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에서 본 세상

참 한심한 학자들

기록하는 사람 2011. 6. 29. 14: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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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정 직업을 가진 사람들에겐 다소 껄끄러울 수 있지만, 한 번은 짚고 넘어가야 겠다.

얼마 전 한 단체가 마련한 '지역언론 발전 방안'이라는 주제의 연수에 참가했다. 수강생은 나를 포함해 각 지역신문사 사장과 편집국장, 경영국장, 기획실장, 기자 등이었다. 다들 이번 연수에서 위기에 처해 있는 신문을 구해낼 획기적 아이디어를 찾기 위해 눈을 번득였다.

각 3~4시간씩 모두 10개의 강의로 짜여진 커리큘럼도 좋았다. 문제는 이들 강의에 강사로 나온 학자와 교수들이었다.


먼저 영국의 한 대학에서 언론학을 공부하고 왔다는 박사님의 강의. 원래 커리큘럼에 적혀 있는 강의 제목은 '디지털 미디어 시대, 영국 저널리즘의 변화와 개혁' '영국 언론의 뉴미디어 활용'이었다.

그런데 막상 그 박사님이 들고 온 강의 제목은 '영국과 영국언론-방송 저널리즘과 디지털 영국을 중심으로'였다. '신문'은 아예 없었다. '줄창' BBC와 유료방송 이야기뿐이었다. '디지털 영국' 부분에서도 세계에서 가장 모범적인 뉴미디어 실험을 보여주고 있는 영국 신문 '가디언'에 대해선 일언반구도 없이 방송 이야기만 늘어놨다.

강의를 듣고 있는 내 뒤통수.


물론 신문기자라고 해서 방송에 대해 알아선 안 된다는 법은 없다. 그래도 신문과의 관계 속에서 방송을 이해하는 게 맞다. 그러나 끝내 신문 이야기는 없었다.

두 번째는 역시 영국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왔다는 학자의 '영국 미디어 시장과 경쟁구도', '영국 신문시장의 현황과 쟁점'이었다. '지역미디어 발전의 새로운 대안'이라는 부제도 있었다. 그러나 이 분 역시 방송과 전국지 이야기뿐이었다. 수강생의 100%가 지역신문 종사자들이었지만, 지역신문 이야기는 한 마디도 없었다.

참다 못한 내가 물었다. "저희들은 모두 지역신문에서 일하는 사람이거든요. 영국 방송 이야기는 앞의 강의에서도 충분히 들었고, 타임스나 가디언, 인디펜던트, 썬, 데일리 미러 같은 영국의 대표적인 신문에 대해서도 기본적인 내용은 다 알고 있습니다. 저희가 궁금한 건 영국의 지역신문인데요. 영국에는 어떤 지역신문이 있나요?"

"아, 그건 제가 미처 준비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면, 영국에는 지역신문이 모두 몇 개나 있고, 행정단위별로 어떻게 지역신문이 발행되는지도 알 수 없나요?"


"그것도 조사를 해보지 않아서…."


"아니, 예를 들어 우리나라는 광역 시·도 단위에 지역일간지가 발행되고, 시·군 단위에는 지역주간지들이 나오는데, 영국은 지역신문 시장이 어떻게 돼 있는지 기본현황만이라도 알 수 없냐는 거죠."


"…."


황당했다. 내가 검색해본 사전지식만으로도 영국에는 모두 1200개가 넘는 지역신문이 있다. 그런데 영국에서 언론학을 공부해 박사학위까지 받았다는 사람이 그런 사실도 모른단다.


다음 강사는 언론광고학을 전공한 교수였다. 커리큘럼에 적혀 있는 강의주제는 '지역언론과 신문광고 동향'.

그런데, 그 교수님 역시 일방적으로 다른 제목의 강의안을 갖고 왔다. '광고에서 배우는 창조적 & 설득적 리더쉽'. '이게 뭥미?'라는 말이 절로 튀어나왔다. 우리가 광고회사 카피라이터도 아니고….

아니나 다를까. 그는 베네통 광고의 도발성, 하이트맥주의 이름이 하이트로 정해진 과정, 코카콜라와 펩시콜라의 광고전쟁 이야기만 줄기차게 이어갔다.


이번엔 참다 못한 후배 기자가 나섰다. "교수님 강의 재미는 있는데요. 우리가 듣고 싶은 건 '지역언론과 신문광고 동향'이거든요. 그런 이야기 해주실 순 없나요?"


"아, 그건 준비를 안 해왔는데…."


참 답답하면서도 화가 났다. 그 분들도 자기 강의를 들을 대상이 100% 지역신문 기자라는 사실은 알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평소 지역신문에 관심이 없었다 하더라도, 적어도 강의 전에 영국 지역신문의 현황 정도는 찾아보고 오는 성의만이라도 기대하는 건 무리한 걸까?

강의 중인 강유원 박사.


얼마 전 우리 회사에 인문학 강의를 하러 왔던 강유원 철학박사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교수는 이미 교수라는 에셋(자산)이 있기 때문에 굳이 강의를 잘할 필요가 없다. 그래도 잘릴 염려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같은 떠돌이 강사는 수강생에게 만족을 주지 못하면 바로 잘린다."

강유원 박사는 같은 주제의 강의를 청탁해도, 그 수강 대상이 주부라면 주부의 관심사에 맞추고, 학생이라면 학생의 관심사, 신문기자라면 신문기자의 관심사에 맞춰 강의하는 걸로 유명한 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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