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에서 본 세상

깨달음과 즐거움, 어느 쪽이 한 수 위일까

김훤주 2011. 6. 14.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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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희식의 글은 전희식이 놓여 있는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여줍니다. 그래서 재미있기도 하고 진지하기도 합니다. 전희식이 그려보이는 세상에는 전희식의 세상을 보는 관점·태도가 함께 들어 있습니다.

전희식이 책을 통해 보여주는 세상은 어머니와 꾸려가는 하나, 마을 사람들과 꾸려나가는 하나, 기르는 짐승이나 채소 따위와 더불어 꾸려나가는 하나가 있습니다. 이 셋이 한꺼번에 등장할 때도 있습니다.

그려지는 모습은 제각각 다릅니다. 색깔도 다릅니다. 하지만 거기에 담기는 생각이나 관점은 대체로 한결같습니다. 2011년 1월 펴낸 <땅살림 시골살이>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다만 전에 치매 어머니와 함께 사는 얘기를 다룬 <엄마 하고 나 하고>는 깨달음과 결연함이 많았다면, 이번 책은 즐거움이 많았습니다. 깨달음 위에 즐거움이 있을 테고, 그래서 결연함이 많이 가신 것 같아 저는 좋았습니다.

1. 뒤집기 한 판,  '택씨!'의 완승

이렇습니다. 여기서 맛보는 즐거움은 웃음까지 동반합니다. 지금 여기 농업 현실을 고스란히 담고 있습니다. 시골 지역 사회의 실상도 담겨 있습니다. 아울러 판을 뒤집어 버림으로써 통쾌함까지 안겨주고 있습니다.

다음 날, 동네 차라는 차는 다 불러 모았다. 보리 180가마를 다섯 대에 싣고 ○○군 창고로 향했다. 팔레트를 깔아놓고는 그 친구를 중심으로 삐루를 들이켜고 있는데, 얼굴 희끔한 사람들 몇몇이 와서는 둘레둘레한다. 검사원들이다. 그렁저렁 친구 차례가 되었다. 그런데 '어떤 미친놈이 이리 보리를 많이 가져왔나' 하는 눈치다.
"보리는 좋은데 잡티가 많네요."
검사원들은 지네들끼리 발로 툭툭 보리 가마니를 차기도 하더니 친구에게 다가와 건들건들하며 말했다.
"제초제를 안 쳤으니 잡티가 있고, 농약을 안 치니 깜부기가 인능거 아잉교."

"2등입니다."

"쓰발, 꼴리는 대로 하시소."

"공정한 깁니다. 2등이머."

"공정한 거 좋아하시네. 와? 2등은 뭔 놈의 2등이고? 등외라 카지!"

"기분 나쁘십니꺼?"

"아입니더. 농사 못 진 넘이 무신 할 말이 있겠능교."

돈 가뭄에 시달리던 친구는 욕을 해대면서도 돈을 받아 챙겼다. 돈을 세고 있는 친구에게 우리 동네 조합장이 다가왔다. 힐끔 넘겨다보던 조합장이 히죽히죽 웃으며 말했다.

"박 사장님 돈 많이 타네. 점심 한 그릇 사소."

"그랍시다. 연하식당으로 갑시다."

그런데 조합장이 따라오자 그 뒤로 군서기 두 놈에다 농협 직원 셋까지, 꼭 열 사람이 줄레줄레 따라왔다. 검사원도 따라나섰다. 그냥 얻어먹는 게 괜히 눈치 보이는지 안 해도 그만인 말을 조합장이 건넸다.

"농약 한 개도 안 친기지요?"

"보리에 약 치는 봤소. 있으면 나와보라카소."

"끝에 건조제를 쳐야 등수가 잘 나오제."

"내년에는 듬뿍 칠게요."

조합장의 능글능글한 말에 친구도 능글능글 받아넘겼다.

"약 안 친 거 좀 남았소?"

"야……."

"아, 그라모. 나 좀 주소."

조합장이 염치도 없이 부탁하자 검사원도 거들었다.

"나도 좀 주소."

"나도 한 두어 가마니만 주소."

기다렸다는 듯 군서기도 뒤따른다.

"저도 좀 주시소, 예."

농협 직원이 뒤를 잇는다.

그때였다. 친구가 갑자기 반주로 마시던 소주잔을 든 채 벌떡 일어서더니 소리를 꽥 지르는 것이었는데, 그 고함 소리가 가관이었다.

"태애액 씨이이."

갑작스런 행동에 다들 놀라기도 하고 무슨 말인지 몰라 눈이 휘둥그레졌다. 친구는 능청스럽게 둘러댔다.

"지도 모립니다, 뭔 말인지는. 높은 자리에 있는 끗발 있는 사람들이랑 술 풀 때 봉께 뭄싸롱 아가씨가 자기들끼리 택씨, 택씨 하데요. 우하하하."

식당에서 나오자마자 내가 물었다.

"야이, 자슥아. 박 묵다 말고 무신 택시고?"

"니 그것도 모리나? 니 대갈빡 좋다카디 다 헛말이구만."

"룸싸롬 아가씨들이 와 택씨라 안카노? 자꾸 달라캉게 안카나."

옛 친구라 특별히 알려준다면서 친구는 그 뜻풀이를 해주었다. 그 말뜻은 이랬다.

"택도 없다. 이 씨발놈들아."(158~161쪽)

2. 죽자 하니 청춘, 살자 하니 고생

이런 데서는 우리 시골의 현실과 과거 모습이 한꺼번에 등장합니다. 농촌에 젊은이가 없는 현실, 건강이 좋지 않은 노인들이 소외되는 현실, 부역으로 뜯기고 세금으로 뜯기고 강제 수용으로 뜯기고 했던 과거가 나란히 나타납니다. 그런데, 듣자하니 어머니의 "죽자 하니 청춘이요, 살자 하니 고생일세"라는 노랫말은 이제도 그때도 진리입니다.

아들 전희식과 어머니 김정임.


군에서 하는 경로잔치에는 500여 명의 노인이 참석했다. 허리가 꼬부라지시긴 했지만 혼자서 걷고, 말하고, 똥오줌 누시는 분들이었다. 시골에서 농사일하면서 사시니까 다들 이렇게 건강하실 게다. 건강이 좋지 않은 노인들은 이 시간에 구들장 짊어지고 방 안에 갇혀 징역살이 하고 있을 것이다. 나처럼 몸을 쓰지 못하는 노인네를 휠체어에 모시고 나온 젊은이는 단 한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경로잔치 도우미 역할은 군청과 면사무소에 근무하는 공무원들과 적십자사 회원들이 맡았다. 동네 어르신들을 받들어 모시는 잔치라면 의당 동네 젊은이들이 일을 꾸미고 진행을 맡아야 하겠지만 시공에는 지자체 공무원 아니면 그런 일을 할 인력 자체가 없다.
이곳에서도 배불리 잡수시고 먹을거리 선물을 한 봉지 얻어 쥔 어머니는 호숫가를 산책하면서 흥얼흥얼 노래를 부르셨다. 어머니가 노래하는 모습을 난생처음 보았다.

"하늘은 높고 물은 깊구나. 죽자 하니 청춘이요, 살자 하니 고생일세."

"치마끈 잘라가며 논과 밭 샀건마는 신작로 난다 하니 우리 모두 굶어죽었구나."

"논과 밭 뺏긴 것도 억울한데 부역 나와라, ○○세금 내라, 억울해서 어지 살꼬"

어머니의 노랫말도 나의 온 신경을 끌어 모으는 진기한 것이었지만 치매를 앓는 노인이라 할지라도 신이 나면 옛 기억들이 복구되고 부를 줄 모르는 노래도 절로 하게 되는구나 싶어 놀라울 따름이었다.(122쪽)


3. 개신교는 옛날에도 이중적이었다?

전희식이 치매 앓는 어머니의 다리를 씻기면서 주고받은 이와 같은 대화에도 우리가 한 때 겪었던 사회 현실이 담겨 있습니다. 이를 두고 양두구육(洋頭拘肉)이라 한다지요. 양 머리 걸어놓고 개 고기 판다는……. 지금 개신교는 더한다나 어쩐다나 하는 것은 모르겠습니다만.

"어무이, 지금도 다리 아파요? 여기요, 여기 다리 아파요?"
"아푸기는. 지대 양반 그놈 뒈질 때 아풍게 '용서, 용서' 그람서 안 죽었나."
"왜요?"

"교회 댕김스로 못된 짓은 혼자 다 함스로 뒈질 때는 '용서, 용서' 그 찌랄함스로 안 죽었나."

"와요?"

"넘 마늘밭에 마늘 노로 가믄 뒷구석에 마늘쪼가리 숨키 놨다가 밤에 가서 담아 오고 안 그랬나."

"아이가. 도둑놈이네."

"그랑게 뒈질 때 '용서, 용서' 안 그랬나. 숭악한 놈."(135쪽)


4. 미친 년 널 뛰기는 누가 하나

콩이 싹트는 데는 비가 와야 좋고 호박이 열매 맺히는 데는 비가 오지 않아야 좋답니다. 그런데 이 두 가지가 한 두어 달 간격을 두고 있으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은 모양입니다.

내리는 비는 한 줄기뿐이지만 이를 두고 갈라지는 농사 짓는 사람 마음은 서너 줄기로도 모자랍니다. 사실은 사람도 날씨도 탓하지 못하겠습니다.

"햇볕이 나야 호박꽃이 수정을 할 틴데 만날 찔끔대서 열리는 족족 다 곪아 떨어지니 호박 농사도 못해 먹겠네, 못해 먹겠어."
김씨 할아버지가 호박에 트럭을 실으면서 하소연한다.
"아니, 할아버지. 언제는 비가 와서 비둘기가 내 먹을 틈도 없이 콩이 조옥 잘 났다고 하시더니 금세 비 푸념이세요?

"어? 그래? 그땐 그렇고 오늘은 또 오늘이고, 허허."

콩밭에 서면 비가 반갑고 호박밭에 가면 비가 원망스런 할아버지에게 '여름비는 소 등을 가른다'고 했으니 콩밭과 호박밭을 가려서 비가 내리면 좋을까?

비는 계속 오는데 햇볕이 났다. 할아버지 트럭에 호박을 실어드리며 물어봤다.

"내일은 비 오는 게 좋아요? 안 오는 게 좋아요?"

"그만 와야지. 오이밭에 뜨물 생기고 고추에 역병 들잖어. 아니, 아니, 쬐끔은 와야지. 장마철에 비가 와 놔야 팔월 무더위 때 뭐든지 쑥쑥 크지 않겄어?"

마을회관에 있는 할머니 몇 분이 밖으로 나오는 게 보였다. 각자 자기 밭으로 향하면서 작별 인사 한 마디씩 던졌다.

"날씨가 왜 이리 변덕이여? 이랬다저랬다 미친년 널뛰듯 하기는."

"여름 날씨가 이렇지, 머 어때. 사람 맴이 변덕이지."(148~149쪽)


5. 아들보다 닭이 더 좋은 어머니

전희식은 거추장스러운 일감 하나 줄이려고 닭을 제대로 거두지 않는 태업을 벌였습니다. 그렇게 해서 닭을 처분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어머니가 닭을 싸고 도는 통에 대책없이 항복하고 말았습니다.

전희식은 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랑하면 지는 거다" 하는 말이 있습니다. 전희식은 어머니를 사랑하기 때문에 어머니한테 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전희식은 생명을 사랑하기 때문에 생명 가운데 하나인 닭에게도 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전희식은 이렇게 지면서도 자기를 이긴 존재들에게 고마워합니다.

똥 냄새와 파리 떼의 극성을 견디다 못한 나는 어머니와 닭들을 이간질하는 공작을 벌였다. 하지만 아무 성과도 없이 양쪽에서 나만 비난을 뒤집어썼다. 때마침 아랫동네 사는 후배가 닭 댓 마리를 키우는데 수탉이 너무 극성이라 암탉들이 곤욕을 치른다면서 암탉 두 마리가 더 있으면 좋겠다고 하기에 가져가라고 했다. 그리고 나는 다시 이간질을 시작했다.
어머니가 안 볼 때 달걀을 다 꺼내와서는 '달걀도 안 놓는 닭이 모이만 많이 먹는다'고 어머니 앞에서 닭을 비난했다. '파리 떼는 다 저 닭장에서 날아온다'고 강조도 했다. 그러나 어쩌랴. 어머니는 이미 아들보다 닭을 더 신뢰하고 있었다.
파리채는 숨겨놓은 채 닭장 청소도 게을리 하는 나 때문에 파리가 많아진 것이지 어찌 닭 때문이냐고 닭을 노골적으로 편들었다. 어느 닭이나 한여름에는 알을 낳지 않고 쉬는 법이라고 닭의 입장을 옹호했다. 이런 모자간의 갈등을 알지는 못했을 텐데 바로 온다던 아랫마을 후배도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나는 특단의 대책을 세웠다. 닭들에게 항복하는 것이었다. 닭장의 동들이 파리 떼 서식처가 되지 못하도록 비를 완전히 가리면서도 볕이 잘 드는 선라이트 지붕을 만들어주고 바닥에 왕겨를 듬뿍 깔아 똥을 누는 즉시 파묻히게 했다. 닭은 두 발로 헤집는 속성이 있어 바닥에 왕겨를 깔면 자기가 눈 똥을 바로 덮어버린다.
……불경에 보면 살생을 하지 말라고 할 뿐 아니라 살생의 역할을 남에게 넘겨서도 안 되며 다른 사람이 하는 살생을 묵인하거나 방조해서도 안 된다고 했다.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진꼬와 성꼬는 처음 데려올 때의 내 다짐을 되살려주었다. 자연사할 때까지 같은 식구로 살면서 우리나라 최고령 닭으로 키워보겠다는 다짐이었다. 나를 살생의 유혹에서 여러 분 구해준 음덕을 생각해서라도 이 약속만큼은 꼭 지켜야 하리라.(176~179쪽)


6. 결혼 이주 여성도 저마다 다르다는

똑같이 중국에서 우리나라 남자와 결혼해 왔다 해도 사정은 저마다 달랐습니다. 어떤 중국 여자는 정신병 있는 남자를 만나 얻어 맞고 갇혀 살았습니다. 겨우 탈출해 나온 이 여자는 몸과 마음에 남은 상처를 다스리기 위해 농사 체험을 나왔습니다.

어떤 여자는 우리나라 농촌 중늙은이 남자를 골라 시집을 와서는 곧바로 달아나 버렸습니다. 이 남자는 달아난 아내를 위해 자가용으로 장만해 들인 오토바이를 팔러 나와서는 눈물을 흘리고 말았습니다. 세상은 한결같지 않아서 세상인 모양입니다.

그런데 다시 급한 소식이 들어왔습니다. 겨우 탈출해 나온 여자와 비슷한 처지에 있는 듯한 어떤 여자가 옥상에서 자살을 하려 했다는 것입니다. 세상에는 다른 듯하면서도 같거나 비슷한, 아울러 같은 듯하면서도 다른 일들이 되풀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전희식은 그런 일들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아마 전희식이 한 깨달음을 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 일들이 일어나지 않으면 그것은 인생이 아니고 세상도 아닌 것입니다. 다만 전희식은 그이들이 굳세기를 바랄 따름입니다.

목발을 짚고 오신 분은 중국에서 직업이 내과 의사였다. 한국 남편이 약간의 정신병이 있는 걸 모르고 결혼을 했는데 잦은 폭력에 시달리다 급기야는 2층집에 감금되어 살게 되었다고 한다. 견디다 못해 창틀을 뜯고 뛰어내려 자살을 시도했다가 허리와 다리가 부러져 치료 중이라고 했다.
우리는 다시 부슬비를 맞으며 옥수수도 심고 호박도 심었다. 다들 일하는 것도 이야기하는 것도 열심이었다. 하루 나들이를 나온 분들치고 매사에 열성이 있어 보였다.
일이 일찍 끝났다. 이분들 중 한 분이 우리 집에 밀가루가 있느냐고 물었다. 우리밀 통밀가루가 넉넉하게 있다고 했더니 정국 전통 만두를 만들어봐도 되겠냐고 해서 좋다고 했다. 그날 저녁은 중국에서 온 세 사람을 포함해서 모두 아홉 사람이 저녁을 통만두과 함께 먹게 되었다. 오랜만에 대식구가 된 것이다.
밀가루 반죽을 이상하게 했다. 직경이 한 자는 될 듯싶은 큰 도넛처럼 둥그렇게 하는 것이었다. 이것을 빙글빙글 돌리면서 반죽을 했다. 손도 빠르고 음식 솜씨도 훌륭했다. 나는 인터넷으로 중국의 최신 유행가요를 틀어줬다. 어머니는 방과 마루에 몸을 반씩 걸치고 앉아서 이들의 만두 빚는 솜씨를 구경했다.
꼭 여기까지였다. 센터에서 급한 전화가 왔기 때문이다. 한 여성이 옥상에서 자살을 시도하는 것을 겨우 저지했다는 소식이었다. 모두들 사색이 되어 먹던 만두도 남기고 부랴부랴 떠나갔다. 인사도 제대로 나누지 못했다. 한국으로 시집와서 그녀들이 겪는 고통과 외로움에 주제 넘지만 한국 남자를 대신해서 내가 사과하고 싶었다.
나는 다음 날 읍내에 자전거를 고치러 나갔다가 같은 수리점으로 오토바이를 가지고 온 술 취한 중늙은이 농부를 만났다. 고장 난 자전거 냅두고 자기 오토바이를 사라고 했다. 꼭 한 달 전에 산 신품이라면서 싸게 주겠다고 했다. 중국에서 데려온 마누라 자가용으로 사 준 건데 도망갔다면서 훌쩍훌쩍 울었다. 내 자전거를 손보던 주인이 그랬다. 계획적이라고. 도시로 도망갈 계획을 갖고 시집온 여자라고.
자전거를 끌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밭에 들렀다. 잎사귀를 쫙 펼치고 있는 새파란 고구마 순이 나를 반겼다. 어디든 땅에 닿기만 하면 마디마다 뿌리를 내리고 거름을 주지 않아도 잘 자라는 질긴 생명력의 고구마. 약을 치지 않아도 병이 없는 고구마. 뿌리와 줄기와 잎까지 다 먹는 고구마.
내가 만난 사람들이 모두 이 고구마같이 굳세기를 빌었다.(209~210쪽)

저도 이제부터는 나쁜 일 힘든 일 괴로운 일 슬픈 일 어려운 일 고달픈 일 이런 따위가 제게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지 않겠습니다. 다른 사람들 겪는 정도보다 지나치게 많으면 제가 버티기 힘들겠습니다만, 그래도 저는 제가 그것들을 씩씩하고 굳세게 겪어낼 수 있기를 바라겠습니다.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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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테고리 기술/공학 > 건축/인테리어 > 주택/전원주택
지은이 전희식 (들녘, 201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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