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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미영 이야기(7)조순자 선생이 기억하는 미영

기록하는 사람 2011. 7. 1. 08: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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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쯤에서 미영 씨를 수양딸로 삼으려고까지 했던 조순자 관장이 어떤 인물인지 기록해둘 필요가 있겠다. 국내, 아니 세계에서 유일한 가곡전수관 입구에 적혀 있는 조 관장의 이력이다.

"중요무형문화재 제30호 가곡전수관장 조순자(曺淳子), 호 : 영송당(永松堂), 생년월일 : 1944년 8월 26일, 서울에서 태어나 1959년 중앙방송국(현 KBS) 국악연구생 2기생으로 선발되어 국악계에 첫 발을 내디뎠다. 이주환, 김천홍 등에게 가무악의 실기와 이론을 수학한 후 1962년부터 국립국악원 연주원으로 활동하였다.

국립국악원 첫 해외연주인 1964년 도일 공연에서 연주하는 등 활약하다가 1968년 인화여고 국악반을 지도하기 위해 교사로 전직한 후 1970년 결혼과 더불어 마산으로 귀향하였다. (…중략…) 1973년 경남대를 시작으로 마산교대, 창원대, 부산교대, 경북대, 부산대, 전남대, 한국교원대 등에서 국악실기와 이론을 강의하는 한편 (…중략…) 2001년에는 국가 중요무형문화재 제30호 가곡예능보유자로 지정, 2006년 9월에는 창원시 마산회원구에 '중요무형문화재 제30호 가곡전수관'을 설립하기에 이른다.

이밖에도 1969년 개국한 마산MBC(현 창원MBC)의 초창기 시절부터 초대손님으로 출연하다가 1983년 MBC FM 개국 후 'FM음악회', '우리가락 한마당', '국악으로 여는 아침', '우리가락 시나브로' 등의 고정출연자 및 진행자로 40년 세월을 함께 하는 등 지역방송인으로도 활약 중이다. (…이하 수상경력, 음반, 저서 및 대표논문 등 생략…)"


이렇듯 조순자 관장은 명실공히 우리나라 국악계의 대표적인 인물이다. 게다가 그가 보유하고 있는 가곡(歌曲)은 지난해 11월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재산으로 등재됐다. 역사에 가정은 없다지만, 만일 미영 씨가 조순자 선생의 후계자가 되었다면 세계적인 예능보유자가 된다는 이야기다.


그렇다면 미영 씨를 자신의 후계자로 삼으려 했던 스승 조순자 관장은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까? 먼저 그것부터 물어봤다. 어떻게 처음 뜯어보는 가야금의 첫 소리만 듣고도 미영 씨의 재능을 알아봤을까?

"예능을 하는 선생님들은 딱 한 번만 봐도 알지요. 단순히 소리만 듣는 게 아니라, 아이의 표정과 악기를 만지는 태도를 함께 보는 거죠. 아이가 정말 그걸 좋아하는지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어요. 안 배운 노래도 시켜봤는데 재능이 느껴졌어요."

3개월만에 초등학생들을 가르치게 했다는 건 무슨 말일까?

"지금도 (문하생들에게) 가르치면서 배우도록 하고 있어요. 가르치는 능력도 중요하거든요. 모든 사람에게 똑 같은 교습법이 다 통하는 게 아닌데, 그건 타고나는 것이예요. 좋은 연주자는 많지만, 좋은 교육자를 겸비하기는 정말 어려워요. 걔는 그것도 자질이 있었어요."


게다가 미영 씨는 머리도 아주 똑똑했다고 한다.


"알고 보니 고등학교를 중간에 그만 뒀더라고요. 그래서 검정고시를 보게 하려고 공부를 시켜봤어요. 그런데, 아휴~. 공부도 잘해! 수학문제도 그렇고 영어도 그렇고 막히는 게 없어요."

연주와 교육, 거기에다 공부까지 잘하는 미영이를 수양딸로 들여 키워보고 싶은 마음을 가질만도 했다.

"머리 없이 국악 배워서 대학 가려고 하는 아이들도 있잖아요. 그런데 얘는 머리도 있고…. 정말 좋은 예술가로, 학자로 키워보려 했어요. 게다가 내가 딸이 없으니까 딸로 삼으려고 했죠. 그래서 어렵게 물어 물어 집에 찾아갔는데…."

마산 두척동 미영의 집을 찾아간 조순자 관장은 거기서 "아! 얘는 도저히 내가 데려올 수 없는 아이구나"하고 깨달았다고 한다.

"미영이가 그 집 딸이 아니라 강제로 끌려와 있는 아이였거나, 설사 딸이었다 하더라도 그 집을 싫어하기라도 했다면 어떤 수를 써서라도 데리고 왔을 거예요. 그런데 아이가 거기 있는 사람들을 너무 사랑하더라고요. 장애인들이 방마다 가득한데, 얘가 물을 덥혀서 목욕을 다 시키는거야. 밥도 다 지가 해먹이고…. 어머니는 피를 걸러내야 하는 병인가를 앓고 있었고, 아버지는 장애인들을 봉고차 같은데 태우고 나가고…. 그런데 그 엄마 아버지를 세상에 없이 사랑하더라고. 엄마 아버지뿐 아니라 피도 살도 섞이지 않은 장애인들에게도 그러는 걸 보니 '아! 못데려오겠구나. 내가 억지로 데려다놔도 저 사람들이 있는 한 다른 삶을 살도록 하진 못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후 조 관장은 미영을 만날 수 없었다. 다만 당시 함께 있었던 문하생 중 누군가로부터 '선교사가 되어 중국으로 갔다'는 소문을 한참 뒤에 들었다.

"그래서 2007년인가요? 우리나라의 한 교회에서 아프간에 무리하게 선교활동하러 갔다가 탈레반에 납치됐던 사건이 있었잖아요. 미영이가 워낙 고지식해서 혹시 저런 데 간 것 아닌가 걱정이 되어 납치된 사람들 이름을 하나하나 확인하기도 했어요."

미영 씨가 한 때 선교사를 꿈꾼 적이 있었던 건 사실이다. 그러나 미영 씨의 현실에선 선교사의 꿈조차 사치였다. 비록 선교사는 되지 못했지만, 그 누구 못지않게 나눔을 실천하며 살고 있으니 그리 아쉬워할 일은 아닌 것 같다. 바로 그게 미영 씨가 돈을 많이 벌어야 할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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