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저런 생각-김훤주

벌거벗은 나무와 벌거벗지 않은 나무

김훤주 2011. 12. 30. 17:12
반응형
1.
70년대 말에 이런 우스개소리가 있었다고 합니다. 물론 가벼운 이야기는 아닙니다. 박정희 유신 정권 서슬이 시퍼렇던 시절이니 꽤나 긴장된 분위기에서나 나올 수 있는 말이었지요.

친구 몇몇이 모여 '누가 가장 오래 목욕을 안 했는지' 내기를 했습니다. 먼저 철수가 말했습니다. "나는 명절 때만 한다네." 설과 추석에만 하니 한 해 두 차례 목욕을 하는 셈이지요.

이어서 길남이나 말했습니다. "나는 생일이 돼야 목욕탕에 간다네." 한 해에 한 번밖에 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랬더니 옆에서 영철이가 말했습니다. "나는 올림픽이 열릴 때만 한다네." 4년마다 한 번 하는 셈입니다.

그러고 나서 모두들 졌다 싶어서 아무 말이 없었는데요, 좀 있다가 훤주가 입을 열었습니다. "나는 정권이 바뀔 때마다 한다네."

1961년 박정희가 군사쿠데타로 집권해 1979년 김재규가 쏜 총알에 맞아 죽을 때까지 대통령으로 있었으니 18년 동안 목욕을 하지 못한 것이 됩니다.


2.
해도 뜨면 지게 마련이고 달도 차면 기울게 마련이라 했습니다. 저는 이 말이 영원한 권력은 없다, 무한 독재는 없다, 절대 권력은 없다, 이런 정도로만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니까 열흘 붉은 꽃은 없다와 비슷한 의미로 여겼던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렇지 않게 바뀌었습니다.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 모든 것은 변하기 마련이다라는 뜻으로 읽습니다. 이런 제 생각이 크게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만, 조금 일반화해서 생각할 줄 알게 됐다는 정도는 될 것 같습니다.

3.
세월이 흐를수록 그런 생각이 더욱 커집니다. 변하지 않는 것은 없고, 그러므로 무엇이든 완전한 것이 있을 리가 없으며, 때로는 완전한 것이 있다 해도 언젠가는 불완전한 것으로 바뀌고 만다는 것입니다.

바뀌고 또 바뀌는 것이 세상만물 정한 이치라면 지금 자기가 무엇을 얼마나 가졌는지도 별로 중요하지 않을 것입니다. 어쩌면 지금 자기가 무엇을 얼마나 가지지 않았는지가 더 중요할는지도 모르겠습니다.

4.
올 겨울 이런저런 길을 오가면서 눈에 담긴 풍경을 되새기면 더욱 그렇습니다. 여기 갈대가 있습니다. 갈대들은 가을에 하얀 꽃을 피워올렸습니다. 이것들 한 때는 한껏 부풀어 올랐고 그것이 무척 그럴 듯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갈대는 부풀어 올랐던 꽃술을 깔끔하게 떨어뜨렸습니다. 만약 갈대들이 이렇게 꽃술을 털어내지 않았다면 철지난 꽃술이 이리저리 뭉쳐져 볼품이 매우 없을 것입니다.

요즘도 길을 가다 보면 꽃술이 잔뜩 뭉쳐진 채로 달려 있는 갈대들을 보곤 하는데, 실제로 보기도 좋지 않고 또 느낌 또한 상쾌하지 않습니다.

5.
이런 느티나무는 어떤가요? 올해는 가을에 날씨가 좋지 않았던 탓인지 겨울이 지나도록 잎을 잔뜩 매단 나무가 무척 많이 눈에 띕니다.

잎은 이미 푸른 빛을 잃었습니다. 그렇게 시들어 말라버렸는데도 가지에서 떨어져 나오지 못한 채 그대로 달려 있습니다. 무척 흉해 보입니다.

꽃술을 깔끔하게 떨어뜨린 갈대랑 크게 대조가 됩니다. 그래서 이런 것들 보고 있노라면 이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무엇이든 오래 쥐고 있으면 보기 싫어 진다. 무엇이든 놓을 때가 되면 놓아야 된다.

저렇게 계속해서 잎이 바짝 말랐는데도 나뭇가지를 놓지 못하고 저렇게 계속해서 나무가 스스로 물기를 쫙 뺐는데도 잎을 보내지 못한다 해도 새해 새 봄이 오면 안에서 올라오는 새싹들에게 밀려나지 않을 수 없는 노릇입니다.

6.
이런 나무는 또 어떤가요? 제가 알기로는 은사시나무입니다. 무리지어 서 있습니다. 바람이 불면 잎이 세게 흔들리는 소리를 내는 나무인데요, 껍질이 흰색이라 '은(銀)'이 머리에 달렸다고 들었습니다.

왼쪽 아래 빛나는 은사시나무 벗은 몸매와 대조적으로 오른쪽 위 참나무는 매달린 잎 탓에 꽤 우중충합니다.


은사시나무들은 가을이 되면 대개 이렇게 잎을 깨끗하게 털어냅니다. 때가 되면 서로가 서로에게 아쉬움없이 헤어지는 것입니다. 붙잡지 않고 놓으며 머물지 않고 떠나는 것입니다.

여기서 "때가 되면"은, 바라보는 인간이 감정 이입한 그런 산물이 아닙니다. 객관 사실입니다. 겨울을 앞두고 잎이 지고 나무에서 물기가 빠지는 것이 그렇다는 말씀입니다.

잎이 지지 않으면 나무는 광합성을 계속 하게 됩니다. 광합성을 해서 영양분이 생기면 그에 걸맞은 물기가 필요합니다. 그런데 겨울이 되면 그 물기가 얼어터지기 십상입니다.
 
나무는 그런 얼어터짐을 당하지 않기 위해 잎을 떨어뜨리고 몸통에서 물기를 뺍니다. 사람더러 보기 좋으라고 또는 사람들 처량하게 느끼라고 나무가 그렇게 바뀌는 것이 아닌 줄로 저는 압니다.

7.
이렇게 해서 몸통만 남은 은사시나무를 봅니다. 빛이 납니다. 눈이 부실 정도입니다. 여기에 시들어 버렸거나 시들지 않았거나 잎이 매달려 있으면 이럴 수 없을 것입니다. 

언젠가는 떠나야 하며 언젠가는 놓아야 합니다. 떠나지 않는다 해도 영원히 머무를 수는 없습니다. 놓지 않는다 해도 영원히 붙잡고 있지는 못합니다. 그렇지 못하면 나무든 갈대든 사람이든 지저분한 존재가 되는 것 같습니다.

김훤주
버리고갈것만남아서참홀가분하다박경리유고시집
카테고리 시/에세이 > 장르시
지은이 박경리 (마로니에북스, 2008년)
상세보기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