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에서 본 세상

그래도 장지연은 '일선 융화 빛난다'고 했다

김훤주 2011. 4. 22. 20:00
반응형
2010년 12월 제가 블로그에 '서훈 취소된 장지연, 그는 죄가 없다'(http://2kim.idomin.com/1776)는 글을 하나 썼습니다. 그 글에 올해 4월 18일 밤 '숭양산인'이라는 분이 댓글을 달았습니다. 

그대로 읽으면 앞뒤 문맥이 조금 맞지 않아 이해하기 쉽지는 않지만, 간단히 뭉뚱그리면 "장지연이 1917년 6월 8일치 조선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에서 '일선 융화의 서광이 빛나리라'고 했다"는 대목이 틀렸다는 것입니다.

게다가 따옴표까지 제대로 돼 있지 않아 좀 어지럽기는 하지만 '숭양산인'이라는 분이 쓰신 그대로 옮겨보겠습니다.
 

1917년 6월 8일치 '봉송이왕전하동상(奉送李王殿下東上)'에서 "내선 인민이 친목으로 사귀어 장애를 풀어 없애고 일체 간격이 없으니" "일선(日鮮) 융화의 서광이 빛나리라"고 한 대목이 있습니다.
'내선'은 '내지(內地=일본)'와 '조선'을 뜻하고 '일선(日鮮)' 또한 마찬가지니 친일임이 분명하겠지요. 라는 내용은 1917년 6월7일자 매일신보 '봉송이왕전하동상(奉送李王殿下東上)' 한시는 다음날. 6월 8일자 매일신보에 장지연이 쓴 한시가 아니라고 정정보도 되었다.

이 글이 장지연의 친일의 대표적인 글로 계속적으로 호도하는 저의는 무었인가? 장지연을 친일로 보는 몇 가지 내용들도 사실이 아니라는 입증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장지연을 친일인사로 주장하는 파렴치하고 몰지각 행위는 즉각 중지되어야 한다. 좌파들이 장지연을 친일로 매도하는 전말이 이번 월간조선 5월호에 자세히 보도되었다. 글을 올리는 사람은 최소한 관련내용을 살펴보고 사실에 입각한 책임 있는 행동을 하기 바란다.

이에 대해 사실 확인을 했더니 이랬습니다. <매일신문> 1917년 6월 8일치 1면에 숭양산인(嵩陽山人=장지연의 호)이 '봉송이왕전하동상(奉送李王殿下東上)'이라는 기사를 쓴 것이 있습니다. 18일 블로그 댓글에서 숭양산인이라는 분은 이를 '한시'라고 했으나 그렇지는 않았고 기사였습니다.

이 기사에는 "일선융화의 서광이 빛나리라"고 한 대목뿐만 아니라 "대정 원년(1910) 병합 이래로 일선 관계가 더 한층 친밀해져(自大正元年 倂合以來로 日鮮關係 尤一層至密일새)"라든지 "(순종이)  이 달 8일로 날을 잡아 동쪽으로 올라가시매 폐하(일본 천황) 이를 들으시고 특별히 커다란 배를 보내어 보호하시고 맞이하시니(以本月八日로 定期東上하시매, 階下 聞之하시고 特派肥前大艦하사 保□祇迎하시니)"라는 표현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튿날인 6월 9일 자 1면에 "昨報 一面 奉送李王殿下東上 題下 嵩陽山人 四字는 不知中 混入誤植되얏기 削除"라는 표현이 있었습니다. 하루 전 <매일신보> 1면의 '봉송이왕전하동상'이라는 제목 아래 적힌 숭양산인 넉 자는 알지 못하는 사이 섞여 들어가 잘못 심어졌기에 삭제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앞엣글은 장지연이 쓰지 않은 것이 됩니다.

그러면 장지연이 과연 "일선 융화의 서광이 빛나리라"고 감격해 찬양하는 글을 쓰지 않았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이는 널리 알려져 있는 사실입니다. 장지연은 <매일신보> 1918년 1월 1일치 2면 '대정6년시사(大正六年詩史)'에서 한 해 전 6월 있었던 순종의 일본 방문을 두고 같은 표현을 썼습니다.

이렇습니다. "이왕 전하 동해를 건너시니/ 관민이 길을 쓸고 전송했네./ 오늘 같은 성대한 일은 예전에 드물던 바/ 일선융화의 서광이 빛나리라.(李王殿下渡東溟, 淸路官民陪餞□. 盛事如今曾罕有, 日鮮融化曙光熒."('李王東上', 六月)

이를 두고 장지연의 친일 기사를 처음으로 찾아내어 1987년 1월 발행된 <한국 한문학 연구> 9권에서 논문 '장지연 시세계의 변모와 사상'으로 학계에 보고한 강명관 부산대학교 한문학과 교수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순종이 1917년 6월 일본의 대정천황(大正天皇)을 만나러 간 사실을 제재로 한 것인데, 그 표면상 목적은 영친왕의 일본 육사 졸업, 일본 황실과의 결혼 내정에 감사의 뜻을 표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 이면에 이왕가의 권위를 낮추어 식민통치의 효과를 배가시키려는 일본 제국주의의 의도가 스며있음은 두말한 나위가 없다.

그런데 장지연은 이 사건을 두고 시의 말미에서 "일선융화의 서광이 빛난다."고 말하고 있다. 그는 조선의 일본화,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지 통치를 거부할 수 없는 기정사실로 받아들이고 있었던 것이다."(논문 '주체 없는 근대, 장지연론' 6쪽)

이 논문은 2010년 10월 16일 대구한의대학교에서 '국권 상실과 한문학의 대응'이라는 주제로 열린 대동한문학회 학술대회에서 발표됐습니다.

강명관 교수는 이와 함께 1987년 발표된 자기 논문 '장지연 시세계의 변모와 사상'에서 여기서 문제가 되고 있는 1917년 6월 8일치 '봉송이왕전하동상' 기사를 당연히 장지연이 썼다고 적었는데 <매일신보>를 재검토하는 과정에서 이튿날 정정보도가 나간 것을 확인하고 이를 인용하고 해석한 부분을 '거두어들였습니다.'

그러므로 앞선 글('서훈 취소된 장지연, 그는 죄가 없다')에서 1917년 6월 8일치 '봉상이왕전하동상' 기사를 장지연이 썼다고 한 것은 분명 제 실수가 맞습니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이듬해 첫 날 신문에 실린 한시 내용에 비춰보면 장지연의 친일은 그야말로 '오십보 백보'가 아닐까 합니다.

김훤주
반응형