요.
“우선은 사람을 설득하는 방법이 다양하다는 사실을 배웠고요.(웃음) 많은 공부를 했죠.”

교수가 꿈이었던 대학원생, 학교와 싸움을 벌이다

-그 시기에 대학원 진학도 했죠?
“예. 경남대 사회복지학 석사과정에 들어갔는데요. 2005년에 입학해서 2009년에 졸업했어요.”

-그 때도 조용히 공부만 하지 않고, 대학을 상대로 싸움을 벌였잖아요.
“장애인 편의시설 소송을 했죠. 명색이 장애인운동을 한 사람이 부당한 걸 보고 그냥 있을 순 없잖아요. 우선 엘리베이터가 없었어요. 입학하자마자 대학측에 요구를 했는데, 돈이 없다느니 건물이 노후하다, 새로 지을 계획이다 하면서 1년이 지나도 감감 무소식인거예요. 리모델링할 계획이라 하여 행정실장도 만나고 했는데 안 되더라고요. 그래서 박재규 총장 면담을 요청했더니 답변이 왔는데 ‘총장실에 계단이 있어 만날 수 없다’며 거절했어요. 결국 해결이 안 되기에 소송을 내기로 했어요. 그런데 그 땐 장애인차별금지법이 제정되기 전이어서 소송에서 이길 수 있는 근거법이 없다더군요. 그래서 변호사에게 말했죠. 나는 분명히 학습권 침해를 받았다. 강당도 못 가고, 도서관도 못 간다. 결국 민사로 손해배상 소송을 했고, 일부승소 판결을 받아냈죠. 그 때 학교 측은 건물을 리모델링할 때 엘리베이터를 설치하겠다고 했어요. 그런데 얼마 전 리모델링을 했는데 엘리베이터 설치가 안 됐더라고요. 아마 다른 학생이 또 문제제기하겠죠.”


-지금은 장애인자립생활센터협의회 대표로 계신데, 거긴 월급이 좀 있나요?
“네. 있어요. 월 150만 원 정도.”

-그걸로 생활하는 데는 괜찮나요?
“엔지오 단체에서 그 정도도 많죠. 딸하고 둘이 사니까.”

-임기가 언제까지인가요?
“회장 임기가 3년인데, 한 번 연임 중이예요. 아직 2년 남아 있는데, 세 번 연임은 안할 생각이예요. 한 사람이 너무 오래하는 게 별로 좋지 않고요. 일자리도 부족하고 한데, 다른 일을 또 만들어야 하고….”

-다른 플랜이 서 있는 건가요?
“저는 사실 꿈이요. 다른 사람들은 정치가 꿈이냐고 묻던데, 사실은 교수가 되는 게 꿈이었어요. 그 꿈을 가진 건 여성장애인연대 첫 데모할 때였어요. 그 땐 우리 세력이 너무 약했어요. 100여 명 남짓밖에 안 됐거든요. 그래서 사회복지관 등에 일하는 사회복지사들에게 도움요청을 많이 했는데요. 호응도 좋았는데, 단 한 명의 사회복지사도 데모하는데 안 나타났어요. 그 때 생각했죠. 도대체 대학에서 사회복지사를 어떻게 가르쳐서 양성하기에…. 그래서 생각했어요. 내가 교수가 되어서 제대로 된 교육을 하고 싶다고.”

-그 플랜을 지금 가동 중인가요?
“제가 석사과정 때 학교 쪽하고 소송을 했잖아요. 그래서인지 박사과정에 안 뽑아줘요. 미달이 되어도…. 이런 상황에서 교수가 될 수 있는 길이 없잖아요. 재밌는 이야긴데, 제가 정치를 하는 것도 그걸 하면 교수가 될 방법이 있을까 해서 하는 이유도 있어요.(웃음) 정치인이 되면 박사과정에도 뽑아 줄 것 아니냐는 기대가 있죠. 저는 시간강사도 관계없어요. 학생들을 가르칠 수만 있다면.”

40대 이후 송정문의 ‘인생 3막’은?


그는 최근 조례 제정을 목표로 하고 있는 거주시설 장애인 인권 문제에 대해 할 말이 많았다. 그가 말하는 인권침해 사례만 해도 앞의 인터뷰 분량보다 많을 듯했다. 결국 그 문제는 다른 지면에서 별도로 다루기로 하고 인터뷰는 여기서 정리하기로 했다.

지면관계상 다루지 못한 게 또 있다.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에서 정당 활동하던 이야기, 총선 후보로 출마했을 때의 이야기도 흥미진진했다. 그는 이야기꾼이었다. 딱딱하고 어려울 수 있는 내용을 쉽고 재미있게 풀어낼 줄 알았다. 오롯이 자신의 경험과 고민 속에서 나온 솔직한 이야기라 더 생생했다.

그는 지금 만 40세를 지나고 있다. 그의 삶을 되돌아보면, 20대 이전까지는 좌절과 포기의 세월이었고, 20대 이후에는 도전과 투쟁의 연속이었다. 40대 이후의 송정문은 또 어떤 ‘인생 3막’을 만들어갈지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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