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저런 생각-김훤주

오래 된 나무를 앞에 두고 경건해지기

김훤주 2012. 4. 21. 1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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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600살 먹은 영암사지 들머리 느티나무

4월 7일 경남 합천 가회면 모산재 기슭 영암사지를 찾았습니다. 망한 절터 치고는 보기 드물게 씩씩한 그 모습을 한 번 더 눈에 담고 싶어서였습니다. 여드레 뒤에 함께 올 일행을 위해 답사하러 나온 길이기도 했습니다.

바람이 무척 세게 불고 있었습니다. 신문 방송에까지 나온 것처럼 여름철에나 불어대는 그런 태풍급이었습니다. 눈을 뜨기도 어려웠습니다. 10분도 채 서 있지 않았고 옷도 전혀 얇게 입은 편이 아니었는데도 몸이 무척 떨렸습니다.

재미나게 구석구석 돌아보겠다는 생각을 얼른 버리고 바로 언덕 아래로 뛰어내렸습니다. 그러고는 바람을 등지고 뛰듯이 걸어서 절터를 빠져나왔습니다. 그러는데 그 앞에서 커다란 느티나무를 한 그루 만났습니다.

2005년 들어선 바로 앞 빗돌에는 느티나무 나이가 600살이라 적혀 있습니다. 키는 30m군요. 어쩌면 모산재 저쪽 기숡 국사단의 사연을 몸소 겪었는지도 모릅니다. 국사단은 고려 말기 무학대사가 이성계의 조선 왕조 창건을 위해 하늘에다 기도를 올렸다는 자리거든요.

색이 벗겨져 좀 흐립니다.


예전부터 이 나무 장한 모습을 알고는 있었습니다만, 이 날 따라 더욱 장하게 느껴졌습니다. 그렇게 몰아치는 바람에도 저렇게 딱 버티고 있었으니까요. 바람이 그 잔가지는 흔들어 놓아도 줄기나 몸통까지 통째로 흔들지는 못하고 있었습니다.

2. 나무 앞에서 경건해진 적 있느냐는 친구

문득 이태쯤 전에 친구 한 녀석이랑 주고받은 얘기가 생각났습니다. 그 친구는 제게 나무 앞에서 경건해진 적이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저는 당연히 아니라고 답했습니다. 다만 나무가 멋지고 좋다고 여기기는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이는 다시 400년 500년 1000년 된 나무들이 있는데 그 나무들이 겪어온 세월을 생각해 봤느냐고 물었습니다. 당연히 저는 생각해 보지 않았다고 답했습니다.

그이는 다시 지금도 살아 있는 어떤 소나무는 200년도 오래 전에 화전민들이 농사지을 밭을 만들려고 질러댄 불에 그슬린 자국을 안고 있다고 했습니다.

화전민이 뭐 어떻다는 얘기가 아니고, 300년 400년 살아오면서 자기 몸통에 아로새긴 세월의 자취가 그렇다는 얘기라고 했습니다. 나무가 겪었을 눈과 비와 바람과 추위와 더위, 따위를 생각해 보라고 제게 말했습니다.

친구 생각을 하니까 느티나무가 더없이 우러러 보이지는 않았지만 다시 쳐다 보이기는 했습니다. 사람은 그 바람을 그대로 맞고 있으면 추워서 얼어터질 것 같아 피하는데 그 느티나무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 나무는 우람한 밑둥치로 중심을 똑바로 잡고 있었습니다. 그때 저는 느티나무 사진을 한 장 찍고는 바로 돌아서 내려오고 말았습니다. 빨리 돌아가야 한다고 마음이 급했던 탓이었습니다.

3. 오늘 아침 다시 떠오른 그 느티나무

오늘 아침 그 느티나무가 다시 떠올랐습니다. 비 때문이었습니다. 아침에 신문을 집으려고 문을 여는데 그 틈으로 바람을 타고 비가 파고 들었습니다. 싸늘한 기운에 놀란 저는 얼른 신문을 집어들고는 문을 닫았습니다.

느티나무 그 친구는 지금도 이 비를 맞고 있겠지요. 어제 밤에도 새도록 내리는 비를 맞았을 것입니다. 저는 이렇게 움츠리고 있습니다. 제가 나무처럼 어제 밤새도록 맞았다면 아마 제대로 살아남기조차 어려웠을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물론 많은 사람들이 사람이랑 나무를 어떻게 같이 두고 얘기할 수 있느냐고 말합니다. 그러나 저는 압니다. 나무도 더위에 잎을 늘어뜨리며 잎이 타거나 녹기도 합니다. 나무도 태풍에 흔들리고 휘청거리며 뿌리뽑히기도 합니다.

나무도 가뭄에 바짝 마르며 그러다가 죽기도 합니다. 나무도 추위에 얼어터지기도 하고 줄기나 가지가 끊어지기도 합니다. 나무도 영양분이 없어 시들거나 이런저런 상처를 입고 숨이 넘어가기도 하고 쏟아지는 비 탓에 가지가 꺾이기도 합니다.

4. 사람 못지 않게 모진 세월을 견뎌야 하는 나무들

이태 전 친구가 일러준 경건함을 생각해 봤습니다. 사람은 저 하찮은 나무랑 다르다고 여기면 경건함이 있을 리 없겠지요. 그러나 사람이 살아온 세월만 세월이 아닙니다. 사람이 견뎌낸 어려움만 어려움이 아닙니다.

사람 톱질에 잘려나간 연리목 그루터기.


나무도 사람 못지 않게 모진 세월을 살며, 나무도 사람 못지 않게 커다란 어려움을 날마다 견뎌내며 삽니다. 그러다가 사람이 죽어 나자빠지는 것처럼, 나무 또한 때가 되면 죽어 나자빠지겠지요.

자연이 정해준 만큼 목숨껏 살고 가는 나무도 있겠습니다. 태풍·해일·지진 같은 '천재지변'이나 '전쟁 또는 그에 준하는 사태'를 맞아 아닌 목숨에 가는 나무도 있겠습니다. 아니면, 자기로서는 아무 까닭 없이, 사람이 다가와 쓰윽 잘라버리는 바람에 그야말로 영문도 모른 채 비명횡사하는 나무도 있겠습니다.

어쨌거나, 다음에 영암사지에 가는 걸음이 있거들랑 이 느티나무 앞에 서서 그이가 견뎌온 600년 넘는 세월을 떠올리겠습니다. 사람 목숨 열 개 안팎 동안 살면서 그이가 틔워낸 꽃과 잎과 열매들도 함께 떠올리겠습니다.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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