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에서 본 세상

진보정당이여, '자발적 왕따'가 되라

기록하는 사람 2008. 5. 28. 1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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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공무원보다 못한 진보정당 윤리규정

지난 99년 <경남도민일보>가 막 창간했을 때의 이야기다.

우리가 '언론개혁'을 기치로 내걸고 촌지와 향응·선물을 거부한다고 공개적으로 떠들었더니, 기존의 신문·방송사 기자들이 적잖이 불편했던 모양이다. 당시 햇병아리였던 <경남도민일보> 공채 1·2기 기자들은 곳곳에서 노골적인 '왕따'를 당했다.

그 중에서도 당시 창원지방법원 기자실은 문서로 '결의문'까지 만들어 우리 기자를 공식적으로 왕따시켰다. 이를테면 '도민일보 기자는 기자실 차원의 회식이나 오찬간담회에도 끼워주지 않겠다'는 따위의 유치한 내용이었다. 당시 법원 출입기자들이 친필로 연대서명까지 한 그 문서를 나는 아직도 '증거물'로 보관하고 있다.

다른 기자실에서도 여러가지 방식으로 왕따를 당했다. 일부 시·군 중에는 도민일보 기자의 출입자체를 못하게 한 곳도 있었다.

우리가 겪은 '왕따'의 추억

우리는 '왕따'를 흔쾌히 받아들였다. 그 기간도 그리 길지 않았다. 기자실에서 공공연히 오가던 촌지가 서서히 사라지기 시작했고, 점심 때부터 거나하게 벌어지던 공무원과의 술자리도 줄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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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에는 관·언유착의 고리로 지목돼왔던 계도지 예산이 도민일보 주도로 경남에서 완전히 사라졌고, 이듬해에는 아예 경남도내 행정기관의 기자실이 개방형 브리핑룸으로 바뀌었다. 노무현 정권 시절 많은 논란을 일으켰던 정부 주도의 기자실 개혁이 경남에서는 그보다 훨씬 이전에 시민과 언론내부의 자발적인 힘으로 마무리됐던 것이다. 이런 결과로 경남의 언론환경은 전국의 그 어느곳보다 맑아졌다고 자부한다.

'자발적 왕따가 세상을 바꾼다.' '왕따는 짧고, 그 열매는 길다.'

이것이 창간 10년째에 접어드는 <경남도민일보>가 깨달은 왕따의 경험이다.

6월 4일 재보궐선거에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에서도 모두 13명의 후보가 나왔다고 한다. 민주노동당은 이미 적지 않은 국회의원과 지방의원이 있지만, 진보신당은 이번에 한 명이라도 당선될 경우 첫 공직 진출이 된다. 그래서 하는 말이다.

그들에게 왕따가 되기를 자처하라고 당부하고 싶다. 솔직히 나는 2002년 지방선거에서 민주노동당이 지방의회에 진출했을 때부터 진보정당의 지방의원들이라면 모두 자발적 왕따가 될 것으로 기대했었다. 요즘의 강기갑 의원처럼 헌신적인 의정활동이나 차별화된 정책도 중요하지만, 그런 왕따가 지방의회 자체를 개혁시킬 것으로 봤기 때문이다. 그 때 그런 기대를 담아 쓴소리도 했었다.

"지방의원들의 윤리 문제가 시끄러울 때도 마찬가지로 아무런 입장을 밝히지 않았고, 당 차원의 대책도 내놓지 않았다. 3대 지방의회가 출범하면서 도·시·군의원들의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평통) 가입문제가 현안으로 떠올랐지만, 역시 민주노동당은 침묵했다. 이 때문에 민주노동당 소속 의원들 가운데서도 가입을 하는 의원과 거부하는 의원이 서로 갈라졌다.
이 때문에 진보정당이 처음으로 지방의회에 교두보를 확보해놓고도, 정작 소속 의원들의 의정활동에는 관심이 없는 것 아니냐는 의구심도 나오고 있다. 그렇지 않고서야 당장 불거져 나오고 있는 현안들을 이토록 방임하고 있겠는가."
(2002년 10월 11일자 칼럼 '민주노동당에 드리는 쓴소리')

그러면서 이런 제안도 했었다.

"당장 '민주노동당 지방의원 윤리강령'을 만들어 소속의원들에게 각종 선물공세나 로비에 대응하는 기준을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 말 많고 탈 많은 해외여행에 대해서도 원칙과 기준을 마련해 발표할 수 있다. 평통 가입문제도 마찬가지다. 가입해서 개혁에 앞장서든지, 아예 거부하고 해체를 주장하든지 내부토론을 통해 '당론'을 정할 순 없을까."

당시 민노당 당원이라는 분들로부터 '고맙다'는 메일을 많이 받았다. 하지만 중앙당은 묵묵부답이었다. 민주노동당의 '선출직 공직자 윤리에 관한 규정'이 제정된 것은 그로부터 2년 뒤인 2004년 5월이었다. 17대 총선에서 국회의원이 배출되자 비로소 제정했던 것이다. 그마저 조항들을 유심히 보면 졸속으로 만든 흔적이 역력하다.

5만 원 선물은 받아도 된다니

내용도 왕따를 각오하는 것과는 전혀 거리가 멀었다. 1회 5만 원, 동일인으로부터 연간 20만 원을 초과하지만 않는다면 직무와 관련있는 자로부터 선물을 받을 수 있도록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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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노동당 선출직 공직자 윤리에 관한 규정 캡처.


황당하다. 경남도민일보 기자들은 1만 원 이상을 금지하고 있고, 심지어 공무원과 교사들도 3만 원으로 제한하고 있는데, 진보정당은 5만 원짜리 선물은 받아도 된다고? 아무리 액수가 작아도 직무 관련자로부터 받는 것은 뇌물이라는 게 상식이다. 진보정당의 윤리지수가 신문사 기자나 공무원보다 못하다니!

민주노동당은 이번 선거가 끝나면 당장 윤리규정부터 고쳐 아예 모든 선물을 못받도록 하든지 최소한 1만 원으로 바꿔야 한다. 진보신당도 당장 규정을 제정해야 한다.

그리고 중앙당과 각 도당에서 받아선 안될 돈이나 선물을 돌려주는 일을 대행해주고, 그 결과를 일정 기간마다 인터넷에 공개해야 한다.(이게 중요하다. 공개해야 왕따가 될 수 있다.)

어려운 일도 아니다. 경남도민일보 기자회는 오래 전부터 그 일을 하고 있다. 노하우가 궁금하면 얼마든지 도와드리겠다. 명색이 진보정당인데, 일개 신문사보다 못해서야 하겠는가.

/김주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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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완 지음 | 커뮤니케이션북스 펴냄
지역신문 기자의 고민과 삶을 담은 책. 20여 년간 지역신문기자로 살아온 저자가 지역신문에 대한 뜨거운 애정과 자부심을 갖고 기자생활을 하면서 겪은 일들을 풀어낸다. 이를 통해 서로 비슷한 고민을 가진 지역신문끼리 정보를 공유하는 장을 마련하고자 했다. 아직도 사라지지 않은 촌지, 살롱이 되어버린 기자실, 왜곡보도, 선거보도 등 대한민국 언론의 잘못된 취재관행을 비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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