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저런 생각-김훤주

표충사 사천왕은 왜 예쁜 여자를 짓밟을까

김훤주 2012. 7. 16. 1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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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 표충사에는, 이처럼 작지만 생각할 거리도 있답니다. 그러면서 죄악에 대해 한 번 더 생각해 보게 됩니다. 바쁠 때는 스쳐지나가고 말지만, 그래도 절간을 찾을 때는 특별한 용무가 있지 않은 이상 마음이 느긋한 편이기 때문에 물끄러미 내려다보면서 이리저리 머리를 굴릴 때가 많습니다.

이리 여기게 된 지는 얼마 안 됐지만, 어쨌든 사천왕문이 제게는 그렇습니다. 보통은 일주문 다음에 사천왕문이 있고 그 뒤에 해탈문이 나옵니다만, 표충사는 조금 다릅니다. 일주문 다음에 수충루(酬忠樓)가 있고 뒤이어 사천왕문이 나옵니다. 그리고 해탈문은 있지가 않습니다.

1. 부처님 법을 지키는 사천왕과 사천왕문

그러거나 말거나 사천왕문에는 사천왕이 넷이 양쪽에 둘씩 늘어서서 이른바 불법(佛法)을 지키는데요, 말하자면 여기 드나드는 사람이나 세상만물에게서 삿된 기운을 쫓아내어 부처님 나라인 절간 전체를 청정 도량으로 유지하게 한다는 얘기쯤 되겠습니다.

표충사 들머리 수충루.


그런데 아시는대로 이 사천왕 그러니까 이름이 동서남북으로 해서 제각각인 지국천왕·광목천왕·증장천왕·다문천왕은, 인상을 험악하게 하고 엄청나게 큰 발로는 사람을 짓밟고 있는데요, 말하자면 그 발 밑에 깔린 인간들이 바로 불법을 흐트러뜨리는 죄악을 상징한다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깔려 있는 인간들이 다른 절간 사천왕문에 있는 인간들이랑 다릅니다. 여기 보면 지국천왕·증장천왕이 깔아뭉개고 있는 인간은 남자이지만 광목천왕이나 다문천왕이 깔아뭉개고 있는 인간은 여자입니다.

물론 이를 두고 남자나 여자나 죄를 짓거나 악을 저지르기는 매한가지라는 뜻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그렇게만 말할 수는 없는 까닭이 있습니다.

다른 절간 사천왕문에서는 사천왕들이 여자를 표충사 사천왕문에서처럼 죄다 남자를 깔아뭉갤 뿐이지 여자는 깔아뭉개지 않습니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이상하게 여기면서도 여기에 무엇인가 모르지만 색다른 뜻이 있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2. 남자뿐만 아니라 여자까지 깔아 뭉갠 표충사 사천왕


그러던 도중에 재미나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이렇습니다. 앞에서도 말씀드렸듯, 사천왕이 커다란 발로 짓뭉개고 있는 인간은 불법을 더럽히는 죄악(罪惡)을 상징합니다. 그리고 알려진대로 여자는 아름다움을 상징하기 십상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됩니다. ‘아름다운 죄악’ 또는 ‘아름다운 모습을 한 죄악’. 그렇다면 사천왕에게 짓밟힌 남자는 무엇일까요? ‘더러운 죄악’ 또는 ‘더러운 모습을 한 죄악’이 되겠네요.

실제로 여기 사천왕 발밑에 깔려 있는 사람들을 봐도, 남자는 그래도 얼굴이 험악하고 우락부락하지만 여자는 그다지 표독스럽다거나 앙칼스럽다거나 하는 느낌이 없습니다. 남자든 여자든 괴로움에 몸부림치는 것은 똑같지만, 여자는 얼굴에 악한 기운이 별로 스며 있지 않고 남자는 악한 기운이 더 들어 있는 듯이 느껴진다는 말씀입니다.

3. 거기에는 무슨 뜻이 담겨 있을까?


이러나저러나 이야기는 이어집니다. 세상 모든 죄와 악이 더럽기만 하다면 세상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죄악을 저지를 까닭이 없다는 것입니다. 더럽기만 한 일을 사람이 저절로 알아서 즐길 까닭이 없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죄와 악의 모습이 때로는 아름답기도 하고 향기롭기도 하고 편안하기도 하고 멋지기도 하고 달콤하기도 하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이 죄악을 저지르게 된다는 얘기입니다.

저는 이 얘기를 듣고 많이 놀랐습니다. 죄악이라 해도 그것이 때에 따라서는 또 각도를 달리해서 본다면 나쁘지 않은 것일 수 있다는 말은 충격을 던져줬습니다.

제 머릿속에 딴딴한 고정관념으로 박혀 있었던 선입견 또는 편견이었습니다. 바로 죄악은 더럽고 나쁘며 지저분하고 괴로운, 그래서 모든 사람이 싫어하기 마련인 그 무엇이라는 생각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얘기를 듣고 생각해보니 죄악은 꼭 그렇기만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죄악은 풍요일 수 있었습니다. 남의 재산을 훔쳐서 들키지 않고 살 수만 있다면 그렇지 않습니까? 죄악은 명예일 수도 있었습니다. 여럿이 함께 일하는 일터에서 남을 깔아뭉개면서 옳지 못한 방법을 쓰더라도 승진 잘하고 출세 잘하면 그렇지 않습니까?

4. 죄악이 나쁘고 더럽기만 하면 얼마나 좋을까?


죄악은 권력일 수도 있었습니다. 한 순간 대중의 눈을 속여서 그릇된 판단을 하게 하고 많은 표를 얻어 국회의원이나 시장·도지사나 대통령에 당선되면 그렇게 되지 않습니까?

죄악은 사랑일 수도 있었습니다. 예쁜 여자나 멋진 남자를 사랑해서 그 사람 눈에 드는 데 필요한 재산이나 명예나 권위나 지위 따위를 얻으려고 갖은 애를 쓰다 보면 그렇게 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어쨌든, 이렇게 본다면, 죄와 악이 언제나 나쁜 얼굴만 하거나 지저분하고 흉물스러운 모습만 띠거나 괴로움만 안기거나 하는 것은 아니라는 메시지를 표충사 사천왕문의 사천왕상이 지금 던지고 있는 셈입니다.

죄와 악이 예쁘고 아름다운 모습을 할 때도 있고 달콤하게 다가올 때도 있으며 푸근하고 향기롭고 달콤한 가운데에 죄와 악이 자리잡고 있을 수 있음을 일러주는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5. 밀양에 가시거든 꼭 들러보시기를


그래서 저는 여기 표충사에 오면 여기 사천왕문 사천왕 압도적인 발밑에 깔려 발버둥치고 허둥거리는 저 여자들을 잠깐이라도 들여다본답니다. 6월 23일 밀양시 지원을 받아 갱상도 문화학교 주관으로 표충사를 찾았을 때도 그랬습니다.

비질 자국이 곱게 나 있는 절간 뜨락을 거니는 사람.


들어갈 때는 이런저런 안내를 해야 했기에 그냥 지나쳤지만 곱게 제대로 비질이 돼 있는 절간 마당을 이리저리 거닐다가 흘러내리는 영정(靈井) 약수를 한 모금 떠마시고 돌아나오는 길에는 어김없이 그 사천왕과 남녀를 물끄러미 내려다 봤습니다. 그 때 그 얘기를 제게 해 줬던 그 목소리도 함께 떠올렸습니다.

‘죄악은 아름답고 빛나는 모습으로 올 수도 있다는…….’ ‘그래서 더 끌릴 수도 있고 그래서 더 욕심을 부리게 될 수도 있다는…….’ 그래서 저는 밀양에 간다시는 이들에게 이렇게 권합니다. 곳곳이 이름나고 멋진 데가 밀양이지만 그래도 이렇게 표충사에 들르셔서 사천왕 발밑을 한 번 정도는 그윽한 눈매로 보셔도 괜찮으리라고요.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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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이 김훤주 (산지니, 201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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