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본 곳

함양 여름 명물은 산도 계곡도 아니더라

김훤주 2011. 7. 30. 0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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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의 함양군내버스터미널에서 종점인 칠선계곡 한가운데 있는 추성마을까지는 27km 정도밖에 되지 않는답니다. 자가용 자동차로 '휘리릭' 가면 천천히 달려도 30분이면 충분한 거리라니다. 그런데 군내버스를 탔더니 1시간이 넘게 걸렸습니다.

추성마을까지 3900원을 받는 이 군내버스가 가는 길에 함양군 곳곳을 들르기 때문이랍니다. 이를테면 먼저 추성마을과 방향이 완전 반대편인 유림면 화촌리까지 갔다가 나온답니다. 게다가 추성마을 쪽으로 가다가도 왼쪽으로 의탄교를 건너 바로 가지 않고 곧장 앞으로 나아가 마천에 들어갔다가 돌아나오지요.

아울러 사람이 내릴 때 버스가 멈춰섰다가 다시 달리는 뜸도 상당하답니다. 주로 타고 다니는 이들이 동네 어르신들이기 때문입니다. 완전히 멈춰선 다음 어르신들이 자리에서 일어나고, 완전히 내린 다음에야 버스가 다시 출발하는 것이랍니다.

이쯤 되면 군소리를 낼 법도 하지만, 버스에 탄 사람 누구도 아무 소리를 하지 않았습니다. 이 버스의 느릿느릿과 구석구석과 쉬엄쉬엄 덕분에 누리는 보람이나 즐거움이 아주 큰 것입니다.

한 마디로 하자면, 함양의 아름다운 산천경개(山川景槪)를 원판 그대로 안겨주는 눈맛이 여기에 있습니다.

멀리 산에서는 나무들이 바람을 타고 가지를 흔들고 이파리를 나부댑니다. 이에 더해 절벽이나 너덜겅도 이따금 등장해 다양함을 더해주지요.

힘차게 부는 바람에 나무들이 이파리를 뒤집어 허연 속살을 보여줍니다.


논밭은 어떤가요. 뿌리를 잘 내린 벼들이 바람결에 흔들립니다. 보라색으로 흰색으로 꽃을 밀어올린 도라지들도 듬뿍 만나고, 고슬고슬 가루 날리는 꽃이 매달린 옥수수들도 수북수북 나타납니다. 나중에 겨울에 뿌리를 캐려고 심어놓았지 싶은 연들도 도로 이쪽저쪽 무논에 들어앉아 때때로 하얀꽃을 피웠습니다.

눈길을 아래로 보내면, 바로 옆 과수밭에서 갓 딴 복숭아를 파는 가게들이 즐비합니다. 나무에는 녀석들이 붉은색으로 매달렸습니다. 또 이런저런 펜션이랑 밥집들이 띄엄띄엄 박혀 있고 밑으로 골짜기 바위를 따라 물이 흘러내리는 강줄기가 지천입니다.

강물은 바닥이 죄 비칠 정도로 맑은데, 장마가 가신 바로 뒤끝인 덕분도 있지만 평소에도 충분히 이렇겠다 싶습니다. 가뭇없이 오랜 세월 흘러내린 물줄기가 절차탁마해 놓은 바위랑 돌들의 표정도 이모저모로 여러 가지였습니다.

더 없이 멋지다고 이름난 용유담을 맞닥뜨렸을 때 표지판이 없더라도 충분히 거기가 거기인 줄 알아차렸지만요, 그런 데가 아니라도 물놀이 하기에 적격이다 싶은 데는 곳곳에 있었습니다.

군내버스 지나치는 굽이굽이 모랭이마다 불쑥 내려 들어가고 싶은 여울이 너무 많았던 것입니다. 나무 그늘이 있으면 더 그럴 듯하겠지만 없다 해도 파라솔 하나면 그만이니까요.

달리는 군내버스에는 산천경개를 이토록 단번에 누리게 해주는 눈맛만 있지는 않았습니다. 활짝 열린 유리창으로 들어와 온몸으로 휘감기는 시원한 바람맛까지 뿌려주는 것이었습니다.

자가용 자동차를 타면 어지간하면 그냥 에어컨 바람에 몸을 맡기고, 기껏 창문을 열어도 위통만 바람이 간질일 뿐이지요. 그나마 그런 바람은 제대로 시원하지도 않습니다.

잠깐 버스가 멈추면 좀 더운 듯도 하지만, 이는 달릴 때의 시원함을 갑절로 만들어 주는 순간 작동 장치일 따름이겠지요.
버스 기사와 마을 어르신들 사이의 은근한 인정을 물끄러미 지켜보는 보람은 덤이랍니다.

금방 올라탄 한 할머니가 주섬주섬 주머니를 뒤지더니 지폐와 동전으로 버스요금을 냈습니다. 버스 기사는 돈통을 이리저리 훑더니 받았던 동전을 도로 내밀었습니다.

할머니는 끝전을 맞춰 내려 했는데 그리 안 된 모양이고요, 기사는 거슬러 줄 잔돈이 마땅찮았던 모양입니다. 할머니는 손사래를 쳤습니다. "그기 머라고, 다음에……" 이런 정도 얘기가 오갔겠지요. 아는 안면이 아니면 나타나기 어려운 장면이 아니었을까 싶었어요.

이렇게 19일 아침 10시에 탄 군내버스가 종점 추성마을에 멈췄을 때는 11시가 넘어 있었습니다. 아래위로 이리저리 둘러보면서 사진을 찍다가 추성교를 조금 지난 지점에서 그럴 듯한 나무그늘이 내려와 있는 물가 바위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과연 칠선계곡이었습니다. 푸르고 거침없고 웅장하고 또 깨끗했습니다.

칠선계곡. 멀리 보이는 산은 지리산이겠지요.

제가 탁족을 했던 자리. 자리 위에 쥘부채가 놓여 있지만 전혀 필요가 없었습니다.


신발과 양말을 벗고 '탁족(濯足)'을 했는데요 온 몸이 시원해지고 땀이 식는 바람에 갖고 간 쥘부채는 전혀 필요가 없었답니다.

바위에 등을 기대고 하늘을 우러렀습니다. 햇살은 나무 이파리 사이로 조금씩 갈라져 스며들고 있었으며 멀리 구름은 이따금씩 산허리에 그늘을 지어주고 있었습니다.

잘 익은 자두 여섯 알과 마른 오징어 한 마리와 삶은 달걀 두 개와 구운 떡가래 다섯 점, 그리고 소주 한 병과 맥주 한 병을 깔끔하게 해치웠습니다. 그러면서 발을 물 속에 담근 채 멍하니 30분 넘게 콸콸콸 흐르는 물소리에 몸과 마음을 담갔다가 일어섰습니다.

내려오면서 마주친 돌벤치. 반달곰이라고 앉혀 놓은 듯한데, 펜더를 닮고 말았습니다.


칠선교와 의탄교를 지나 추성마을로부터 2.5km 아래에 있는 금계 마을 버스 정류장에서 2시 55분 버스(3200원)를 탔습니다.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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