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본 곳

가야 옛터 창녕에 있는 신돈의 옥천사터

김훤주 2011. 12. 27.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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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덧 연말입니다. 세상이 어수선한 탓인지 연말 기분이 제대로 나지도 않습니다만 세월은 그냥 그렇게 무심하게 흘러갑니다. 이렇듯 흘러가는 세월에 얹혀 함께 흘러가면서 갱상도 생태·역사 기행 마지막 발걸음을 12월 2일 창녕으로 떠났습니다.

아침 9시 30분 살짝 지나 일행 40명을 태운 버스가 경남도민일보 앞을 출발했습니다. 신라시대 처음 지어졌다는 옥천 관룡사와 용선대, 고려말 신돈의 자취가 어린 옥천사 터, 창녕 읍내 술정리 동삼층석탑과 하병수 가옥, 조선 말기 여러 양식의 혼합을 보여주는 성씨 옛집을 둘러보는 나들이랍니다.

10시 30분 조금 못 미쳐 옥천 골짜기 매표소를 지나 두 번째 주차장에 버스가 섰습니다. 여기 오솔길은 이제 골짜기 공사로 이쪽저쪽 흩어지고 깨어져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예스러운 정취가 그래도 느껴지는 오솔길입니다.

마지막 일정으로 석동 성씨 옛집을 찾아 뒤뜰 대숲을 거니는 일행들.


들머리에는 돌장승 부부가 나란히 서 있습니다. 왼쪽 키가 큰 장승은 영감이고 오른쪽 작은 이는 할멈이랍니다. 할멈은 쪽을 쪘고 영감은 상투를 틀었습니다. 영감은 입술 밖으로 나온 이가 아래로 향하고 할멈은 위로 솟아 있습니다. 웃는 듯도 화난 듯도 한 표정이 투박스럽습니다.


사람들은 오솔길을 오르면서 짧고 길게 탄성을 내뱉습니다. 관룡사 뒤편 오른쪽 병풍바위가 멋지기 때문이지요. 곧바로 나타나는 관룡사 돌계단과 돌문도 다른 데서 보기 어려운 물건이어서 연거푸 감탄입니다. 절간 마당은 그다지 너르지 않습니다. 대웅전과 원음각, 요사채와 약사전으로 둘러싸여 조그맣지만, 아늑한 맛은 있습니다.


사람들은 마당을 한 바퀴 두르고 전각을 기웃거린 다음 대웅전 왼편에 나 있는 자드락 산길로 접어듭니다. 500m 정도 10~30분 걸려 오르면 남쪽으로 삐죽 나온 용선대에서 석가여래좌불을 눈에 담을 수 있습니다.

용선대 석가여래좌불. /유은상 기자.


조금 둔중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우람하고 잘 생겼다는 평을 받는 통일신라 말기 작품이라 합니다. 부처 눈길은 동쪽 해 뜨는 쪽으로 뻗어 있습니다. 그 눈길 아래에는 관룡사가 자그마하게 놓여 있습니다.


여기 서면 사방으로 모두 눈맛이 좋습니다. 부처 눈길을 따라 앞산을 더듬다가 왼쪽으로 돌리면 병풍바위가 시원스레 들어옵니다. 그러다 고개를 왼쪽으로 한 번 더 꺾으면 뒤편에는 너른 들판을 품은 화왕산성이 나타납니다.


그러다가 눈길을 남으로 돌립니다. 산 아래 사람들 사는 마을과 논과 밭 들판과 옥천 저수지가 펼쳐져 있습니다. 가까이서 느끼면 악다구니 쓰는 소리도 나겠지요만, 이렇게 멀찍이 떨어져 바라보니 사람 사는 속세조차 고즈넉하게 다가올 따름입니다.

제가 왼쪽에서 석물 깨뜨려진 부분을 짚어보이고 있습니다. /유은상 기자.


내려와 옥천사터에 들어갑니다. 관룡사 오르는 길과 화왕산 오르는 길이 갈라지는 어름 왼쪽 수풀 속에 있습니다. 옥천사는 고려말 개혁 세상을 꿈꾸고 실행에 옮기려다 실패한 스님 신돈이 태어나 자란 곳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이는 공민왕의 신임을 등에 업고 전민변정도감(田民辨整都監)을 설치해 권문세족의 권한과 토지와 노비를 줄이려고 애썼습니다.


당시 귀족들은 양민의 논밭을 빼앗고도 모자라 양민 자체를 자기네 노비로 만들어 버리기까지 했다고 합니. 전(田)과 민(民)을 귀족들이 독차지한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세상이 흉흉해졌습니다. 나라 전체의 생산은 늘지 않았고 조정의 곳간은 조세를 걷지 못해 텅텅 비어갔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공민왕과 신돈은 배짱이 맞아 개혁을 추진했으나 권문세족의 저항은 아주 거세었다고 전합니다.


결국 신돈은 권력을 잃고 목숨까지 빼앗겼습니다. 신돈을 미워한 권문세족은 신돈의 근거지라 할 옥천사를 그대로 두지 않았습니다. 다른 폐사지와 달리 옥천사 터에는 사람들 악착같이 달라붙어 망가뜨린 자취가 뚜렷합니다.


석탑이든 석등이든 제 자리에 온전하게 있는 것이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깨뜨리기 위해서, 징으로 내리쳤거나 쐐기를 박았던 자취가 지금도 선명합니다. 산산조각난 옥천사터에 서면 당시 권문세족의 원한과 분노가 생생하게 느껴집니다. 이런 원한과 분노를 지금 이 세상 가진 이들도 갖고 있을까 두렵습니다.

정에 맞아 깨어진 것으로 보이는 석탑 몸돌.


그나저나, 나들이에서 빼놓을 수 없는 즐거움은 바로 먹을거리. '토속 고향 보리밥'(055-521-2516)에 들러 두부랑 보리밥이랑 푸짐한 반찬에 더해 동동주까지 한 잔 걸쳤답니다. 원래 책정된 예산보다 7만원가량 더 나왔는데 이는 나중에 십시일반으로 걷어 메웠습니다. 다음에 또 오겠노라면서 명함을 받아가는 사람도 적지 않았답니다.


점심을 먹은 일행은 버스를 타고 창녕읍내 술정리 동삼층석탑으로 향했습니다. 현장에서는 이날 가이드를 맡은 김량한 씨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김 씨는 동탑이 경주 불국사 석가탑에 못지 않으며 몸돌 갯수는 석가탑의 33개보다 오히려 적은 24개라 했습니다. 또 경남에서는 가장 큰 석탑이고 경남 석탑 가운데서는 유일한 국보라는 말도 덧붙였습니다.

국보 34호인 술정리동삼층석탑. /유은상 기자.


하병수씨 가옥은 동탑 바로 옆에 있었습니다. 억새로 지붕을 이은 이 초가는 원래 쇠못을 전혀 쓰지 않았고 지붕에 흙을 올리지(仰土) 않았으며 그리고 대패질도 하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지금은 쇠못도 썼고 대패질도 했답니다. 다만 앙토는 지금도 하지 않았습니다. 일행들은 이런 설명에도 귀를 기울였지만 다른 한편으로 뒤뜰과 꽃밭에도 눈길을 쏟았습니다. 안주인이 맨드라미 따위 갖은 화초를 잘 가꿔 놓은 가지런함이 좋았던 것이겠지요.

하병수씨 가옥. /유은상 기자.

부엌에서 불을 때고 나오는 하병수씨 가옥 종부를 카메라에 담고 있는 유은상 기자. 제가 찍었습니다.


마지막 일정은 대지면 석동 성씨 옛집. 3시 조금 넘어 닿은 성씨 옛집은 그야말로 저택이었습니다. 삼대가 한 울타리 안에 서로 영역을 나눠 살았다고 합니다. 또 일대 너른 평야를 소유했던 집안이다 보니 나름대로 갖춰놓고 사는 것이 많았습니다. 전통 양식과는 달리 화장실이 집안에 들어가 있는 점도 색달랐습니다.

석동 성씨 옛집. /유은상 기자.

연못을 뒤에 두고 사진을 찍고 있는 유은상 기자. 앵글은 아마 별당에 맞춰져 있을 것입니다.


이런저런 설명이 많았지만 사람들은 별당 앞 연못과 자연스레 펼쳐진 후원에 많이 끌렸답니다. 연못 둘레에서 사람들 노닥거렸을 풍경을 떠올렸고 참나무와 대나무가 그저 그렇게 자라나 있는 후원의 청신함이 좋았던 모양입니다. 곳곳에 놓여 있는 손씻기용 돌확에도 사람들 손길이 많이 머물렀습니다. 둥글거나 복숭아 모양이었는데 복숭아는 다산(多産)을 뜻한다고 했습니다.

돌확.


오후 4시 30분 살짝 넘은 시점에 돌아오는 버스를 탔습니다. 길이 막히지 않아 1시간도 안 걸려 경남도민일보 앞에 도달했습니다. 멋진 길을 걷고 맛난 음식을 먹고 보기 드문 문화재를 눈에 담은 2011년 마지막 나들이였답니다.


김훤주

신돈과그의시대
카테고리 역사/문화 > 한국사
지은이 김창현 (푸른역사, 200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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