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에서 본 세상

배달래 바디 페인팅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김훤주 2011. 5. 10. 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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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다른 예술 장르도 마찬가지지만 바디 페인팅도 제대로 알지 못합니다. 그냥 행위 예술이라는 정도, 전통 장르가 아니라는 정도만 알지 어떤 식으로 구성되고 거기에서 무엇을 주로 봐야 좋은지는 깜깜하게 모릅니다.

이런 제가 배달래 작가의 작품을 보게 됐습니다.
창원시 마산합포구 창동 가배소극장에서 오늘 5월 5일 오후 3시부터 4시까지 한 시간가량 지켜봤습니다.

앞에 한 30분은 배달래 작가의 앞선 작품들을 보여주는 동영상 상영이었고요, 나머지 30분정도가 배달래와 다른 남자 한 명이 나와 보여준 바디 페인팅이었습니다. 이어 배달래와 관중의 얘기 주고받기가 있었는데 저는 일에 쫓겨 먼저 나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경남블로그공동체와 100인닷컴, 창동통합상인회가 함께 마련했는데요, 바닥과 벽면에 하얀 천이 있었고 여기서 배달래와 다른 남자 한 명이 바디 페인팅을 했습니다. 처음에는 배달래가 하얀 천에다 붓으로 그려댔고, 좀 있다가 남자가 등장하니까 그 몸에다 색칠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날 가배소극장에는 사람들이 참 많이 모였습니다. 창동통합상인회 김경년 간사가 인사를 하고 있습니다.


처음 저는 여기에 무슨 뜻이 담겨 있을까, 이를 통해 배달래가 무엇을 나타내려 하는 것일까에 신경을 쓰면서 봤습니다. 음악은 잔잔하거나 평면적이지 않고 역동적이고 입체적이었으며 이를 배경으로 깔고 진행되는 행위들 또한 매끄럽기는 했지만 힘이 있어 보였습니다.

어쨌거나 저는 아무리 봐도 뜻이나 의도 같은 것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배달래의 몸짓 배달래의 붓질, 그리고 등장한 남자의 몸짓과 표정은 제가 어떻게 해석할 수 있는 경지 안에 있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거기에는 아무 뜻이 없는데도, 거기서 나름대로 뜻을 찾고 의미를 읽으려고 하는 헛된 짓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짧은 순간, '예술'이 무엇인가 생각을 했습니다. 그랬더니 아름다움과 즐거움이라는 답이 나왔습니다. 아름다움과 즐거움이라 해도 그게 단선적이지는 않으니 쉽게 잘라 말할 수는 없겠으나 생각이나 의도나 뜻에 갇히면 제대로 알아챌 수 없겠다는 생각은 할 수 있었습니다.

뜻과 의미에 매여 있을 때는 배달래의 몸짓이나 붓질, 그리고 다른 남자의 몸짓이나 표정이 전부 그런 뜻이나 의미를 나타내는 것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물론 그래도 그 뜻이나 의미를 제대로 알아채지는 못했습니다만. 하하.


그런데, 그런 뜻이나 의미를 벗어나 보니까 그 몸짓이나 붓질이나 표정이 나름대로 보였습니다. 웃기도 하고 괴로워하기도 하고 힘차기도 하고 힘이 없기도 하고 쭉 뻗기도 하고 머뭇거리기도 했습니다. 아까 뜻이나 의미로 볼 때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었습니다.

행위가 어떤 뜻이나 의도를 전달하는 매개체로 읽히지 않고 대신 그 자체로 보이기 시작했다는 말씀을 드리는 셈입니다. 배달래는 그림을 그렸고(다르게 말하자면 어쩌면 그냥 자기도 모르는 색칠을 그냥 해댔다고 볼 수도 있겠다 싶습니다만) 남자는 그냥 자기 뜻대로 또는 미리 얘기된 대로 움직였을 따름이라는 것입니다.

그러고 있는데, 거기에 일상이 보였습니다. 짧은 순간이었고 또 제가 일하러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에 매달려 있었기에 더 자세히 보지 못한 측면도 있을 것입니다. 배달래의 그리기는 그이의 일상에서 크게 벗어나 있지 않았습니다. 물론 제 생각입니다만.


배달래가 남자의 몸에다 푸른 페인트를 뿌리는 장면이었습니다. 물론 앞에서도 배달래는 페인트를 뿌렸습니다. 그런데 앞에서는 살살 뿌렸는데  이번에는 아주 힘차게 뿌렸습니다. 페인트 방울들이 하얀 천을 벗어나 소극장 시커면 벽면에까지 묻을 정도였습니다. 

앞에서는 그토록 힘차게 뿌리지 않았는데, 여기서는 그렇게 한 까닭이 나름대로 짐작이 됐습니다. 그 때는 그렇게 힘차게 뿌리면 그 앞에 있는 관중들에게까지 그 페인트가 뿌려지게 돼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관중을 생각해서(다시 말하자면 관중들 때문에 힘차게 뿌리고 싶은 마음을 참았던 것인데요) 살살 뿌렸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뿌려지는 거기에 뿌려지기를 기다리는 남자만 있었고, 거기서 벗어난다 해도 구경하는 사람들에게는 뿌려지지 않고 벽에만 페인트가 묻기 때문에 배달래의 몸짓과 붓질이 그렇게 활달할 수 있었던 것입지요. 그 때 튀어나가 벽면에 묻은 페인트 방울들조차 제가 느끼기에는 그렇게 활달할 수 없었습니다.

이것은 자유 또는 억압의 문제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배달래 작가가 평소 일상에서 느끼고 있던, 의식이든 무의식이든 행하거나 행해지고 있던 그런 행위들이 그대로 드러난 것이라고 여겨졌습니다.

배달래의 바디 페인팅은 그런 일상을 또는 그런 일상에서 겪었던 의식-의식에 담겨 있는 억압과 자유를 풀어내는 한 방식이라고 생각하게 됐습니다.

마음이 편해졌습니다. 거기에 어떤 주제-뜻이나 의도-가 먼저 있었던 것이 아니고 그런 뜻이나 의도를 벗어나는 순간 배달래가 나타내려고 한 것이 보였습니다. 물론 이것은 배달래의 의도하고는 전혀 상관없는, 저 혼자만의 느낌이기는 합니다.

배달래는 어쨌든 자기 몸짓과 붓질을 통해 무엇인가를 보여줬고 저 또한 배달래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그냥 그이 행위에서 나름 느꼈을 따름입니다. 이
것이 제가 보기에는 배달래 바디 페인팅의 모든 것이었습니다.

그이의 행위 그 자체를 벗어난 어떤 뜻이나 의도는 거기에 없었다, 그 자체를 한다는 데에 그런 뜻이나 의미가 있을 뿐이다, 그조차 사람들이 느끼거나 느끼지 않거나 하면 그만일 따름이다, 하는 것이지요. 

물론 저를 비롯해 거기 모인 사람들 대부분은 바디 페인팅을 처음 본 이들이고 그래서 본다는 자체만으로도 신선한 경험이고 짜릿한 감동이기는 했을 것이라는 점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부풀려 보일 수도 있었을 테지요만. 

배달래와 남자가 인사를 하고 떠난 뒤에 남은 무대.


어쨌거나 그 날 저는 배달래의 힘없어 보이는 멈칫거림과 힘차게 뻗어나가는 활달함이 모두 좋았습니다.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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