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본 곳

바람과 바다가 몸을 섞는 그곳, 거제 홍포

김훤주 2011. 9. 14. 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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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빛이 바닷물과 만나면 출렁출렁 노랗게 황금빛을 띠는 줄로만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렇지만은 않은 줄 이제 다시 알았습니다. 가까운 바닷물은 그렇게 노랗게 빛나지만 멀리 물안개가 끼인 바다는 햇빛과 만나니 자줏빛을 내뿜었습니다. 가까운 바다 노란 빛깔과는 달리 그윽한 품이 한결 기품이 있었습니다.

하늘과 바다가 나뉘어 있지도 않았습니다. 하나로 뭉뚱그려져 있었습니다. 알맞추 끼인 안개 덕분이지 싶었습니다. 하늘과 바다가 만나는 데가 서로 엉기면서 아련해져 있습니다. 하늘이 안개를 거쳐 바다가 되고, 바다는 안개를 지나 하늘이 되는 그런 식이었습니다.

8월 31일 오전 7시 25분 거제 고현 시외버스터미널에서 53번 시내버스를 타고 1시간 40분 남짓 걸려 가 닿은 홍포 앞바다가 그랬습니다. 여기 홍포(虹浦)라는 이름에 들어가 있는 무지개(虹)가 바로 이런 모습을 뜻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바다에는 배가 떠 있고 하늘에는 비행기가 떠 있습니다. 하늘과 바다가 만나는 데가 붉으스럼합니다.


홍포에서 여차 사이 5㎞ 정도 되는 해안로는 그 아름다움이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대부분은 여기에 시내버스로 다니러 올 생각은 못하고 자가용 자동차로 와서 스윽 훑어보고 스쳐지나갑니다. 하지만 발바닥으로 누리면 맛이 달라집니다. 바닷가 쪽으로 길이 나 있으면 어디든지 내려가 볼 수 있습니다.


여기도 툭 트인 남해 여느 바닷가와 마찬가지여서, '망망대해에 점점이 떠 있는 섬들이 전부'일 뿐이지만, 그리고 가끔씩 물살을 가르며 오가는 고깃배가 전부이지만, 두 발로 걸어가면 이래저래 각도를 달리해 들여다보는 재미가 남다르게 마련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무더위가 한풀 꺾이기는 했어도 아직도 햇살은 따갑습니다. 하지만 여기 바닷가에 서면 그야말로 시원하게 불어오는 바람이 잠깐 동안도 끊어지지 않습니다. 나무그늘에라도 몸이 들어가는 양이면 팔뚝에 좁쌀 같은 소름이 돋기까지 할 정도입니다.

홍포를 떠나 여차에 이를 때까지 내내 그랬습니다. 그래서 어쩌면 한 해 네 철 가운데 지금이 여기 일대를 걷기가 적격이다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종점에서 내려 홍포 선착장에 내려가 봅니다. 뭔가 별스러운 풍경이 있을까 싶어서지요. 낚시하는 사람이 몇몇 흩어져 있고 행여나 기대했던 고깃배 부리는 장면 따위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바닷물에 손 한 번 담그고는 곧바로 올라올 수밖에 없었지요.


길은 아스팔트와 콘크리트와 흙이 번갈아 나타나면서 이어집니다. 흙길은 이번에 비가 자주 많이 내린 때문인지 굴곡지게 파인 데가 적지 않습니다. 자가용을 타고 왔다면 그 굴곡에 따라 몸이 많이 흔들렸겠지만 두 발로 걸으니 그런 일은 없었습니다.


나무그늘은 띄엄띄엄 또는 잇달아 나타나 시원함을 던져줍니다. 그런 시원함이 끝나고 나무와 그늘이 사라지면 섬들이 떠 있는 바다가 나타납니다. 길이 단조롭지 않은 것입니다.

전망대에서 사진 찍고 하는 일가족. 오른쪽 숲길로 가면 홍포가 나옵니다.


가운데 즈음에 전망대가 놓여 있습니다. 걷는 사람 처지에서 보자면 여기 즈음에 간이 화장실이라도 있으면 좋으련만 그런 따위는 마련돼 있지 않습니다. 여기 찾아오는 대부분이 자가용족임을 방증하는 대목입니다. 어쨌거나 여기도 풍경이 그럴 듯하답니다. 어디나 있기 마련인 섬들이라도 여기에서는 좀 더 멋있는 자세로 놓여 있습니다.

여차해수욕장.


한참 내려다보다가 왼쪽으로 조금 자리를 옮겼더니 여차해수욕장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학동해수욕장처럼 바닷가 몽돌로 이름난 곳입니다. 지금은 제철이 지났는지라 사람이 그다지 있지 않아 한적해 보였습니다.


고깃배가 물살을 가르고 있는 멀리 오른쪽 바닷가 절벽에서 왼쪽으로 눈길을 돌리면 새로 지은 민가들 아래로 몽돌 달그락거리는 바닷가가 길게 둘로 나뉜 채 누워 있습니다. 바닷가는 모래가 아니어서 희지 않고 옅은 갈색입니다.


여기 오면 마치 바람이 주인 같습니다. 끊임없이 불어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히려 출렁이는 바다와 그 위에 떠 있는 섬들은 손님 같다는 느낌이 듭니다.


쉬엄쉬엄 걷다 보니 어느 새 여차에 닿았습니다. 몽돌 구르는 바닷가로 잠시 거닐었습니다. 청년 서넛이 늦여름을 즐기고 있습니다. 수영복 차림으로 바다에 들어갈 기색은 아니고, 두런두런 얘기를 나누고 사진을 찍으며 해변을 거니는 중이랍니다.


시각을 확인하니 11시 30분을 넘어 있었습니다. 낚시꾼들을 상대하는 구멍가게에 들어가 라면을 좀 끓여달라고 주문했습니다. 길가에 놓인 나무 탁자에 앉아 라면 과자 김치와 더불어 맥주를 한 잔 들이켰습니다.


옆에서는 주인 할머니를 비롯해 세 어르신이 조개를 까고 있습니다. 지나가던 고급 자동차에서 여자가 내려 여기서 잡은 것이냐 물었습니다. 할머니들은 당연하다는 듯 쳐다보며 "그렇지요" 했습니다. 차에서 내린 이가 "파실 거예요?" 다시 물었는데, 대답이 단호했습니다. "아니요! 추석 차례에 쓸라고." 그러고 보니 그 때는 8월 한가위가 얼마 남지 않은 즈음이었습니다.


할머니들이 집에서 따온 복숭아를 몇 개 줬습니다. 반갑게 받았는데, 벌레가 많이 먹었지만 지나치게 달지 않고 담백했습니다. 어쩌면 복숭아가 아니라 이런 인심이 반가웠는지도 모르겠다 싶습니다.


12시 55분 고현 나가는 시내버스가 있었습니다. 시내버스가 이끄는 대로 거제 구석구석을 다니다 보면 거리에 심긴 꽃들이 예사롭지 않음을 눈치챌 수 있습니다. 다른 자치단체는 생명이 오래 가는 루드베키아 같은 외래종 꽃을 한 번 심어놓고는 그만이기 십상이지만 거제는 그렇지 않습니다.


어떤 대목에는 수선화가 피어 있기도 하고 어떤 데는 듣도보도 못한 새로운 꽃이 늘어서 있기도 했습니다. 이번에는 노란코스모스가 높이를 달리하면서 무리를 이뤄 길가에서 양쪽으로 출렁이고 있었습니다. 바로 이런 조그만 세심함이, 관광지 거제의 품격을 보이지 않게 높여주지 않겠습니까.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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