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에서 본 세상

부러진 화살 대법원 판결문은 엉터리다(3)

김훤주 2012. 2. 6.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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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해 주장과 핏자국 감정 요구는 양립 가능하다

제가 알기로 진중권씨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김명호 교수와 박훈 변호사가 박홍우 부장판사 옷에 묻은 핏자국과 박홍우의 피가 같은지 여부를 감정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박홍우가 자해를 했다고도 주장하는데 이것이야말로 언어도단이고 자가당착이다."

얼핏 들으면 그럴 듯합니다. 진중권씨 말대로 박홍우 판사가 자해를 했다면 자기 옷가지에 일부러 다른 피를 묻힐 까닭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재판 과정을 들여다보고 한 번만 더 생각해 보면 진중권씨 주장이 엉터리임을 바로 알 수 있습니다.

이렇습니다. 경찰과 검찰은 박홍우 판사 몸에 상처가 났다고 했습니다. 길이 2cm에 깊이 1.5cm입니다. 그런데 석궁을 쏘면 위력이 두께 2cm짜리 합판을 뚫고 15cm가 더 나갈 정도입니다. 그리고 불완전 장전 상태에서 석궁을 쏘면 발사가 되지 않고 흘러내린다는 증언(이것도 1심에서 나왔지 항소심에서는 다루지 않았습니다)도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발사된 화살에 맞았다면 치명상을 입었어야 하고 그렇지 않다면 화살로 말미암은 상처는 전혀 없었어야 맞습니다. 따라서, 경찰 수사에서부터 법원 재판에 이르기까지 박홍우 판사랑 석궁을 잡고 몸싸움을 벌였고 그 과정에서 화살이 발사됐는지는 몰라도 일부러 쏘지는 않았다고 한결같이 주장하는 피고인으로서는 의심이 갈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박홍우 판사랑 석궁을 붙잡고 몸싸움을 벌였다고 한결같이 주장하는 김명호 교수의 영화 속 모습.


먼저 박홍우 판사 몸에 실제로 상처가 나지 않았을 개연성이 있습니다. 그리고 경찰과 검찰 수사 기록에는 상처(박홍우 판사 몸에 났다는)를 찍은 사진조차 들어 있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김명호 교수와 박훈 변호사로서는 박홍우 판사의 것이라는 옷가지에 묻은 피와 박홍우 판사의 피가 정말 같은지 확인해 보자고 요구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개연성도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앞에 말씀드린 실험과 증언을 따르면 석궁에서 발사된 화살 때문에는 그런 조그만(길이 2cm, 깊이 1.5cm) 상처가 날 수 없는만큼, 박홍우 판사가 자해를 했을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이는 핏자국 유전자 검사만으로는 풀 수 없는 문제입니다.

물론 저도 개연성은 높지 않다고 보지만, 어쨌거나 사건이 일어난 다음 박홍우 판사는 자기 발로 걸어서 자기 집에 들어갔다가 10분쯤 있다가 나왔습니다. 이는 자해를 하려면 충분히 할 수 있는 시간은 됩니다. 하지만 대법원 판결문은 이와 다릅니다.

증인 진술과도 맞지 않는 대법원 판결문


대법원 판결문은 "(목격자들은) 피해자의 옷을 들추니까 시뻘겋게 피가 묻어 있어서 경찰과 소방서에 바로 신고했다는 것이고, 출동한 소방관의 진술에 의하면 배꼽 부위에 상처가 있었고 출혈로 인하여 속옷이 빨갛게 물들어 있었다(그 사이에 피고인 주장처럼 위 피해자가 스스로 자해를 할 시간이나 기회를 갖기는 불가능했을 것으로 보인다)."입니다.

대법원 판결문에 나오는 이런 정황은 항소심 법정에서 증언을 통해 나온 것이 아닙니다. 항소심에 나온 증인은 모두 일곱 명이라고 알고 있는데 이들은 이런 시뻘겋게 피가 묻은 정황을 진술하지 않았습니다. 도대체 무엇을 보고 이렇게 적었는지 모르겠습니다.

게다가 이와는 다른 진술이 있기까지 합니다. 2008년 2월 25일 항소심 6차 공판에서 현장에 출동했던 권영록 119 대원은 박훈 변호사가 "구급 활동 일지에 '피의자가 1~2m 전방에서 석궁으로 활을 쏘았다고 하며, 화살이 복부에 맞고 튕겨져 나갔다고 함'이라고 적혀 있는데 피해자 박홍우한테서 직접 들은 말인가요?"라고 물은 데 대해 "예."라고 대답했습니다.
 

증인 진술과 다른 판결을 내린 신태길 재판장의 영화 속 모습.


화살이 박홍우 판사 몸에 꽂히지 않았다는 얘기입니다. 그런데도 검찰은 반대 신문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항소심 재판부 신태길 재판장은 이에 대해 충분히 증거 조사를 하지 않은 채 엉터리 판결을 내렸고 대법원 판결문 또한 이에 대한 검토 없이 이렇게 적었습니다.

제발, 실사구시(實事求是) 좀 하시기를

진중권씨가 1월 29일 트위터에 올린 글을 봤습니다. 거두절미하고 말하자면 "부러진 화살이 실화냐 하는 논쟁은 일단락 된 것 같다."입니다. 말하자면 진중권씨는 줄곧 허구라고 주장해 왔는데 이것이 충분히 받아들여졌다는 뜻입니다.
 


저는 아니라고 봅니다. 물론 영화에 허구가 많이 들어 있습니다. 영화에서는 사실에 대해 선택과 집중을 할 수밖에 없는데, 이조차 허구라고 한다면 저는 더 이상 할 말이 없습니다. 다만 저는 영화 속 법정 장면은 100% 사실이라고 봅니다.

여기서 사실이라는 말은, 법정에서 실제로 있었던 행동과 발언이라는 뜻을 넘어섭니다. 피고인 김명호가 아무리 죽을 죄를 지었고 성격이 괴팍하다 해도 재판을 제대로 받을 권리는 있는데 그 권리가 철저하게 짓밟혔다는 측면에서 일관되게 취사선택한 사실들이라는 뜻까지 담겨 있습니다.

이런 면에서 저는 진중권씨가 이어지는 트위트에서 "사법부에 대한 불신을 대변하기에 석궁 재판은 적절한 소재가 아니었"고 "영화에서 얻어진 사법 개혁의 정당성은 허구로 빚은 정당성에 불과"하며 "실제로 사법 폭력이 저질러진 사례들을 사용했어야 그 정당성이 현실성을 띠겠"다고 한 대목이 안타깝습니다.
 
재판을 재판장이 자기 마음대로 진행하고 피고인의 권리를 묵살하고 제대로 된 증거 조사 없이 판결을 내리는데 어떻게 사법 폭력이 아니라 할 수 있습니까? 석궁 사건과 석궁 재판은 구분해서 봐야 합니다. 석궁 사건은 진중권씨 말대로 사법부에 대한 불신을 대변하기에 적절한 소재가 아니지만 석궁 재판은 그런 불신을 대변하고도 남을만큼 적절한 소재입니다.

저는 진중권씨처럼 잘나지는 않았습니다. 그래도 1963년에 태어나 진중권씨와 같은 시대를 살아왔으며 진중권씨와 마찬가지로 이른바 운동판에서 한 번도 주류에 몸담지 않고(또는 못하고) 30년 가까이를 비주류로 살아왔습니다. 그런 면에서 여태껏 제게는 진중권씨가 나름대로 각별하게 여겨졌습니다.

저는 진중권씨가 지금껏 보수와 진보에서 모두 넘쳐나는 '조건 없는 제 편 감싸기'와 '자기가 좋아하는 존재에 대한 성찰 없는 열광'을 경계하고 비판해 온 데 대해 아주 훌륭하게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번 부러진 화살을 두고 한 발언들도 그런 맥락에서 나왔다고 저는 알고 있습니다.

이를 소중히 여기면서 이렇게 말씀드립니다. 부러진 화살에 대해 실사구시를 해 보시지요. 그리고 제 글을 한 번이라도 읽어봐 주시기 바랍니다. 사실 제시에서든 논리 전개에서든 제 글이 틀렸다면 그에 걸맞게 근거를 대면서 짚어주시면 됩니다. 그렇지 않다면 부러진 화살이 허구라는 주장은 거둬 주시기 바랍니다.(이어집니다.)

김훤주
부러진화살
카테고리 정치/사회 > 법학
지은이 서형 (후마니타스, 200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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