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에서 본 세상

촛불집회와 진보세력의 무능

기록하는 사람 2008. 6. 11. 1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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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답했다. 항쟁의 지도부도 없고, 통일된 요구도 없는 시위라니. 기약도 없는 시위, 전술도 전략도 없는 투쟁의 끝이 궁금했다. 집단이성과 우발적 변수들이 시위의 향방을 결정하는 광화문 촛불시위 현장을 직접 보고 싶었다.

9일 무작정 배낭을 쌌다. 카메라와 충전기, 양말 3족, 수첩 두 개, 책 한 권을 챙겨넣고 서울행 열차에 몸을 실었다. 역시나 광화문은 '해방구'였다. 집회현장도 따로 없었다. 아무나 종이컵에 촛불을 끼워 불만 붙이면 됐다. 해가 지기도 전에 그냥 혼자서 촛불을 들고 길을 가는 여성들, 직접 쓴 손팻말을 들고 길거리에 걸터앉아 있는 사람들, 리어카에 10여 개의 촛불을 세워두고 컵라면과 김밥, 쥐포를 팔고 있는 노점상들이 즐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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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불다방. 어디서 나왔느냐고 물었더니 그냥 개인적으로 한단다. /김주완


광화문에서의 1박2일

시청 앞 광장은 각종 단체와 정당, 동호인들의 천막이 삥 둘러 쳐져 있었고, 천막마다 생수와 컵라면이 가득했다. 1500여 개 단체가 참여하고 있다는 '광우병위험 미국산쇠고기 전면수입을 반대하는 국민대책회의'도 수많은 천막 중 하나일 뿐이었다.

굳이 지도부가 필요하다면 이 대책회의가 맡아야 할 터였다. 하지만 대책회의는 전혀 그런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시위대를 뒷바라지 하는 봉사자 수준이었다.

그들 말고도 자원봉사자는 많았다. 승합차에 수십 박스의 커피를 쌓아놓고 아무에게나 공짜커피를 타주는 젊은이들도 있었고, 밤새 김밥과 생수를 나눠주는 '무적의 김밥부대'도 있었다. 민주노총이 없어도, 참여연대가 없어도 집회를 이어가는데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물론 이 두 단체도 열심히 자원봉사를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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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적의 김밥부대'가 시민들에게 생수를 무료로 나눠주고 있다. /김주완


기자증이 없어도, 카메라에 신문사 이름이 붙어있지 않아도 취재는 자유로웠다. 명함을 미처 챙기지 못해 걱정했지만 소심한 나의 기우였다.

최대인원이 모였다는 10일 밤. 경찰이 이중으로 설치한 콘테이너박스에 모래를 붓고, 구리스(기름)를 칠했다. 그건 소심한 경찰의 기우였다. 예비군복을 입은 자원봉사자들이 경찰을 대신해 시위대의 접근을 막아줬다. 경찰은 버스에 편안히 대기하며 아리따운 20대 여성들의 메모와 연애편지를 읽고, 연인들이 넣어준 음식과 음료수를 즐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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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박을 조롱하는 의미로 마우스를 끌고 다니는 시민. /김주완


하지만, 여기까지였다. 이 촛불이 언제까지 타오를지, 어떻게 하면 끝날 수 있는지 아는 사람이나 단체는 아무도 없었다. 시위대의 진짜 요구가 뭔지도 몰랐다. 그 요구를 체계적으로 정리해 내놓을 지도력도 없었다. 그래서 정권퇴진인지, 재협상인지, 쇠고기만의 문제인지, 대운하와 사영화 등 모든 정책의 문제인지도 몰랐다.

이게 시위의 순수성이고, 자연스러움일까. 물론 그런 점도 있다. 그러나 바꾸어 생각하면 이건 진보의 무능이었다.

교수노조와 민교협, 학술단체협의회가 9일 밤부터 새벽까지 광장토론회를 열었지만, 다양한 입장이 통일될 수 없음을 확인했을뿐이었다. 10일 낮엔 민주노동당이 청계광장 옆에서 길거리토론회를 열었지만 마찬가지였다. 이명박 정권에 불만을 품은 시민들이 거리로 뛰쳐나왔지만, 그들의 불만을 묶어내고 대안과 요구를 만들어낼 능력이 진보세력에겐 없었고, 준비도 해오지 않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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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수노조와 학단협, 민교협이 마련한 9일 밤의 광장토론회. /김주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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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노동당이 마련한 10일 광장토론회. /김주완


따라서 시민들은 이명박 정권의 정책에 불만을 표출하지만, 단지 문제있는 정책을 중단시키는 외에는 더 좋은 대안을 알지 못한다. 진보세력 역시 이와 똑같은 수준에 머물러 있다. 누구나 외칠 수 있는 '반대'나 '규탄' '퇴진' 외에 내놓을 수 있는 게 없다. 그래서 '2MB는 아무 것도 하지마!' 정도에 머물고 있다.

즐기지만 말고 고민하라

상황이 이렇다 보니 이번 촛불집회를 해결할 수 있는 주도권은 아이러니하게도 이명박 대통령이 쥐고 있다. 항쟁의 지도부가 없으니 대화할 상대도 없다. 그냥 대통령이 마음만 먹으면 끝난다. 고시철회하고 재협상하겠다고 선언하면 된다. 더 나아간다면 의료보험 영리화나 공기업 사유화, 대운하 등 새정부의 모든 정책을 원점에서 재검토하겠다는 것쯤 될 것이다.

만일 그렇게 되면 진보세력은 뒷바라지하느라 쓴 비용의 본전도 못찾은 채 잊혀질 것이다. 촛불이 주는 카타르시스만 즐기지 말고, 이후 세상의 구체적인 대안을 만들어내고, 그걸 놓고 대중과 소통하는 법을 치밀하게 고민해야 한다. 그리고 당장 촛불집회 이후엔 뭘 할건지도 구체적으로 준비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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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스센터에서 내려다본 광화문. /김주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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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완 지음 | 커뮤니케이션북스 펴냄
지역신문 기자의 고민과 삶을 담은 책. 20여 년간 지역신문기자로 살아온 저자가 지역신문에 대한 뜨거운 애정과 자부심을 갖고 기자생활을 하면서 겪은 일들을 풀어낸다. 이를 통해 서로 비슷한 고민을 가진 지역신문끼리 정보를 공유하는 장을 마련하고자 했다. 아직도 사라지지 않은 촌지, 살롱이 되어버린 기자실, 왜곡보도, 선거보도 등 대한민국 언론의 잘못된 취재관행을 비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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