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에서 본 세상

낡은 것만 빌려주겠다는 선관위

김훤주 2008. 5. 31. 1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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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엔 무슨 농담인 줄 알았다

진짭니다. 저는 처음에는 농담하는 줄로만 알았습니다. 제가 “무거운 것 말고 가벼운 것으로 빌려주십시오.” 했더니 담당 직원이 “그렇게는 안 되는데요.” 그랬을 때 말입니다. 그래서 저는 무슨 말씀인지 잘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예?” 했습니다.

담당 직원은 “가벼운 새 기표대는 (우리가) 공직 선거에 써야 하니까 빌려드릴 수 없습니다.”라고, 정색을 하고 말했습니다. 그제야 저도 얼굴에서 웃음기를 걷어내고는, “빌려가도 곧바로 돌려드리니까 (공직 선거에) 충분히 쓸 수 있잖아요?” 물었습니다.

담당 직원은 말을 이었습니다. “(빌려갔다가) 갖고 올 때 보면 어디가 망가져 있거나 부품이 빠져 있는 때가 많아서요.” 저는 이해가 잘 되지 않았습니다. 그야 받을 때 제대로 챙김으로써 풀어야 하는 일이다 여겼던 것이지요. 계속되는 대화입니다.

가볍고 편리한 기표대는 공직 선거만 쓴다?

“저번에도 가벼운 것 빌려 갔었는데요.” “언제요?” “글쎄, 언제 총회를 했는지 짚어 봐야 하니까 지금은 모르겠어요. 그렇지만 빌려간 적이 있어요.” “…….” “무거운 것 빌려갔다가 너무 무겁고 거추장스러워서 아주 고생한 적도 있어요.” “…….” “정말 안 됩니까?” “예.”

5월 26일 월요일, 우리 전국언론노동조합 경남도민일보지부는 2008년 정기 총회를 했습니다. 임금인상 요구안이랑 단체협약 갱신 요구안도 결정해야 하고 편집제작위원도 선출해야 해서, 아침 9시 즈음에 공문을 들고 마산선거관리위원회로 기표대를 빌리러 갔습니다.

한 번 써 보신 이는 아시겠지만, 알루미늄으로 새로 만든 가벼운 기표대는 손으로 들고 다니기도 아주 좋고 조립도 아주 간단합니다. 우리도 재작년인가에 한 번 빌려 써 보고 나서 여러 모로 편하고 보기에도 좋기에 앞으로도 빌려써야지 그러고 있었습니다.

무거운 기표대 때문에 허리를 다칠 뻔했던 경험

그러다가 지난해 말에 무슨 일이 있어서 또 빌렸는데, 선관위 공익근무요원이 창고에서 꺼내주는 그 물건을 들다가 저는 허리를 삐끗 다칠 뻔했습니다. 옛날 한 번 들어 본 적이 있는 가벼운 기표대인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고 무쇠로 만든 무거운 놈이었기 때문입니다.

갖고 와서 조립은 더욱 어려웠습니다. 가벼운 알루미늄 기표대는 쉽게 이어졌으나 이 놈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버릴 때가 다 된 물건인지 부품조차 제대로 있지 않아서, 나중에는 테이프로 덕지덕지 발라서 30분 남짓만에 겨우겨우 만들어 세웠습니다.

저는 이번에도 저번처럼 무거운 놈을 내주면 고생이다 싶어 먼저 가벼운 알루미늄 기표대로 달라고 부탁을 했던 것입니다. 그랬다가 천만 뜻밖에 담당 직원한테서 이런 대답을 듣고는, 제가 사정하는 말은 잘 못하는 편이라 그냥 “알았습니다!” 하고는 발길을 돌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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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한테 찢긴 기표대 대여 요청 공문

사무실 문을 열고 나오다가 다시 발길을 돌려, 기표대 대여 요청 공문을 도로 받아들고서는, 이제는 쓸모가 없어진지라 두 손으로 잡고 찢었습니다. 아마 제 얼굴이 그다지 밝지는 않았던 모양인지, 기표대 가지러 창고로 가던 공익이 무슨 일인가 싶어 돌아보더군요.

자동차를 몰고 돌아오면서 가만 생각해 봤습니다. “공직 선거에 써야 하기 때문에 빌려 줄 수 없다?” “아니, 민간에 빌려주면 공직 선거에 쓰지 못한다는 법칙이라도 있나?” “그게 아니라 쓰고 가져올 때 부품을 빠뜨리거나 하니까 그렇다고?” “그렇다면 돌려받을 때 검수를 똑바로 잘 해야 하지 않나?”

선관위가 말하는 민주주의는 그러면 무엇일까?

다른 쪽으로 생각을 돌려봤습니다. 우리 지부에 있는, 이를테면 침낭이나 음식 그릇 따위를 조합원이 빌려달라 했을 때, 지부장인 제가 새로 장만한 편한 것은 공식 행사에 써야 하니까 안 되고 낡고 불편한 물건은 빌려줄 수 있다 하면 집행부가 살아남을 수 있을까?

어림도 없는 얘기입니다. 사람은 결핍이 아니라 차별을 참기 어려워한다고 합니다. 다 같이 굶을 때는 괜찮지만, 이를테면 이명박이나 이건희는 산삼 뿌리 씹고, 자기 따위는 무 뿌리도 제대로 씹지 못할 때를 사람들은 견디지 못합니다. 그래서 노조에서는 지부장은 새것 쓰고 평조합원은 낡은 물건 써야 한다 말한다면 바로 탄핵감입니다.

게다가 공식 행사만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비공식 행사도 중요합니다. 이런 사실을 사실 그대로 인정해야 합니다. 그리고 공식 행사라고 다 중요한 것도 사실은 아닙니다. 아무 알맹이 없는 공식 행사도 있고, 보석보다 빛나는 비공식 행사도 있습니다.

나아가 관점을 다양하게 가져가 보면 더욱 분명해지는 것이 있습니다. 선관위가 볼 때는 지부 총회가 비공식이지만, 지부로서는 이보다 더 중요한 공식 행사는 없습니다. 또 우리 지부 집행부가 볼 때는 조합원들  소모임이나 부서 단위 행사가 비공식이지만, 그 소모임이나 부서로서는 아주 소중한 무엇인 것입니다.

그러니, 제가 생각할 때는, 아예 빌려주지 않는다면 모르되, 빌려준다면 차별이 있어서는 안 될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선관위에서 주관하는 공직 선거 들은 제대로 대접받고, 민에서 하는 이런저런 행사는 쓰레기 비슷한 취급을 받는 차별을 벗어나기 어렵습니다.

더욱이, 선관위가 힘주어 말하는 가치인 민주주의의 실체와 정신이 무엇인지 돌아보면 더욱 그렇습니다. 민이 주인인 주의가 바로 민주주의입니다. 선관위가 민간에 기표대를 빌려준다면서 ‘주인’으로 우대하기는커녕 ‘이등 인간’으로밖에 대우하지 않는 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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낡고 무거워야 빌려준다는 규정이 있는지 묻는 공문

오랜만에, 까칠하게 굴어보기로 했다

저는 이런 일의 뿌리가 이기주의라고 생각합니다. 다른 무엇이 어떻게 되든 상관할 바 아니고, 자기가 좀 편하게 일하고 싶다는 생각, 자기에게 조금이나마 이롭게 하자는 생각이 이렇게 만들었다고 봅니다. 그러니까 제가 생각하기에는, 이럴 때에는 행정편의주의라는 말보다는 ‘공직 담당자의 이기주의’라는 표현이 더 알맞습니다.

이 같은 공직 담당자의 이기주의에 작으나마 쐐기를 하나 박기 위해, 그다지 중요한 사안은 아니지만, 요즘 말로 ‘까칠하게’, 오랜만에 한 번 굴어보기로 작정했습니다. 민에게 기표대를 빌려줄 때 어느 정도 낡고 무겁고 망가져야 하는지 가늠하는 기준이 있는지, 있다면 과연 근거가 합당한지를 따져보자는 것입니다.

도구로는 공무원들이 그리도 좋아하는, ‘정식’ 공문을 쓰려고 합니다. 공문은 이미 5월 29일자로 작성해 놓았습니다. 조합원 총회 뒤치다꺼리도 하고 광우병 (위험이 있는) 쇠고기 수입 반대 걸개 나누기도 하느라 이렇게 미뤄졌는데, 늦어도 6월 2일 월요일에는 등기우편으로 발송할 생각입니다.

이처럼 생각하고 그날 아침에 전화로 좀 화를 내면서 공문으로 처리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얼마 안 있어서, “새로 만든 가벼운 기표대를 빌려줄 테니 가져가겠느냐?”는 전화가 선관위에서 왔습니다. 그래 저는, “막 총회 시작하는데 부질없는 일이다.” 하는 수밖에 다른 수가 없었습니다.

김훤주(전국언론노조 경남도민일보지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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