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저런 생각-김훤주

살아남는다는 것의 서글픔

김훤주 2011. 8. 9.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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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집이나 술집에 가면 흔하게 볼 수 있는 풍경들이 있습니다. 이른바 '민속'을 앞에 달고 있는 음식점들에 가면 더욱 그렇습니다. 옛날에 쓰이던 민속품이 여기저기 나앉아 있는 것입니다.

어떤 데는 물건을 넣어두던 반다지나 내리다지도 나와 있고요, 호롱불 등잔이나 숯을 넣어 쓰던 다리미, 촛대, 됫박이나 말통이 나와 있을 때도 있습니다. 

또 물지게가 끌려나온 데도 있었습니다. 옛날에 솜을 잣던 물레, 심지어는 1970년대 시골 마을에서 아낙네들이 많이 했던 홀치기 기구도 있었습니다.

물론 그런 존재들에 오랫동안 눈길을 던져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이리저리 생각할 수 있을 만큼 여유롭게 지내는 형편은 못 되지만, 어쩌다 한 번씩 이런 것들 때문에 쓸쓸한 느낌이 드는 때도 없지는 않습니다.

여기 이런 것들은 한 때 자기가 왕성하게 쓰였으나 세월이 흐름에 따라 지금은 그런 쓰임을 받지 못하고 그냥 다른 사람들 눈요기나 하라고 불려 나와 있는 것이겠지요.

밀양 표충사 들머리 어느 민속식당 앞에 있는 새끼 꼬는 기계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음식점이 '민속'이나 '토속'과 관련돼 있음을 일러주는 노릇을 할 뿐 원래 자기 구실은 이미 잃어버린 녀석입니다.

또 이 놋요강은 창원시 진해구 소사동 김달진문학관 옆에 있는 김씨 박물관 한 쪽 구석에 있는 녀석인데요, 빨래를 빳빳하게 만들던 다듬이 방망이를 품으로 안고 있습니다.

원래는 안방이나 사랑방 구석에 놓여서 한밤중 같은 때 주인들이 거기다 대고 오줌을 누거나 했을 텐데, 지금은 그런 용도는 통째로 잃어버린 모양입니다.

저기 저 존재들은 형상으로 보면 여전히 쓸만한 것들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원래 자기가 했던 기능이 쓸모가 없어졌습니다. 사람을 비롯한 생명체에 빗대어 말하자면, 자연적인 목숨은 남아 있으나 사회적으로는 수명을 다한 셈이라 하면 맞겠지요.

저는 제가 저기 있는 놋요강이나 새끼 꼬는 기계라면 저렇게는 살아남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듭니다. 놋요강이라면 차라리 녹여져 다른 존재로 탈바꿈하거나, 가마니 짜는 기계라면 쇠붙이는 녹여지고 나무판자는 그냥 땔감으로 쓰이고 말았으면 차라리 좋지 않을까 이런 생각이지요.

그러니까 저기 놓인 저런 것들이, 저로 하여금 과연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살아남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한 번은 생각해 보게 만듭니다. 나름대로 쓰임이나 할 바를 다한 다음에는 어떻게 남으면 좋겠는지 가늠해 보는 것입니다.

이쯤 되면 저는 제게 남아 있는, 살아갈 나날이 떠오릅니다. 목숨이 끊어지는 날까지 세상으로부터 쓰임과 부림을 받을 수 있으면 가장 좋을 것입니다. 용도가 폐기됐는데도 목숨이 질기게 남아 저기 저 존재들처럼 원래 쓰임과는 무관하게 있고 싶지는 않은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 일이 어디 제 뜻대로만 되겠습니까? 세상으로부터 쓰임이나 부림을 받지 못하는 처지인데도 목숨이 붙어 있을 개연성이 더 크겠지요. 그럴 경우 저는 차라리 그냥 버림받고 싶습니다. 아무도 보지 않는 구석에 처박힌 채로 녹이 슬거나 바스라지거나 하면 오히려 좋겠습니다.

누군가에게서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사람이 이룬 문화 가운데 흙이 가장 좋고 목조가 그 다음이며 석조(石造)가 가장 좋지 않다는 것입니다.  흙집은 사람이 떠나면 바로 허물어집니다. 나무집은 사람이 떠나도 흙집보다 오래 가고 돌집은 그 나무집보다 오래 갑니다.  

사람이든 물건이든 사회적 수명이 다한 다음에도 자연적 수명이 끊어지기 전에는 아무 쓸모 없어도 살아남을 수밖에 없습니다. 저는 그런 살아남음이 싫습니다. 그 추레함과 서글픔이 싫습니다. 물론 싫다 해도 어쩌면 그것은 제 선택권밖에 있겠지만 말입니다.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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